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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과 고전 이야기

세한도(歲寒圖),추사의 시련으로 탄생한 우정의 그림

by 코리안랍비 202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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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전재 절대금지>

 


세한도(歲寒圖),
추사의 시련으로 탄생한 우정의 그림

한문학을 하신 아버지를 따라서 어려서 본 그림중에 하나가 [세한도]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추억은 평생을 보장한다. 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추사 선생님의 글씨나 어록에 어느 정도 귀띔을 한 것 같다. 초등시절부터 추사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으로서 추사에 대한 좋은 감정과 더불어서 그분의 삶의 발자취를 다 알고 싶어 하는 바램도 강하였다. 특히 추사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추사체]이기도 하지만, 그의 대표적인 국보인 [세한도]가 자아 떠오른다.

세한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조선 선비의 학문과 예술의 결정체라고 보아야 한다. 예산 추사고택에 약 50번 이상을 방문한 사람으로서 추사의 그림과 글씨에 나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다. ‘추사연구회’에 사람들과 잠시 교우하면서 그의 글씨체와 더불어서 그의 [세한도]에 대한 공부도 자주 하게 되었다.


시련의 그림, 세한도

우리나라 문화재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작품을 손꼽자면 단연 세한도라고 할 수 있다. 1844년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 유배시절에 제자인 이상적에게 그려진 그 그림은 180년동안 10번의 주인을 거치게 된다. 시련의 그림인 이 세한도는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인 김병선과 아들 김준학을 거쳐 한말의 권세가인 민영휘 집안으로 넘어가게 된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흥선 대원군의 사부이기도 하여도 아마도 민영휘 선생은 그를 흠모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아들 민규식을 거쳐서 당시 경성제대의 교수 후지쓰카 지가시를 따라서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지만 1944년 손재형의 노력 끝에 결국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손재형이 정치투쟁이 휘말리면서 그 그림은 이근태에게 넘어가고 당시 갑부였던 손세기라는 사람의 소유가 되었고, 결국은 손자인 촌손창근씨가 세한도의 주인이 된다. 결국 손창근 씨는 이 세한도를 국립박물관에 기증하게 된다.

세한도는 시련의 그림이다. 이 시련을 거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그림이다. 그림 역사상 이런 그림은 찾아보기 힘들다. ‘해동공자’라는 별명을 가진 천재 김정희 선생의 그림은 이렇게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이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국보가 된 것이다.


여기서 일본인 후지쓰카 교수가 입수한 [세한도]는 나중 손자에 의해서 보관되었고, 2700점의 추사관련 자료와 더불어서 동양화나 한국화의 작품 2700편도 과천시에 기증된다.

후지쓰카 아키나오 아들은 세한도를 돌려받으려고 100고 초려를 한 손세형에게 말한다. “사람이 공수래는 있어도 공수거는 할 수 없지 않겠느냐” 라고 말했다.
여기에 마지막 소장자였던 손창근 씨는 자신의 조부가 찾아왔던 세한도를 2018년 국립박물관에 기증하면서 1000억원에 해당하는 부동산을 세한도와 함께 국립박물관에 기증한다. 그도 말한다. “죽어도 가져가지 못할 것을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기증하게 되었다” 라고 하면 일본인 후지자카 아들과 같은 말을 한다. 세한도는 이제 우리나라의 국보요 우리나라의 국립박물관에 고스란히 모셔지게 되었다.


동양미의 진수, 세한도

중고등학교 시절 보았던 세한도는 서양 미술과는 달리 수수하고 너무나 단초로운 그림이었다. 이 그림에 대한 감상은 그저 ‘별 것도 아닌 그림’이라는 생각만이 앞섰다. 하지만 동양그림의 특징은 서양그림의 특징과 확연하게 달랐다. 서양의 그림은 유성물감을 이용하여 다양한 채색을 하고 색상을 달리하는데 있지만 동양화는 먹의 농담과 그리고 서예의 기품이 어우러진 철학과 사색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김정희의 이 그림은 문인화(文人畵)라는 이름을 갖는다. 하지만 그림에서보면 그림이 정말 조잡해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소박하다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그림이 너무 거친 것 같고, 아마추어의 그림과 비슷하다고 보기도 한다.

그림을 보면 가운데 덩그라니 집 한 채가 있고, 그 주위로 네 그루의 소나무가 보인다. 그리고 오른쪽 상단에 추사체로 [세한도]라고 쓰여 있다.
이 그림은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지만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두 번씩이나 북경에서 귀한 책을 보내부녀 그를 잊지 않고 찾아온 제자 이상적에게 감사의 정을 듬뿍 담아 준 그림이다.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나 잣나무가 그대로 푸름을 알게 된다” 는 공자의 [논어] 구절을 인용해 제자의 변치 않는 인품을 늘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해 그렸다. 당시 제자 이상적인 스승을 위해서 무려 120권이나 되는 서책을 청나라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당시 책 한권의 값이 집한채 값과 비슷하다고 하였으니, 이상적인 실로 어마어마한 선물보따리를 추사께 가져온 것이다.


여기서 집 오른쪽에 있는 소나무 두 그루는 스승인 김정희를 상징하는 것이고, 왼쪽의 잣나무 두 그루는 제자인 이상적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추사의 발문(跋文)
세한도에는 제법 긴 발문이 나온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태사공 사마천이 “권세나 이익 때문에 사귄 경우에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교제가 멀어지는 법이다” 라고 하였다. 그대 역시 세속의 거친 풍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찌 그대는 권세가와 재력가를 붙좇는 세속의 도도한 풍조로부터 초연히 벗어나, 권세나 재력을 잣대로 삼아 나를 대하지 않는단 말인가? 사마천의 말이 들렸는가?

공자께서 “일 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고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철을 통해 늘 잎이 지지 않는 존재이다. 엄동이 되기 이전에도 똑같은 소나무와 잣나무요, 엄동이 된 후에도 변함없는 것이 소나무와 잣나무이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유달리 엄동설한이 되어서야 그것을 칭찬하셨다. 지금 그대라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에 더 잘 대해 주지도 않았고 곤경에 처한 후에 더 소홀히 대해 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곤경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는가. <중략>

시련을 겪을 때만 진정한 친구만이 아니라 진정한 나 자신도 확인할 수 있다. 좀 더 확대하면 시련을 겪은 사람, 그 시련 속에서도 자신의 방향과 진정성을 잃지 않고 헤쳐 나온 사람에게서 신뢰를 느낀다. 말로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향기를 느끼는도다. <중략>


그의 긴 발문에서 보면 추사는 자신의 시련을 통해서 새롭게 거듭난 인성을 보여준다. 권문세가의 아들이었지만 그러나 2번이나 걸쳐서 유배를 가야 했고, 혹독한 시련과 아픔을 겪으면서 그는 진정 자신의 사상을 떠나서 진정한 ‘인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추사의 세한도에서는 보면 그가 이것 저것 꾸미지 않은 ‘진정성’을 발견하게 된다. 소박하지만 소신(所信)을 보여주고 있으며, 단순하지만 올곧은 추상(秋霜)같은 당당한 기품도 보여준다.



학예(學藝)의 일치(一致)

우리는 흔히 추사 김정희 선생의 추구한 세계를 [학예일치學藝一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말은 추사 이전에는 학문과 예술이 하나가 되지 못하였던 것이고, 추사만큼의 문인화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많은 문인들은 그림만 그리거나 글씨만 써 왔다. 하지만 추사는 달랐다. 그림과 더불어서 글씨가 같이 어우러져서 학문과 예술이 서로 다르지 않았다.

추사에게는 그림은 하나의 학문이었다. 그림이 학문이요, 학문이 그림이다. 그는 학문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기 우히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늘 연구하였다. 그는 시서화를 통달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문사철을 통탈한 인물이 되었다.
추사의 세한도는 바로 학예일치의 절정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의 그림에서 보여주는 법칙은 [초묵법]이다. 그가 유배가기 전에 완성된 그림의 법칙이 바로 [초묵법]이었다. 30년간의 연구의 결실로 완성된 것이 바로 초묵법이다. 세한도에서 보여주는 ‘황량함’은 곧 오랜 동안의 수련의 결과였다.

‘황량함’속에서도 빛나는 추사의 [학예일치]의 정신이 세한도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세한도의 4방의 인장

세한도에는 4방의 인장이 담겨 있다. 정희, 완당, 추사, 장(長)무(毋)상(相)망(忘)이다.추사의 인장은 정말로 우리 나라의 인장의 문화를 보여준다. 나는 예산에서 ‘인장박물관’을 가 본적이 있다. 은퇴한 노 교수가 차린 [인장박물관]에서 추사의 인장을 여러개를 보았다.

추사는 자신의 호를 100개 이상을 사용하였다. 한국 역사상 자신의 호를 100개 이상을 가진 이는 추사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200여개의 인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는 ‘동해순리’라는 인장을 제일 아끼었다.

그의 당호는 완당이었지만 그것은 청나라의 스승인 완안이라는 사람이 직접 하사한 호였다. 청나라에는 이미 추사라는 호를 가진 사람들이 이었다. 왕평이나 강덕량이라는 사람들이 추사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장무상망]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라는 의미이다. 이는 원래 한나라의 ‘기와’에 새긴 글이다. 그런데 추사는 이 한나라의 기와에 새긴 [장무상망]을 세한도에 넣은 것이다.

장무상망은 ‘오랫동안 내가 자네를 잊지 않겠네, 자네도 나를 잊지 말게’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논어의 <자한편>

추사는 세한도라는 그림에서 논어의 한 구절을 되살려낸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도” 이는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라는 의미이다. 이상적도 마찬가지이다. 추사에게 이상적은 늘 변함없는 푸르고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 같은 존재였다.
나중 이상적은 추사에게 편지를 한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려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어찌 이렇게 분에 넘친 칭찬을 하셨으며 감개가 절절하셨단 말입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나 이권을 좇지 않고 스스로 초연히 세상의 풍조에서 벗어나겠습니까? 다만 보잘것 없는 제 마음이 스스로 그만둘 수 없이 그런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책은 마치 문신을 새긴 야만인이 선비들의 장(章)보(甫)관(冠)을 쓴 것과 같아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정치판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한 것이 아니므로 저절로 청량(淸凉)세계에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어찌 다른 의도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서 장황을 한 다음 친구에게서 구경을 시키고 제영을 부탁할까 합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그림을 구경한 사람들이 제가 정말로 속물에서 벗어나 권세나 이권의 밖에서 초연하다고 생각할 까 하는 것입니다.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치 않은 일입니다.”


추사의 처음 발문이후 세한도에는 여러 발문들이 붙는다. 그래서 세한도는 무척 길이가 길어진 그림이 된다.

마지막 발문은 광복이후에 가장 뛰어난 문인으로 아려진 담원(위당) 정인보(1893~1950) 선생이 남긴다.

진상업(정인보 선생의 발문의 제목)

서릿바람 씽씽 불어 나뭇잎들 다 지고
나뭇가지 삐죽삐죽 생기마져 거의 없네
파리한 한 늙은이 홀로 굽힘 전혀 없이
천지가 시작할 때 푸른 모습 그대로네
움츠린 머리털은 고슴도치 엎어논 듯
추위를 무릅쓰고 대와 같이 의젓하네
해마다 꽃과 버들 눈바람에 피어나도
쓸쓸한 맘 품고 사는 이런 사람 예 있다네
완당께서 옛 학문을 우선에게 전해주고
솔가지 꺽어 들고 역(易)의 이치 연구하니
압록강 언저리에 하얀 햇빛 차가운데
유배객은 집도 없이 고향 생각 슬프구나
그대는 일찍부터 송백 절개 떨치더니
밝고 하얀 종이 위에 고스란히 그려냈네
생각나네 그 옛날 우리집 초당에는
몇 송이 매화꽃이 눈 손에 피어났네


추사의 세한도는 [시련속에서 피어난 천년의 그림]이다.

세한도는 총 14미터나 되는 작품이 됩니다.
청나라의 문인인 조무견이 있었습니다. 동양의 천재인 김정희를 기다리다 못 본 그는 말했다. 30년을 기다렸으나 볼 수 없었던 추사에게서 그는 극한 '연민'을 느낀다.

“추사라는 이름 일찍 들었으나 아쉽도다.
한 번도 만나지 못 했네”

한국과 중국 당대의 문인들이 쓴 감상문(발문)까지 더해진 세한도는 이제 국경을 뛰어넘은 동아시아 최고의 걸작으로 거듭나 있다. 나중에는 일본의 문인들까지 해동공자인 '추사'의 멋과 의에 감탄한다.

  • 추사고택 구글출처 이미지 -&nbsp; 본 필자는 약 50회 이상 방문



우정의 그림 ‘세한도’

우리도 세한도를 그리듯 우리의 우정을 더욱 꽃피어야 할 것이다.
학예일치의 세월을 아직도 이루지 못한 나이다.
앞으로 학문과 예술이 하나로 융합되고 복합되어져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를 만들어보고 싶다.

추사가 55세가 넘어서 유배되었던 곳은 제주도 대정읍이다.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서 제주도에서도 가장 살기 어려운 곳이었다고 한다. 가끔 예산의 [추사고택]을 방문하였는데, 앞으로 제주도 대정의 [추사 유배지]도 방문하여서 추사의 정신을 더욱 기리고 싶다.

세한도는 최소 ‘백억 100억’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고 한다.

무가지보(無價之寶,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물)의 세한도
전 국민이 추사의 이 그림을 보면서 ‘우정의 소중함’과 더불어서 ‘학문과 예술의 일치’를 추구하였던 추사 김정의 선생의 정신을 잘 배우고 고양하기를 바란다. 이 그림의 진짜 주인은 '우선 이상적'이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 그림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 그림을 그린 추사를 기억해야 하지만, 이 그림을 받은 우선 이상적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시점을 바꾸어 보게 하는 그림이 바로 [세한도]이다.

약 20편의 문헌을 보면서 정리한 이 초라하고 황량한 글이
그저 배움이 부족한 선비의 노력이라고 보아 주기를 바란다.

길게 쓴 글이 마치 추사의 세한도의 발문처럼 보인다.
인내하며 힘을 내서 읽어준 분들에게 감사하다.

  • 구글출처 이미지 - 세한도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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