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브루타와 코칭 & 멘토링

하브루타, 룻기 Ruth 1장 1~6절을 중심으로한 거룩한 하브루타

by 코리안랍비 2022. 9. 29.
728x90
반응형
SMALL

룻기 Ruth 1장 1~6절을 중심으로한 거룩한 하브루타

22-01-25 01:24

<바이블 하브루타 시리즈>
  • 룻과 나오미 - 구글출처 이미지



룻기 Ruth 1장 1~6절을 중심으로

“사사기와 사무엘상하라는 딱딱한 조개껍질 속에 있는 진주”


1.룻기 하브루타를 해야 하는 이유

피상적 성경읽기를 넘어서 심층적 성경읽기로의 전환

한국의 많은 설교자들이 룻기에 대한 설교를 하지만 상당히 피상적인 입장에서 전달한다. 룻기는 그저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의 아름다운 시부의 관계로 여기거나 아니면 구약속에 나타난 룻의 효행 정도로만 이해한다. 이런 피상적인 성경읽기는 룻기에 대한 제대로된 이해를 멀리하게 한다. 피상적인 성경읽기가 고착화되고, 피상적인 설교가 고착화되면 어느새 룻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리고 그 해석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룻기를 피상적으로 읽고 이해하는 것은 곧 바다의 표면의 파도만 보는 것이지 그 파도를 움직이는 해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역사는 세속사와 구속사로 나누는데, 세속사가 바다의 파도라면 구속사는 그 바다의 파도를 움직이는 해류가 된다. 해류는 잘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흐름과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성경읽기도 표층적인 성경읽기에서 심층적인 성경읽기를 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이스라엘식 성서/탈무드 이해방법인 ‘하브루타’가 강조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성서와 탈무드의 ‘한 구절을 가지고 리치(rich)하게 생각하고, 토론하고, 다각도로 접근하는 학습방식’을 고집해왔다. 그 고집은 바로 성서나 탈무드를 심층적으로 읽는 - [심층독서]를 말한다. 심층독서는 사실 심층적 사고에서 나온다. 얕고 좁은 사고는 얕고 좁은 결과만을 만드는데, 그 결과가 그리 신통치가 않다. 하지만 심층적 사고는 그 결과와 효과가 대단하게 나타난다. 학습은 반드시 학습효과를 유발해야 한다.

하브루타식 접근은 반드시 ‘왜 why?" 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나아가야 한다. 어찌보면 사고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하브루타식 접근이 맘에 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억지로 ‘하브루타’를 하라고 하면 안된다. 다만 표면적이고 표층적인 사람들에게 잘 어울린다. 성경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은혜와 진리’에 충만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잘 어울린다. 하브루타는 절대 억지로 해서는 안된다. 호기심과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이 생기기 전에는 수용(acceptance)이 안되기 때문이다.

하브루타식으로 룻기를 접근하려면 전체 산을 그리고 나무를 그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룻기에 대한 개요를 익히는 것은 일종의 내 속에 산을 그리는 것과 같다. 룻기에 대한 ‘산’을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산에 들어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다음이다. 이제 ‘나무’를 그려야 하는데, 이외로 한국 사람들이 이 ‘나무’를 그리는 것에 대해서는 방법론적으로 모르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쉽게 생각해보자.

영어원서를 공부한다고 생각해보자.
영어원서를 공부하려면 기본적으로 ‘문법적 이해’가 어느 정도 있어야 하고, 그리고 단어와 숙어에 대한 거의 완벽한 이숙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읽어나가는 법은 의미 단위로 읽어나가는 ‘독해법’이 필요하다.

그런데 영어원서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 소설은 빨리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사상이나 철학이 담긴 책들은 빨리 읽을 수 없다. 그것은 깊은 사고나 배경지식을 크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읽는 방법으로 읽으려고 하면 금새 무너지게 된다. 심층독서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층독서를 하려면 반드시 사전이나 주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주변학문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심지어 코치나 전문가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성서나 탈무드 읽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감사하게도 한글 성경으로 읽는 것만 해도 은혜이다. 하지만 한글 성경의 가지는 언어학적 한계점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많은 난제와 난점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잘못된 해석으로 인하여서 잘못된 방향이나 루트로 가는 경우도 많다. ‘성경이 가라는 곳까지만 가고, 성경이 멈추라는 곳에서 멈출 줄 아는 절제’가 필요하다. 알고보면 우리가 성경연구를 하는 것은 ‘성경의 사람들’처럼 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서를 영어나 다른 언어로 익히려고 한다면 쉽지 않다. 일단 성경사전도 필요하고, 원어사전도 필요하고, 심지어 주석도 필요하다. 이러한 것은 텍스트에 대한 보조로서의 컨텍스트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여기에 방법론적인 접근도 필요하다. ‘생각하는 읽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읽기’는 일단 성서나 탈무드를 대할 때 ‘문자적인 이해’를 먼저 해야 한다. 그리고 ‘정황적인 이해’를 해야 한다. 그리고 ‘신학적인 이해’를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이 성경구절이나 탈무드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현대적인 시사점이나 현대적인 적용점’을 찾아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우리는 성서를 심층적으로 읽어나가는 것이 되지 않는다.

보통의 사람은 그저 ‘풍월’로 성경을 대한다. 표층적인 읽기에만 매여서 성경읽기가 주는 구체적인 ‘유익과 교훈’을 크게 얻지 못한다. ‘성경읽기는 생각의 고통’을 어느 정도 감수하는 마음자세가 절실하다.

‘생각의 고통’은 바로 ‘하브루타’이다. 그 생각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도 ‘하브루타’이다. 한 사람의 성경연구나 읽기가 주는 즐거움과 재미도 크지만, 소그룹의 사람들이 모여서 ‘적극적 성경읽기, 심층적 성경읽기’에 들어가는 것은 필경 ‘풍성함과 유익함’을 크게 더해 준다. 하브루타는 단순히 ‘질문’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일만이 아니라 ‘전인적인 활동’이라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이스라엘에서 공부할 때, 룻기를 한 절을 익히는데도 무려 2-3시간이 걸렸다. 한 절에 담긴 풍성함(richness)은 엄청나다. 예를 들어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는 구절만 잠시 묵상해도 우리는 풍성함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이 ‘묵상’이라는 이름으로, ‘영적 독서’라는 이름으로, ‘말씀의 우물에서 건져올리기’ 라는 이름으로 붙든 ‘풍성함’을 경험할 수 있다.

룻기 읽기를 할 때 전체적인 산인 개요를 이해함과 더불어서
한 절 한 절 배경이해와 분석방법을 통해서 서로의 ‘생각과 사고’를 나눈다면 에너지가 시니지가 되는 효과를 경험한다. 그래서 나는 ‘행간읽기 line by line reading' 강조하고 싶다.

  • 밀레의 이삭줍기 - 룻과 보아스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2. 룻기를 통한 행간읽기의 중요성
룻기를 어떻게 읽느냐?에 앞서서 영국의 계관시인이었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잠시 소개한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본다.
한 송이의 꽃 속에서 우주를 본다.”

우리가 한 줄의 메시지, 한 줄의 시, 한 줄의 명언, 한 줄의 말씀도 허투루 보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니고데모의 렌즈’를 가져야 한다. 요한복음 3장에 유대인의 선생이며, 바리새인이고, 공의원이었던 니고데모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랍비 예수께 찾아와서 여러 가지 질문을 통해서 가장 위대한 말씀을 들은 사람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니고데모의 질문을 통해서 나왔는데, 사실 니고데모는 놀라운 ‘관찰력과 통찰력’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니고데모의 렌즈’를 끼고 성경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성서의 기자(나레이터)가 허투루 쓴 말씀은 없다. 그 이유는 ‘성서의 기록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성서의 기자는 양피지 두루마리에 쓸 때 한자 한자 심혈을 기울여서 기록하였다. 그 기록에 초점을 맞추어서 성서를 보면 우리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그 안에 담겨 있음을 발견한다. ‘밭에 감추인 진주’를 발견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

룻기를 읽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풍성한 ‘하브루타’ 꺼리가 많아서이다. 요즘 우리는 경제적 풍요와 더불어서 사회적 지위와 문화적 안락까지 경험하는 세대에 살고 있다. 그러면서 과도한 경쟁에 시달리면서 자본주의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그리고 교회에는 세속화의 바람에 젖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은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현대의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주운 보리 이삭 하나속에서 천국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삶이 풍성해질까?

룻기는 소소한 우리의 일상사와도 관련이 깊다.
한 줄 한 줄 찬찬히 관찰자의 눈으로, 통찰깊은 눈으로 들여다보면 이 작은 손바닥 같은 에피소드가 역사속에 들어오시는 구속자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만든다. 룻기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드라마틱한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인간 역사 안에 침투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잘 보여주기 위해서 함축되고 절제된 언어와 고도의 수사학적인 표현들이 등장한다. 또한 여러 계시의 말씀도 찾아볼 수 있다. 룻기를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예술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감동과 영감을 준다.

3. 남겨진 나오미
룻기 하브루타를 제대로 해보자.
룻기 읽기를 할 때, 해석학적 도움이나 다양한 관점을 가져야 한다. 먼저 룻기는 문예적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룻기가 문학인지 아닌지는 밝히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스토리가 들어가 있고 성경의 기자는 드라마적인 요소를 넣음으로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드러내고 있다.

성서는 문예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최고의 문학서(시가서)가 될 수 있다. 룻기 1장에 등장하는 인물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등장인물이 누구인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들의 활동내역을 살펴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역사적 방법으로 읽어야 한다.
룻기를 보면 ‘사사시대’라는 것이 드러난다. 사사시대라는 것을 못보고 그냥 읽게 되면 단순 스토리에 매장되게 된다. ‘그저 은혜롭게만’ 룻기를 평가하게 된다. 이런 성경읽기는 ‘수박겉핧기식’ 읽기이다. 그러면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사사시대가 시간적 배경이 된다. 그리고 베들레헴과 모압땅이 장소적 배경으로 나온다. 그리고 또한 그 당대에 기근이 있었다. 그 기간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문법적 방법으로 읽어야 한다.
이 부분은 성경의 구절을 히브리어로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히브리어의 문법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 룻기를 읽어내는데 효과가 있다. 잠시 ‘남겨준 나오미’라는 대목을 한번 살펴보자.

나오미는 남편 엘리멜렉과 더불어서 기근을 피해 모압땅에 가서 우거하였다. 그런데 거기서 엘리멜렉이 죽었고, 그의 두 아들도 나중에는 죽는다. 그래서 성경기자는 말한다.

남편의 죽음과 아들들의 죽음후 ‘남겨진 나오미’ 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녀와 그녀의 두 아들들이 남았으며”
와티사에르 히 우셰네 바네하 (히브리어)

그리고 그들이 모압에 거주한지 10년후에 말론과 기룐 두 아들도 죽는다.
“그 여인은 그녀의 두 아기들과 그녀의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와티사에르 하잇샤 미쉬네 엘라데하 우메이샤흐

여기서 ‘남았더라’라는 동사에 우리는 집중해야 한다. 남겨진 자의 슬픔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남겨진 자의 고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남편과 아들 둘을 잃은 슬픔과 고통, 상실과 공허함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

다음으로 정경적 해석이 있다. 이는 성경에 나온 다른 스토리를 찾아보는 것이다. 흉년과 기근을 피해서 간 사례가 성서에서도 있다. 일단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갔고, 야곱과 그의 가족들도 아들 요셉이 총리로 있는 애굽으로 기근을 피해 갔던 기록이 있다. 이런 부분과 대조하여 살펴보는 것이 바로 ‘정경적 방법’이다.

다음으로 ‘신학적 해석방법’이 있다. 이 부분을 영적인 입장이나 신학적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이 있는데 많은 목회자들이 무리한 해석이나 말도 안되는 ‘뻥’같은 해석을 한다. 사실 그것은 해석도 아니다. 그저 ‘중언부언’이다. 신학적 해석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인데 이것은 ‘성령의 조명’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설교자들이나 연구자들은 성령님께 간구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는 설교나 연구는 사실 ‘영적 지각’을 높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래서 복음에 합당한 성경해석이 늘 절실하다. 다른 부분은 되는데, 이 부분이 정말 되지 않는다면 자칫 성경연구나 설교가 무력해지게 된다.

4. 양식주시는 여호와
그렇다면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왜 베들레헴 지경으로 돌아오려고 했는가?

모압지방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 돌아보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키 샤메아 미스데 모아브
키 파카드 아도나이 에트- 암모 라테르 라헴 라헴

룻은 남겨진 자로서 슬픔과 고통중에 있었지만 희망의 소식을 듣는다. 그런데 룻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마치 영적인 시각이나, 신학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이 시각이 바로 ‘은혜의 시각’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들 둘을 잃은 슬픔이 얼마나 클까? 다른 사람들의 위로는 절대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오미는 이러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이다. 바로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 성서에 나오는 룻의 이미지 다음출처 이미지


5. 룻기 1장의 다양한 해석적 접근
위에서 이러한 해석적 접근에 대해서 논했는데,
우리가 룻기 하브루타를 할 때는 바로 ‘이러한 해석적 접근방법’을 통해서 ‘빅뱅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풍성해지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단 몇 절만 가지고도 우리는 백장 이상의 하브루타를 할 수 있다. 룻기에 등장하는 나오미의 스토리만 가지고도 우리는 다른 수많은 문학서나 신학서, 예술과 문화에 접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통의 문제를 다루면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과 경험함이 이러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위로가 될 수 있는지도 서로 토론할 수 있다.
바로 ‘상호간에 치밀하고 다양한 질문을 유발함’으로써 우리는 룻기 속으로 더욱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은혜로운 감정과 감동은 이러한 하브루타 나눔을 통해서 일어날 수 있다.

6. 룻기 1장 1~6절의 하브루타 소감
마지막으로 룻기 1~6절까지 하브루타에 대한 소감이나 적용점(Application)을 해보아야 한다. 이것은 ‘귀납법적 성경공부’의 일환이기도 하다.]

모압에서 돌아온 나오미와 룻의 모습에서
우리가 연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돌아오는 것/ 히브리어로는 슈브’이다. 바로 회개와 회복을 가르킨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바로 ‘회개와 회복’ 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받은 것을 ‘소감’으로 표현해야 한다.
소감발표라는 것은 우찌무라 간조라는 일본의 저명한 성서학자의 [소감]이라는 책에서 나온 것이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나누기도 하고, 하브루타를 통해서 얻은 풍성함을 서로 나누면서 더욱 우리의 사역과 사명을 극대화하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먼저 개인의 경건을 경험해야 하고, 나아가 공동체의 경건을 경험해야 한다.
오랫동안 선교단체에서 있으면서 배운 것은 바로 나의 영육간에 건강한 모습이 공동체의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되었다.

룻기는 결코 가벼운 성경이 아니다.
룻기는 구속사의 진주와 같은 성경이다.



렛츠 하브루타 !!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