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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과 고전 이야기

명길묻35, 강상구의 [그때 장자를 만났다]의 철학적 읽기

by 코리안랍비 2022.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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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자유하라
자유의 스승, 장자


스승이란 누구인가? 과연 나는 스승을 삼은 분이 있고, 스스로의 다른 이의 스승이 되어 본적이 있는가? 스승은 반드시 그를 따르는 제자가 있어야 한다. 혼자 스승 노릇을 할 수는 없다. 물론 제자도 혼자 제자 노릇을 할 수는 없다. 스승과 제자간에는 사제관계와 사제지덕이 존재한다.

과연 그렇다면 자유를 외치고, 자유에 저항하는 것에는 배척을 하였던 ‘자유 사상가, 자유의 사람 장자’는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는가? 중국에서는 공자나 묵자, 한비자는 많은 여러 수의 제자들을 거느렸다. 공자의 경우 500여 제자가 있을 정도로 엄청난 제자그룹을 형성하다. 그렇게 자신들을 따르는 제자들이 학파를 이루고 나중에는 정치세력을 일구었다. 그래서 유가나 묵가 혹은 병가는 많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당대의 시대와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축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세월이 흘렀어도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이 만든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은 지금도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동양은 물론 세계 곳곳으로 나아가서 자신들의 사상을 펼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나라는 단연 한국이다. 한국에서도 여러 많은 중국선현들의 사상들이 흘러와서 한국도 [여러 사상들의 집합소]라고 부를 수 있다. 신라 고려에서는 불교를 조선에서는 유교를 받아들이고, 조선후기에는 천주교나 다른 서양의 학문들을 받아들여서 일약 한국은 [문자의 나라], [교육의 나라]로 발돋움을 한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 나라도 많은 사상가들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상가들의 사상을 아직도 흠모하고 따르는 이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늦은 사상적 흐름을 탄 것이 바로 ‘도교’이다. 한국의 경우 명리학보다는 성리학이 더 강세여서 명리학과 관련이 깊은 ‘도교’에는 그리 끌려가지 않았으나, 민간에서는 무속이나 민간신앙에서는 ‘도교’에 상당히 끌렸다. 그러면서 성리학과 대비되는 노장사상들이 편만하였다고 보인다.


노장 사상이라는 것은 노자와 장자의 가르침이지만, 이들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다만 장자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아무데도 얽매이는 것에 대한 저항사상’에 더 가깝고, 자유를 위한 투쟁사상에도 가깝다.

그래서 나는 장자를 ‘자유의 스승’이라고 부른다.
유가에서 말하는 스승은 한유라는 걸출한 유학자의 말을 빌려서 본다. 한유는 스승을 말하기를, “성현(聖賢)의 도(道)를 전하고 학업(學業)을 가르쳐주며 의혹을 풀어 주는 자(者)”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를 보면 스승이라는 자는 앞서가는 자이며, 무엇보다 무지를 깨우쳐주고, 마음속에 의혹을 풀어주는 지식인의 입장이 크다. 그런데 장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타의 구분과 시비의 대립마저 초월하여 절대의 경지, 자연의 경지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인간의 이상이자 참된 스승이라 여겼다. 장자를 보면 미국의 초월주의자 ‘헨리 데이빗 소로’가 연상이 된다. 그도 하버드를 나온 걸출한 천재이지만 장자만큼의 ‘자연주의와 자유주의’를 추구한 인물이라고 비추어진다.

이러한 스승상을 지식적인 스승이 아니라, 자유의 스승이라고 붙여도 된다. 장자는 [자유론]으로 대변되는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과도 거리를 가진다. 그는 자유로운 인간은 어떤 모습인가? 그리고 왜 인간은 자유롭지 못한가? 에 대한 평생의 연구를 했던 인물이다. 장자는 자신의 지은 [장자(莊子)]에서 그의 [자연주의식 자유]에 대해서 갈파한다.

  • 다음 출처 이미지


그는 원래 몽나라 사람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유가나 묵가의 사상에 대해서 공격하였고, 유가나 묵가의 사람들도 그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하고 자유분방한 언변에 이길 자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관직으로 나가는데는 상당한 걸림돌이 있었다. 물론 그도 벼슬길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러 실력자들은 장자를 모셔가기 위해서 온갖 애를 썼다. 그러나 장자는 도리어 태산같이 요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초나라의 위왕은 장주(莊周)가 상당히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막대한 상금을 주고 제상으로 앉히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장주 스승은 말한다.

“천금은 막대한 돈이고 재상자리는 존귀한 자리이다. 자네는 교제(제사)에 쓰이는 희생물인 소를 보지 못했느나? 몇 년 동안 잘 길러 비딘 옷을 입히고 종묘로 끌고 들어간다. 이 때 그 불쌍한 소가 차라리 돼지새끼가 되고 싶어도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니 자네는 빨리 돌아가 나를 괴롭히지 말게 나는 차라리 흙탕물 속에서 헤엄이나 치며 여유(旅遊)작작 하려네. 나라를 가진 주권자에게 구속받고 싶지는 않네. 평생 동안 출사(出仕)하지 않고 내 멋대로 즐기려 하네” 라고 하였다.


장자는 당대 맹자와 동시대인이다. 장자와 맹자 사이에는 논쟁이나 여러 기록은 없지만, 맹자는 공자를 최고의 스승으로 삼고, 장자는 노자를 최고의 스승으로 삼았다.

포항공과대의 박이문 고 석좌교수의 책을 보면,
장자 사상의 특징을 언급하고 있다.일단 장자 사상은 스토리로 만들어져 있어서 체계적인 설명이 어렵다는 것과 해석도 상당히 난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의 사상은 노자의 사상보다 더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분명 스토리는 논리(論理)보다는 학문적인 체계가 약한데도 스토리는 논리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지닌다.

박이문 교수는 장자사상은 ‘자유’에서 풀어서 ‘자유’로 마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1983년 박이문의 논문에서)

자유의 개념으로는 , 노자의 무위자연, 자유자재, 자연이연 등의 의미들이이다. 자유, 자연, 자재 라는 3가지 주요 개념에서 장자를 이해하려년 ‘자연’에 집중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더라도 오늘날 사상적 측면을 보면 ‘자유’라는 것을 중점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서양서상과 궤를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것은 쉽게 생각하면 속박이나 구애받음이 없이 하고자 하는 바를 마음대로 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는 자유의 적극적인 의미보다는 소극적인 의미이다. 자유를 이해하려면 해방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장자의 자유라는 것은 “인위를 가하지 않은 천연(天然) 본래(本來)의 상태”로써 이른바 도(道)라는 것을 의미한다.

장자에게 자유는 도(道)이다. 그에게 자유는 자기 자신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그러므로 자기 이외의 타자(他者)에 대립하지 않는 절대적인 무엇인가를 말한다.
장자의 자유는 타자의 개입이 없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자유이다. 자연을 보면 타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로 존재함으로서 자유를 누리는 형국을 보게 된다.

장자의 책을 보자.
장자의 책에 보면 일(一)즉(卽)전(全) - 하나는 곧 전체요, 전(全)즉(卽)일(一) 전체는 곧 하나다. 라는 세계관이 있다.
[한쪽에서의 분산은 다른 쪽에서의 완성이며,
한쪽에서의 완성은 다른 쪽에서의 파괴이다.
모든 사물은 완성이건 파괴이건 다 같이 하나이다.
다만 도(道)에 다다른 자만이 다같이 하나임을 깨달아,
자기의 판단을 내세우지 않고 사물을 평상시의 자연스런 상태 속에 맡겨 둔다. 평상시의 상태란 아무 쓸모가 없는 듯하면서도 오히려 크게 쓸모가 있으며(무용지용의 도), 이런 쓸모가 있는 것은 무슨 일에나 스스로의 본분을 다하고 자기의 삶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충분히 자기의 삶을 즐길 수 있으면 도에 가깝다고 한다. 모든 것을 그저 자연에 맡길 뿐, 그러면서도 그런 따위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것을 도라고 한다.] - 장자의 제물론(齊物論) - 안동림의 번역본


이 말은 [천지와 내가 함께 살아가고 만물과 내가 하나가 된다”라는 개념이다. 결국 자유라는 개념은 천지와 내가 하나되는 상태를 말하며, 인위적이거나 속박이나 구애를 받지 않는 상태다. 그리고 어떤 대립이나 갈등을 넘어서는 통달무애의 경지(自在)인 것이다.


장자는 그렇다면 “왜 인간은 자유롭지 못한가?”에 대한 요인을 밝혀야 했다. 우리가 어떤 고전을 읽을 때 반드시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 장점과 단점을 둘다 살펴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자유롭지 못한가?

자유하고 싶어도 왜 자유롭지 못한가?

장자(莊子)가 밝히고 싶은 것은 물(物)이었다.
물(物)혹은 물질(物質)이 자유에 대한 요인이다.
그는 얽매이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폭넓게 잡고 있다.
일단 인간도 하나의 물(物)이다. 그리고 인간의 지식. 욕망.감정. 인의예악도 물(物)이다. 장자에서 말하는 물(物)의 의미를 범주해보면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장자에게 물(物)이란
첫째, 감각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
“무릇 모양과 상(象)과 소리와 색(色)을 갖는 것은 모두 물(物)이다”

둘째, 우리 의식의 대상을 말한다.
“언어로 논의할 수 있는 것은 물(物)의 조야(粗野)한 것이요, 의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물의 정미(精微)한 것이다. 지사(지식인)는 변란으로 지모(智謀)를 쓸 일이 없으면 즐겁지 않고, 변사(辯士, 선비나 웅변가)는 제 의견을 말할 기회가 없으면 즐겁지 않으며, 찰사(察士, 협상가)는 말다툼을 해서 상대방에게 이기지 않으면 즐겁지 않다. 이들은 모두 물(物)에 구속되어 있다.

셋째, 도덕적 가치를 말한다. “천하 사람들은 모두 인의(仁義)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달린다. 이야말로 인의로써 사람의 본성을 바꾸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것을 한 번 말해보자. 하은주 삼대(三代)이후로는 세상 사람들이 물(物) 때문에 자신의 본성을 바꾸지 않는 이가 없다. 무엇 때문에 물(物)로서 일을 삼겠는가? 나는 이 대목에서 도덕적 가치마져도 물(物)로 보는 장자의 식견에 놀란다. 사람들은 물(物)로서 자유를 누리고 싶어하는 본성이 강한 것도 보았다.

넷째, 사람을 의미한다. “자연으로부터 명을 받아 오직 요.순 임금이 우뚝하고 바르니, 만물의 으뜸이다.” 장자는 요.순 임금만한 사람을 못만났는 것 같다. 이순신 장군의 형님이 이요신이고, 자신이 순신이다. 바로 요순 임금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도 물욕(物慾)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다섯째, 정치제도나 세상사를 말한다. “막고야 산에 어떤 신인(神人)이 살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천하를 일로 삼으리요? 그 사람은 그의 티끌과 먼지와 겨 등으로 또한 요.순을 지어낼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물(物)로서 일을 삼는가?”
장자는 물(物)에 구속된 협소한 자아의 인간상을 비판하고, 본연의 자유를 만끽하는 새로운 자아를 모색한 것이다.

자유를 부르짖은 장자의 사상은 지금의 현대인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다고해서 공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장자의 생각은 이렇다.

 


“이 세상 아닌 다른 세상은 없다. 그리고 삶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삶의 외부적 조건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적 요인이 더 크게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삶은 가능한 한 즐겁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는 마치 성경 전도서 12장에 나오는 말씀과 비슷하다. 청년의 때에는 청년의 낙을 누리고, 장년의 때에는 장년의 낙을 누리라는 것이다. 마치 이 세상은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터이고, 이 놀이터에서 우리는 그저 어린아이처럼 잘 놀면 된다는 것이다. 장자의 생각으로는 우리는 이 땅에 놀러 온 것이고, 잘 놀다가 가라는 것이다.

삶이 비극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우리들이 의식을 갖고 무엇인가를 욕망하지만 우리의 실제 삶이 이렇나 욕망과 어긋나고 불충족 되어지는데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욕망을 버리고 주어진 삶의 조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이 더 이상 아픔과 비극일 수 없다 라는 것이다.(박이문 교수의 장자연구 중(中)

삶을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보는 관점의 전환
고통도 즐길 수 있는 낙(樂)으로 보는 관점의 전환
이 전환이 바로 자유의 경지에 이르는 관건이다.


갑자기 자치통감을 저술한 사마광(司馬光)의 말이 생각난다.

“경전(經傳)을 가르치는 스승(경사(經師)를 만나기는 쉬워도
사람을 가르치는 스승(인사(人師)는 만나기가 어렵다”

장자는 자유의 스승이다. 이 스승은 경전에서 자신의 사상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향하여 사람에게 자신의 자유사상을 펼친다. 우리는 경전처럼 되지 않는다. 경전처럼 된다면 어려서부터 경전을 가르칠 것이다. 물론 경전은 삶의 중요한 효과나 인식체계를 형성하지만 그렇다고 경전이 삶의 근본적인 것까지 바꾸는 능력은 갖추고 있지 않다. 자유는 사람이 누리는 것이다.

세간의 학문은 입신출세에만 집중되어 있다. 이런 스승들이나 교사들은 흔하다. 하지만 자유이념과 인간본성을 가르치는 참스승은 드물다.

성공과 출세에 눈이 멀어서 물욕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이 많다. 자본주의가 마치 자유를 줄 것이라는 대착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자본주의는 그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적어도 장자는 수단이 중심되는 세상에서 목적이 중심되는 삶의 전환을 하라고 가르친 ‘인사 - 사람의 스승’이다.

수단이 목적으로 전도되지 않고, 물질이 정신을 앞질러서 정신이 매몰되는 세상에서도 장자의 사상이 홀로 높이 솟은 별처럼 반짝인다.

나는 여기서 목적이 이끄는 삶 Purpose-driven Life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고 주장한 예수의 가르침,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미국의 영성가 릭 워렌의 주장이다.

장자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놓쳤던
자연의 가치, 자유의 가치를 찾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위대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며

그의 사상을 이렇게 접하고 나름대로 풀어서 말하고자 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인생이 짧아서 아등바등 살기에는 아까운 인생이다. 자유의 스승 장자님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보더 더욱 자유가 머무는 내적 공간을 더욱 넓혀야 할 것이다.

  • 다음 출처 이미지 장자 과연 그는 누구인가? 최고의 스토리텔러로 모시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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