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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과 고전 이야기

명길묻41,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인문학적 깊이 읽기

by 코리안랍비 2022.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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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1883]

[여자의 일생] 이 제목만 보아도 눈물을 흘렸다는 어느 여린 사슴가슴을 가진 대학 후배가 있었다. 대학 2학년 시절에 이 책을 쓴 모파상의 이름이 특이하고, 그저 제목에 끌려서 읽기 시작했다.

원제는 [어느 한 일생]이다. 한국에 번역될 때는 [여자의 일생]으로 번역되어, 여자라면 반드시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으로 알려진다. 물론 모파상의 불후의 단편 [목걸이]는 여러 번 읽어서 거의 외울 정도가 되었다.

기 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은 1800년대 후반의 프랑스 자연주의 또는 사실주의 문학의 걸작이다. 톨스토이는 그의 작품을 읽고서 극찬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나는 작품보다 사실 작품의 저자를 먼저 보는 경향이 있다. 기 드 모파상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갖은 질병에 시달리고, 우울증에, 여자에 대한 집착, 그리고 방랑벽도 가지고 있었다. 자살기도도 하였고, 정신병원에 수감된 후에는 43세의 나이게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다. 지독한 염세주의자나 비관주의로 살아온 모파상에게서 이런 위대한 책이 나왔다는 것은 의문이다.

그의 스승은 [보바리 부인]을 쓴 플로베르였다. 그에게 문학수업을 받으면서 여러 단편을 쓰고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서게 된다. 이 책은 모파상의 나이 33살에 쓰여졌으며, 6개월간 2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베스트셀러였다.

소설 [여자의 일생]은 포르노에 가깝다고 출판사들이 배포를 거부할 정도였지만 평론가들로부터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프랑스에서는 아직도 휴양지나 여행을 가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읽을 책 1순위에 있다고 한다. 2004년에서 2012년까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은 380만부나 팔렸다고 한다.

행여나 줄거리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서 잠시 줄거리를 나눈다.

꿈이 많고 순수한 노르망디 귀족의 외동딸 잔느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읽어보면 조선 여인네들의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나름 볼 수 있다. <참고로 노르망디는 모파상의 고향이다.>


수도원 학교를 졸업해서 깊은 신앙심을 가진 잔느는
자유의 몸이 되어 아름다운 저택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평온하고 안정적인 삶이 지속되었고,
그러던 어느날 그녀에게 한 남자가 나타난다.

<소설에서 누군가 한 남자가 등장하면 100이면 100 그리 좋지 않은 인물이다.>

평소 달콤한 사랑을 꿈꿨던 잔느는 훈남 스타일의 귀족 청년 줄리앙에게 끌린다.

“나를 영원히 사랑할 거야?”
“물론이지, 당신을 영원히 사랑해”

이렇게 이 소설의 사랑의 시작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전개된다.

<<“삶에서 유일하게 좋은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랑이다.” 라고 모파상은 말했다.>>

불현듯 다가온 사랑을 운명(destiny)라고 받아들인 잔느는
곧 그 남자와 결혼하고 함께 살게 된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은 그녀의 행복은 산산조각 물거품이 된다.신혼 여행 이후에 갑작스럽게 줄리앙이 돌변한다.

<결혼전과 결혼후에 180도 달라지는 남자들이 있는데, 소설가들은 이러한 반전의 흐름을 이용하여 독자들을 끌고 간다.>

연애할 때와는 달리 완전히 달라진 그는 재산에 욕심을 내고, 방도 따로 쓰게 된다. 신혼이후 급속도로 각방을 쓰는 부부, 급기야 줄리앙의 외모에 빠졌던 잔느는 곧 추악한 그 남자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바로 그는 플레이보이(바람둥이)였다.

잔느는 줄리앙이 자신의 하녀 로잘리와 함께 동침한 사실을 알고 죽음까지 결심하였으나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두 여자의 관계가 한 남자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무너졌다. 그러면서 남편은 지랄맞은 용서를 강요한다.

“인간의 구원은 용서에 있소. 잔느”

결국 줄리앙에게 환멸을 느끼는 잔느, 그 당시에는 이런 여자의 일생을 말도 못하고 살았던 시절. 잔느의 반복적인 환멸은 또 이어진다.
인색하고 무자비한 플레이보이 줄리앙은 이웃집 백작부인과도 부적절한 불륜의 관계를 이어간다. <다시 책을 읽으면서 같은 남자로서 수치심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줄곧 외도를 일삼던 줄리앙은 백작부인의 남편에게 곧 살해를 당한다. 결국 잔느의 곁에는 줄리앙과 사이에 낳은 아들만 남게 된다.

한없이 절망하는 중년 여인 잔느
세월을 비껴가지 못한 주름진 얼굴의 잔느에게 고독한 엄마의 현실이 겹치기만 한다.

“폴, 넌 나의 삶, 꿈, 희망이야”

그러나 세월이 흘러 마지막 희망인 아들 폴(Paul)도 아버지와 같은 바람둥이의 전철(前轍)을 밟는다. 창녀와 도박에 빠져서 학교생활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 <10대 시절에 여자와 도박에 빠진 비행 청소년을 생각해보라. 어머니 잔느의 절망감은 극에 달한다.>

결국 아들의 빚으로 인하여서 뢰베플 저택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아들 폴에게는 엄마가 누군지도 모르는 잔느가 키워야만 하는 딸도 있었다. 아들 폴의 비행(非行)으로 인하여 생긴 손녀딸이다. 그런데 고난의 주름진 얼굴에 잔느 앞에 새로운 생명을 바라보는 특유의 설렘이 스며든다.



이 대목을 보면 [레미제라블]의 노인이 된 장발장에게 ‘아름답고 청순한 딸, 코제트’를 보는 듯한 인상이다. 노인이 된 장발장은 이 코제트를 위해서 남은 생을 다 보낼 작정으로 코제트를 위해서 엄청난 수고와 희생을 치룬다.

사랑은 이상하게 잔인하리만큼 위대하다.

몸도 마음도 지친 그녀에게 하녀 로잘리와 어린 손녀만 남는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묵묵히 살아간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하였던가...
대충 줄거리는 이렇지만 지극히 사실주의적 묘사로 인하여서

소설의 픽션과 사실의 펙트가 합쳐진 [펙션 Faction] 이라고 부르기에도 적합하다.
이 소설은 레미제라블 이후 최고의 프랑스 소설로 손꼽힌다. 이 소설에는 특이하게도 원제 말고 부제(副題)가 달려 있다. 바로 [보잘것 없는 진실]이다. 희생되고 파멸되어가는 잔느의 삶속에서도 알아야 할 죽을 것 같은 진실이 숨어 있다.



이런 운명의 장난 같은 혹독한 시련속에서도 희망의 꽃은 피어난다는 것이다. 잔느는 남편 줄리앙으로부터 사랑을 잃자, 아들에게 희망을 걸었고, 아들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자 그녀의 손녀를 보면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우리의 생이 한없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살만한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 생은 호흡을 하는 한 살만한 가치가 충분하고 넘친다.

책의 마지막에는 그녀의 곁에 남은 하녀 로잘리의 명대사가 있다.

“인생이란, 그렇게 행복한 것도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않답니다”

한국에서의 [여자의 일생]은 1926년 처음 김기진이 번역하였는데 그 당시 일본어판을 그대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잘못된 번역으로 인하여서 지금까지 [여자의 일생]으로 남아 있다. 나는 실수로 제목을 잘못 달았지만 이 제목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

이 소설을 읽는다면 단순한 한 여자의 불행한 삶이 아니라 우리 사회속에서도 겪을 수 있는 스토리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의 인생의 근원적인 진실, 그것도 작지만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될 수 있다.

프랑스 차세대 거장으로 꼽히는 스테판 브리제 영화감독은 이 소설을 영화화 하였다. 전지적 작가의 시점과 달리 주인공 잔느의 시점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그 감독은 인간의 삶이 선형적으로나 순차적인 시간의 직선론적 구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과거로의 회상과 추억, 그리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향수를 담아낸다.

우리도 때로는 과거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한다.
남자의 입장은 잘 모르지만 여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면 그렇다. 청순하고 아름다웠던 소녀의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한다.
소녀의 아름다운 사랑의 꿈을 다시 재현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이 시대 찰나적이고 쾌락적인 삶을 추구하는 상당수 젊은 세대들에게 갇혀 있는 퇴물 소설처럼 되어버렸다.
[시와 소설을 읽지 않는 세대]는 곧 [행복을 위장한 불행한 세대]이다.

표현방식이 과거적이라도 해도 이 소설은 아직도 현재적이다. 우리 삶의 주변에서 충분히 일어나는 일이다.

바람난 남편, 엇나가는 아들, 무너지는 여심, 낙심과 좌절에서도 계속되는 생, 절망속에서도 희망은 어디가나 존재한다.
나는 주름지고 패인 잔느의 얼굴에서 작은 안도감을 찾는 것에서 읽는 독자로서의 안도감을 느낀다. 다시금 꿈과 기대를 걸 만한 작고 예쁜 존재가 그녀의 일생의 끝자락에 붙은 것이다. 불륜으로 낳았던 생명이지만 그 생명을 보면서 자신의 운명이 그렇게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한다.

탈무드에 보면, 신이 이 불평.불만과 환멸 가득한 세상을 심판하지 않고 여전히 새생명인 아기를 보내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아직 이 세상에 ‘희망’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세기에 쓰여진 소설이지만 지금 140년이 흘렀어도 [여자의 일생]은 여전히 사랑받는 소설이다.남자가 [여자의 일생]을 분석하고 나름대로 재구성하고 있는 모습이 나름 우스꽝스럽다. 어떤 기발한 여성 작가가 [남자의 일생]을 써주면 안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어느 비평가가 한 말을 옮겨 놓는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위한 클래식 멜로를 표방한 [여자의 일생]은 그다지 따뜻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은 ‘한 여자의 시련 가득한 일대기’이다. 잔느의 삶이 곧 ‘여자의 일생’이라면 단호히 사양하겠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각자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기만하다.

  • 다음 출처 이미지 - 여자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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