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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과 고전 이야기

명길묻63, 최고의 선에 머물기, [대학연의]를 읽고 읽다.

by 코리안랍비 2022.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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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전재 절대금지>


최고의 선(善)에 머물기 <<대학연의>>를 읽으며

“군자는 새로워지는 최선의 방법을 쓰지 않은 일이 없다”
-대학연의 중(中)에서

최근에 서재에 있던 작고 작은 책에 눈길이 갔다.
대학연의라는 책인데, <진덕수> 라는 주자학의 전문가가 기술한 책이다.



원래 주자는 사서삼경의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불교와 도교 그리고 유학의 핵심사상을 요약 정리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수많은 책과 글중에서 그는 공자의 <대학>을 좋아하였고, 공자의 손자가 썼다는 <중용>을 좋아하였다. 그가 <대학과 중용>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은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는가’와 ‘군자가 최고의 선에 어떻게 머물것인가?’를 밝히는데 노력하였다. 그래서 조선의 학자왕인 정조도 <대학>공부에 열과 성을 기울였다. 그는 <대학연의>를 자주 읽으면서 자신도 <대학공부>에 열과 성을 다하였다. 심지어 정조의 학사였다는 정약용도 <대학공부>에 열과 성을 다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학생들은 이 공자의 <대학(大學)>을 읽어야 한다.
시대에 어긋나는 것 같지만 상당히 현시대에 잘 어울리는 책이다.
필자는 옆길로 가는 버릇이 있는데, 꼭 좋은 책만 만나면 소개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는 것이다. 그런 안달을 표현하는 방법은 강연과 글쓰기이다. 그 안달을 표현하는 방법중에 하나인 글쓰기로 나의 심정을 표출하고 싶다.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어” “요즘 애들은 너무 튄다.”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성세대는 위의 말을 자주 사용하였다.

이집트의 피라밋에도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
유럽사를 볼 때도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들 사이에는
많은 의식의 차이를 보였다. 독일에서는 ‘키취’ 세대라고 하여서 버릇없고 도발적인 젊은이들을 말하는데 사용하는 용어이다. 동양사를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젊은이들이 예의없고 버릇이 없는 사람은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젊어도 성숙한 젊은이들이 예전에는 많았다. 하지만 버릇없고 소위 싸가지 없는 사람도 여전히 많다. 도전하는 젊음이 아름답다.

인류 역사의 어느 순간에도 신.구 세대 간에 의식의 차이가 없었던 시절은 없다.
젊은 친구들은 “왜 꼭 낡고 오래도니 길로만 가야 합니까? 전 새로운 길로 갈 겁니다” 라고 수도 없이 말한다. 젊은이가 젊은이 답다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한다.

그래서 플라톤의 [국가론]을 보면 “정치는 늙은이에게, 경제는 젊은이에게” 라고 말한다.정치는 관록과 경험이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 좋고, 경제는 새롭고 혁신에 밝은 사람이 하는 것이 좋다.

사람이나 사회는 항상 무슨 거대한 흐름 속에 있다. 그 흐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벌써 기성세대에 들어선 나 자신도 젊은 세대를 보면 답답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 옛날 어른 세대들이 그렇게 생각하였듯이, 어느새 나도 보수적인 사람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늙음과 젊음이 물 흐르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아간다. 젊은 사람과 사회가 나이를 먹으면 늙게 된다. 늙지 않는 것도 정상이 아니다. 그러면 또 다른 젊고 새로운 사람, 사회가 오는 것이 역사이다. E.H. 카아의 말대로 ‘역사라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인데, 늙어가는 세대와 젊은 세대들간의 대화가 또한 역사이기도 하다.

늘 새로워지려고 하는 것이 인간과 사회, 역사의 자연스러운 이치요 흐름이다.
우리는 ‘내가 머물 곳은 어디인가?’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지식도 필요하지만 이 지식에 어울리는 교양도 있어야 하고, 다른 이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는 문화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지식인’이나 ‘전문가’로 머물 것인가? 아니면 놀고 먹는 ‘유흥인’이나 아니면 모나지 않게 살아가는 ‘평범인’으로 머물 것인가? 우리는 그러한 자신의 삶의 위치, 사회적 지위를 무척 중요시한다. 우리는 직업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 직업인들에게도 다양한 가치관과 방향이 있다.

공자는 시와 음악 그리고 고전을 사랑했다. 이를 통해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를 즐겼다.공자의 ‘머문 자리’는 고상하고 멋진 자리였다. 그는 “시(詩)에서 감흥하고, 예(禮)에서 서고, 악(樂 노래, 춤, 연주 등 )에서 완성된다.” 고 하였다.

공자는 여러 방면에서 균형잡힌 문화인이었다.
우리는 단지 인류의 4대 성인중에 하나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다른 이들이 만든 것이고, 그는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한 위인’으로 이해하는 것이 제일 좋다. 그것이 유학에서 강조하는 ‘수기치인’과 관련이 있다. 유학이나 유교하면 = 수기치인을 떠올리는 것이 현명하다.

대학에는 3강령과 8조목이 있다. 이를 개인이 확장하여 자신의 가족과 가문, 그리고 사회와 국가를 다스린다는 정치철학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다룬다. 즉 ‘최고의 선(善)’을 추구하라는 목적을 말한다.

최고의 선(善)을 추구한다는 것이 바로 ‘내가 머물 곳이 어디인지’를 제대로 안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자리를 벗어나면 추하고 더러워지고, 그를 성서에서는 악이요 죄로 규정한다. 대학은 바로 ‘내가 머물 곳’에 대한 의식과 관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학>이라는 책에서 ‘시경’에 나오는 시를 빌려서 이를 표현한다. [이래서 필자는 대학을 공부하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시경에서는 ‘왕의 도읍 천리여, 백성들이 머물러 살 곳이다’ 라고 노래한다.
시경의 다른 글을 보면 ‘꾀꼴꾀꼴 우는 꾀꼬리여, 숲 우거진 언덕 가에 머무는구나’ 라고 했다. 공자는 “동물들은 동물의 자리, 식물들은 식물의 자리를 갖고 있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금수보다 못해서는 되는가” 식의 항변을 한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보면,
“인간, 얼마나 위대한 걸작인가, 생각은 신과 같고, 이해는 천사와 같다. 세계의 미요 만물의 영장이로다” 라는 대목이 있다.

공자는 인간이 대단한 걸작이고, 영장인데도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살면 어둠에 처하고, 악에 처하는 존재로 전락할 것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대학>>에서 말하는 이러한 가르침을 되새기면서,“나도 열심히 수양하고 공부해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데 헌신해야 겠다” 라는 다짐과 결심을 세워나갔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능력을 갖추고, 출세하여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데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살 만한 사회와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기를 열망하게 하는 포부이기도 하다. 이게 멋지고 바람직한 처세라는 것이다.

위에서 유학의 이상은 수기(修己) - 자기를 다스리고 가르치는 수양과 치인(治人) - 남을 다스리고 바르게 인도한다는 정신을 완벽하게 조화롭게 하여 경영과 행정의 필요충분조건을 갖추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앞서하는 것이 바로 ‘자기 수양’이다.

수기(修己)가 안된 사람은 치인(治人)을 하면 큰 일이 난다. 많은 수기(修己)가 안된 위정자(爲政者)들이 무리한 치인(治人)을 하려다가 낭패(狼狽)를 겪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본다.

“천자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자기 수양을 근본으로 삼는다.” <<대학 중(中)>> 자기 수양의 길은 그리 쉽지 않다.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에서 수기가 시작된다.

자기를 모르는 이들이 남을 어떻게 잘 알 것인가?
자신의 자리나 위치를 아는 것이 바로 주제파악이요 분수를 아는 것이다.
대학에 나온 유명한 <8조목>을 잠시 여기에 기술한다.

"옛날에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려는 사람은
먼저 그 나를 다스렸고,
나라를 다스리려는 사람은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히 했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닦았고,
몸을 닦으려는 사람은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했고,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뜻을 정성되게 했고,
뜻을 정성되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앎을 이루었는데,
앎을 이루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데에 있다."



그렇다면 수기(修己)의 시작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고 아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 [격물치지]라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공부 제대로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
공자는 아마도 새로운 지식을 열심히 익히면서, 그것이 인간 사회를 질서있고
윤택하고 좋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젊을수록 지식과 정보를 익히는데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지식과 정보를 얻는데 무척 느리고 쉽지 않다.
그렇다면 지혜와 윤리의 집으로 더욱 들어가야 한다.

철학자 칸트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공부할 것이 더 많아진다.’ 고 하였다.
여기서의 공부는 바로 ‘더 나은 세상과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공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상상하면서 공부한다’는 것이다. 논어(論語) 1장 학이편에도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정말 즐겁지 않은가?” 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지식과 더불어서 지혜와 윤리를 더욱 견고히 하는 것은 인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우리는 과연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지혜와 윤리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가?”

‘격물치지’라는 것이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이는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이데아’의 추구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물에는 각각의 ‘이데아’가 담겨 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필요한 공부라는 것이 바로 ‘높은 수준의 윤리성과 세상을 이해하고 사물을 이해하려는 지혜의 추구’라는데 있다. 그것은 여전히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육신의 나이는 늙지만 이 늙어짐은 세상이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의 나이’는 늙지 않는다.

그래서 깊은 사색이나 관찰, 그리고 통찰을 통해 우리는 어느 순간 이치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과거의 선비들과 학자들은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밭갈기]도 강조한 것이다. 책을 읽으면 중요한 삶의 윤리와 지혜를 얻는 첩경이 된다. 밭을 갈면 인간이 흙이라는 것과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근본원리를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대학>을 오래 읽고 연구한 추사 완당 김정희 선생은,

“사람이 살면서 가장 즐거운 일이 두가지가 있는데, 한가지는 책을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밭가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성의(誠意)가 있어야 한다. 성의는 정성이고 의미있는 삶의 추구이다. 성의는 스스로에게 성실한 것이다. 이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다. 키케로는 ‘우리는 오래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옳게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물론 소크라테스도 ‘우리가 존중할 것은 단순한 삶이 아니라 올바른 삶이다’ 라고 하였다.

‘나는 홀로 있을 때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된다’라는 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유학의 가르침이 정말 오늘날에도 여전히 뛰어나고 높고 이상적이다.

진정한 리더를 꿈꾼다면 <대학>공부를 권한다. 대는 큰 것이요, 학은 배움이니‘큰 배움’을 추구하다보면 수기치인의 길에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몸은 갈수록 후패하나 우리는 더욱 마음을 새롭게 할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최고의 선(善)에 머무는 길’이다. 부족한 글 배독하여 주셔서 감사하다.

  • 구글출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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