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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지혜와 지혜인들

한국 하브루타의 전형,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성리학 논쟁

by 코리안랍비 2022.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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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어느 분의 글을 나름대로 엮어 본 것입니다. 

《59세 퇴계, 31세 고봉에게 편지를 보내다》

옛날에는 어떻게 공부를 했을까? '切問而 近思' 절실히 질문하고 골돌히 생각하면
仁(진리)은 거기에 있다는 뜻이다. 진리를 질문하고 질문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깨우치는 것이다. 

진리에서 출발할 것인가, 아니면 진리를 향하여 갈 것인가, 우리는 고민을 해봐야 한다. 

이 고민에 절정에 퇴계와 고봉의 논쟁이 있었다.

옛사람은 질문을 하고 자신이 제기한 질문과 그에 대한 스승의 답변을 천착(생각)하는 것으로 공부(학문)를
했다.

그럼 누구에게 질문할 것인가.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해야 한다. 그 사람이 스승이고 멘토이다.

전라도 광주 땅에 기대승이란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독학으로 성리학을 공부했다. 성리학의 핵심 테제는
理氣論이다. 우주와 인간세계를 理와 氣의 논리로 설명
하는 이론이다. 理란 본질이고 氣는 작용으로 설명
된다.

기대승의 호는 고봉이다. 고봉은 독학으로 공부했으니
따로 스승이 없었다. 어떻게 독학이 가능할까? 

그래서 당시 대학자였던 퇴계 이황
을 멘토로 그의 학문을 모범으로 삼아 도전해 보기로
했다. 모범이라 했지만 실은 퇴계의 학설을 깨부수는
것이었다. 최고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은 당대 최고 실력
자와 붙어 그를 이기는 것이다.

바둑의 초단이 9단을 이긴다면 그가 바로 9단은 되지
못해도 9단을 이긴 명성은 얻을 것이다. 고봉 기대승은
그 길을 택했다. 그는 퇴계의 성리학설에서 사단칠정론
을 자신이 깰 주제로 잡았다.

사단칠정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인간의 감정에서 일어나
는 움직임이다. 사단은 선한 마음이고 칠정은 인간이
갖고 있는 감정의 기질이다.(기쁨, 분노, 욕심, 즐거움 등)
그런데 퇴계는 사단과 칠정을 구분하여 사단은 理에서,
칠정은 氣에서 생겨난다고 보았다.

고봉 기대승은 여기에 의심을 품었다. 기대승은 사단이나
칠정이 둘이 아니고 일체이며 하나의 감정에서 생겨난다
고 생각했다. 이는 이데아와 현상을 구분한 플라톤의
생각과 이데아는 현상이 투영된 것일 뿐 현상만 존재한다
고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만큼이나 차이나는 것이다.

1558년 10월, 31살의 기대승은 한양에 올라와 과거에
패스했다. 의기 양양해진 고봉은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검증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17년 연상의 선배인 하서 김인후를 찾아갔다.
김인후도 이 당돌한 신진의 치밀한 논리가 그럴 듯해
보여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신이 난 고봉은 다시 일재
이항을 찾아갔다. 이항은 1449년생으로 퇴계보다도
2살이 위였다. 이항도 일리있는 말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고봉은 두 사람으로부터 긍정적 답을 듣고 드디어
한양에 올라와 있던 퇴계 이황을 방문했다.

이제 갓 과거에 합격한 신줄내기 기대승. 성균관 대사성
으로 학문의 최고봉에 있던 이황. 대사성은 지금으로
치면 서울대 총장 격이다. 갓 입학한 1학년 학생이 총장
과 맞짱을 뜨기 위해 총장을 찾아간 것이다.

이것이 1559년부터 1566년까지 7년 간 고봉과 퇴계
사이에 전개되었던 사단칠정 논변이다. 두 사람은 이로
부터 12년 동안 무려 100통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학문적 논쟁을 이어갔고 이를 통해 고봉은 고봉대로 자신
의 학문을 완성시켜 나갔고 퇴계는 퇴계대로 학문의 원숙
을 다져갔다. 조선 유학사에 길이 남을 이 고봉과 퇴계의
사칠논변은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가 어떻게 공부를
하여야 하는지 학문을 대하는 성실함과 겸손 배려를
깨닫게 해준다.

긴 논쟁이 끝난 1566년 고봉은 퇴계를 스승으로 섬겼고
1570년 퇴계가 사망하자 그의 비석 묘갈명을 썼다.

퇴계가 사망하자 기대승은 일체의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기대승은 후손도, 그 흔한 초상화 한 점도 남기지 않고
떠나간 조선 성리학의 기린아였다. 이런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니 조선 성리학사에 놀라운 일이다. 

너무나 일찍 세상을 떠난 기대승, 아마도 그에 대한 기대는 여기서 마쳐야 할 것 같다. 



퇴계가 고봉 기대승에게 1560년 11월 5일에 보낸 편지

(해석문)

{서신을 보낸 뒤 가을이 다 가고 겨울도 거의 반이 되었습니다. 한가로이 지내면서 도를 음미하는 근황이 어떠합니까? 온고지신(溫故知新)하여 날로 진보됨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늙은 나는 다행히 근래 어지러운 시의(時議)를 면하기는 하였으나, 졸렬한 몸이 병에 휘감긴 채 지내고 있으니, 다른 것은 족히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앞서 공의 변유(辨諭)를 받고서 감히 후의(厚意)를 헛되이 저버릴 수 없기에 나의 변변치 못한 소견을 책자에 써서 보냅니다. 그러나 의지(義旨)가 천박(淺薄)하고 사설(辭說)이 한만(汗漫)하여 열람하는 데 번거로움을 끼치게 될 것이 매우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유태호(柳太浩) 집의 인편 왕래를 멀리서 헤아릴 수가 없어 공에게 보내는 글들을 그 집안일을 주관하는 종에게 보내어 인편이 있을 때 부쳐 달라고 했으니, 어느 때나 공에게 전해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서첩(書帖)과 액자(額字)도 갖추어 보냅니다. 공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매우 많지만 너무 번거로운 듯하여 이만 줄이고, 풍편(風便)에 회답 보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편지를 쓰노라니 슬프고 근심스러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삼가 절하고 이 글을 올립니다.
경신년(1560) 동짓달 5일 황(滉). 〈구곡(九曲)〉 십절(十絶)도 한번 웃고 보아 주기를 바랍니다.}

고봉 기대승 부부의 묘소.

퇴계 이황.
퇴계의 묘소.
비문.
  • 기대승과 이황의 논쟁을 다룬 글을 남겨주신 어느 작가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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