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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칼럼과 에세이

에스플랑크니스테(Esplanchnisthe)그리고 크리스마스

by 코리안랍비 2023.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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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플랑크니스테(Esplanchnisthe)
그리고 크리스마스



한해가 저물어 가는 세밑입니다.
12월은 겨울입니다.
이 12월을 가장 밝고 아름답게 빛내는 시간은
바로 '크리스마스 타임'입니다.

잠시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가져보려고
과거에 공부하던 성화를 보았습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A prodigal son]이라는 렘브란트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렘브란트는 젊은 시절 미술의 천재였지만 상당한 호색한이이었고, 타락한 지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중요한 시기에 운명을 달리한 아내와 자식들 덕분인지 개과천선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신앙에 귀의하여서 변화된 모습으로 '성화'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깊은 성경공부를 합니다. 그리하여 탄생한 작품이 '돌아온 탕자'입니다. 지금 러시아 미술관에 걸려 있는 명화입니다. 이 명화에 깊이 사로잡힌 '헨리 나우웬'이라는 카톨릭 신부이면서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의 '책'에도 이 그림은 등장합니다.


그리고 다른 그림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성모 마리아의 피에타'입니다. 이는 예수의 어머니로서 아들을 잃고 조용히 신음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두 장면은 모두 성서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성서 누가복음 15장에는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한 번 쯤 들어봄직한 탕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완고하고 율법적인 형과 그리고 제멋대로이며 함부로 인생을 살아간 동생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15장은 '다른 성경은 다 없어져도 이 이야기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가 극찬하여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나 지신도 이 말씀으로 변화가 된 사람입니다. 의심많고 제멋대로인 나 자신이 신앙을 제대로 갖게 된 계기는 바로 '돌아온 탕자를 영접한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신앙은 감동이면서 감화를 받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둘째 아들은 먼 나라로 갔다가 세월이 흘러서 완전한 초라한 행색의 거지꼴로 나타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나 내가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둘째 아들은 이 고백을 하고 터벅터벅 떠난 길을 다시 돌이켜 돌아옵니다. 다 해어진 넝마의 옷과 찢겨진 신발, 그리고 머리털 마져도 다 사라져버린 피골이 상접한 아들을 보고서 아버지는 버선발로 달려갑니다. 이 때 사용한 그리스서어가 오늘의 [에스플랑크니스테]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겼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측은히 여기고, 불쌍히 여겼다 라고 하기에는 이 장면의 아버지의 감정을 충분히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글을 보니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에 의하면, 이 단어는 '내장을 꺼내다' 혹은 '내장을 삼키다' 라는 의미입니다. 내장이 요동치는 것과 같은 격렬한 육체적 반응이 곁들어진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 그리서 몸으로만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아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아들에게 죄에 대한 용서나 속죄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건강하게 돌아온 아들,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 죽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을 위하여 아버지는 엄청난 '잔치'를 열어줍니다.
착실한 큰 아들과의 형평성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큰 아들은 항시 있었기에 아버지의 것이 모두 큰 아들의 것입니다. 그런데 저 둘째는 잃었다가, 죽었다가 다시 얻고 살아난 것이니 얼마나 대한한 감격입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보자마다 창자가 밖으로 나갈 것만 같은 극한 감정에 휩싸여 아들을 껴안습니다. 렘브란트는 이 극적 장면을 깊이 묵상하고 묵상하여 위대한 '돌아온 탕자'의 작품을 남긴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바로 이러한 극한 감정이 크게 연출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저 베들레헴이라는 곳에 아기로 태어난 예수의 모습에서 우리는 큰 슬픔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아기를 보고 큰 슬픔을 느낀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시므온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거룩한 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한 연약한 순같은 아기 예수에게 시므온은 가혹하며서 고통과 고뇌의 순간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그 때에도 사용되는 단어가 바로 '에스플랑크니스테'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격렬하고 요동치는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단순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온몸으로 보여주는 극한 과잉의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오장육부 깊은 곳에서 나오는 원초적인 감정이어서 우리는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인류사에 자녀에 대한 극한 사랑을 보여준 부모의 모습, 아버지의 모습, 어머니의 모습을 우리는 자주 접합니다. 그 모습을 나이가 들어서 아버지가 되고 자녀를 키우면서 어느 정도 체험하게 됩니다. 아무리 못나고 불효자라도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 대한 감정은 죽을 때까지 불타오릅니다.

탕자의 이야기에만 '에스플랑크니스테'가 나오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누가복음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아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조용히 오열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또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는 십자가상의 예수의 감정을 표현할 때도,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감뇌하는 모습을 복음서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예수의 생애는 결코 신학적이거나 종교적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 세상의 사람들을 사랑하다가 떠난 사랑의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내 자신이 오랫동안 예수의 전기를 읽고, 복음서를 읽어도 그의 사상은 신학적이고 종교적이지만 그의 행동에서는 그것을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죽음의 순간
우리는 수많은 감정이 교차합니다.
가장 극렬한 감정은 바로 '가슴이 칼로 저미는 것 '같은 감정입니다. 이보다 큰 스트레스는 없다고 합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사랑의 감정, 그 사랑을 잃은 감정은 말로 표현 할 수 없기에 그저 몸으로 보여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는 얼마나 한계가 많은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생명의 언어'가
사람을 살리는 언어입니다.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불멸의 언어가 바로 사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언어입니다.

크리스마스입니다.
지난 2년여의 코로나 위기나 고통의 시간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소중함, 자녀의 소중함, 이웃의 소중함, 친구의 소중함, 시간이 소중함, 나의 소중함도 발견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모두 조용히 이 고통의 시간,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눈을 밖으로 뜨지 말고 안으로 떠보십시오.
나를 더 사랑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남을 더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무엇이 남는 것인지, 무엇이 진정으로 있어야 하는지,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따뜻하고 강렬한 울어주는 가슴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이 크리스마스는 귀하고 귀한 메세지를 남깁니다.

에스플랑크니스테

오늘 이 단어가 나를 울립니다.
울면서 기록하는 이 글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잔잔한 평안함도 깃듭니다.
울어야 삽니다.
가장 잘 기억하는 방법은 '감동'받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감동은 올해도 느낄 수 있습니다.
깊이 아기 예수의 오심,
돌아온 아들을 받아준 아버지의 모습,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서
우리는 아직 따뜻하고 가슴이 훈훈해지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렘브란트의 기도로
이 글을 마칩니다. 소리내어서 낭독하여 보십시오.

나 가는 곳마다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하옵소서
아름다움의 불길 속에 내 혼이 있다 할지라도
오직 주와 함께 있을 때의 기쁨을 알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여,
이 곤고함에서 주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이 순간 내 영혼이 피곤하나이다.
오직 새 힘과 은혜를 내리옵소서.
내게 의지를, 감각을, 용기를 내리옵소서.

내 영혼의 신령함을 주신 주님,
육신의 연약함과 실수를 없게 하시고,
포로같이 슬프게만 살지 않게 하옵소서.
내가 어떻게 해야 내 자신을 지킬 수 있사오리까
주님 없이는 모든 선함도 실패가 되고 맙니다.
운명의 제단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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