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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여행 이야기

수선화,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by 코리안랍비 2022.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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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선화ㅓ - 크라우드픽 출처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말한다. “외롭다” “외롭다” “외롭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더욱 느끼는 요즈음이다.

사람들은 왜 외로운 것일까? 외로움의 감정은 나쁜 것일까? 외로움의 감정이 있어야 친구나 벗을 사귀는 모티브나 동기가 된다. 친구나 벗은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어떤 ‘자신만의 타고난 개념’을 사람들은 가지고 있다.

외로움의 반대는 무엇일까? ‘더불어나 함께 있음’일까? 그런데 의외로 답은 바로 ‘외로움’이다. 심리학적으로 ‘외로움을 이길려면 외로움에 처해 보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외로움에 처한다’ 라는 것은 ‘혼자 있는 힘’을 기른다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인가 스스로 자신을 고쳐나가고, 자신을 세워나가고, 자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런데 외로움도 ‘스스로 자신을 강화’시키는데 도움이 줄 수 있다. 물론 고독(孤獨. 홀로있음)이라는 단어와는 구별된다. 고독은 다른 사람과 일정 거리를 두면서 자기사색이나 성찰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구별한다’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외로움은 스스로 다른 사람과 ‘구별된다’라는 것보다는 ‘감정적으로 멀어진 것 혹은 소외받고 차별받는다’ 라는 개념이으로 이해해야 한다.

  • 구글 출처 이미지

그런데 누구나 외로움 감정과 더불어 같이 오는 감정이 있다. 그것이 바로 ‘그리움’이다. ‘외롭다’라는 것은 그리움의 감정을 같이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로움은 곧 그리움이다’ 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리움은 사랑'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라고 말했다. 외로움의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건강한 감정’이다. 외로움보다 무서운 것은 ‘허무함이나 공허감’이다. 허무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외로움은 헛되지 않는다. 외로움이 있어서 우리는 철학도 할 수 있고, 시도 쓸 수 있고, 음악도 할 수 있다.외로우면 기도하라. 그리고 외로우면 춤을 추라
  • 외로워서 기도합니다. - 기도하면 외로움은 어느새 내면에서 멀어집니다. - 구글출처 이미지

 



사람들은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한다. 살다보니 느끼는 것은 더불어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개념이 아니다. 사람들은 쇼펜하우어가 말한대로 고슴도치와 같아서 가까이 가면 상처를 받고, 멀어지면 추운 존재들이다.

사람들은 ‘더불어 사는 법’을 잘 모른다. 그래서 더 외로움에 지쳐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외로움이 지나치면 지치게 되고, 지치면 스스로를 이겨나갈 수 없다. 그리하여 넘어지고 상하고 자칫 위험해질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지금 외롭다면 잘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에 대한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공부], [자신의 몸에 대한 공부]를 해 본적이 있는가? 외롭다면 자신에 대한 공부를 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도울 수 있는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질문(質問)을 던져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외롭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인생은 함께 그리고 혼자 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늘은 어떤 여성분의 전화를 받았다.
‘외로움’을 심하는 타는 사람을 어떻게 위로하고 달래야 하는지에 대한 카운슬링을 부탁하였다.그 사람은 최근에 어머니를 잃고 혼자 망연자실 ‘외로움에 자신을 맡긴 50대 중반의 남자’이다. 어떤 사람의 말로도 그의 외로움을 해결해 줄 없다. 해소는 할지 모르지만...아마 시간이 약일 것이다. 세월이 약이 된다면 세월이 스승이 될 수 있다. 스스로의 마음을 강하게 다잡아야 한다. 아직도 우리는 살아온 기적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기적이 있다.

‘산다 live'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동사이며, 그리고 산다는 것은 ‘명령’이다.
그런데 외로움에 지쳐서 자신안에 갇혀 버리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제는 눈을 밖으로 떠야 하지만 눈을 안으로 뜨는 연습을 해야 한다. 외로움이 고독과는 다르지만, 고독해지는 연습을 통해서 스스로의 내면을 단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책과 음악과 시와 노래와 여행을 통해 자신을 ‘단련’해 나가고, 그리고 자신을 ‘달래는 것’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필요하다. 여기에는 1-2%의 용기만 있으면 된다. 외로울 수 있다면 몇% 용기도 있다.

외로움은 허무함과는 달리 긍정적으로 말해서 살아갈 힘을 도리어 길러주는 감정이라고 보아도 좋다. 허무함이 살아갈 힘을 뺏어가는 것이라면 외로움은 자기극복의 삶의 태도를 주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그래서 울지 마라. 슬퍼하지 마라. 외로우니까 우리는 외로움 사람끼리 가슴을 부비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고, 소중한 것들이 아직도 있다. 다들 외롭고 쓸쓸한 감정을 다 그 속에 두고 산다.


[정호승]의 시 수선화에게가 떠오른다.

그 시를 잠시 여기에 올려본다.


정호승의 ‘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시선집 『수선화에게』 비채


수선화, 하면 추사 김정희가 연상된다. 수선화를 맨 처음 봤던 곳이 제주의 ‘추사관’ 뒤뜰에 있는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였기 때문이다. 손님에게 목례라도 하는 듯이 고개를 살짝 숙인 수선화에 한참 눈길이 머물렀다. 초록 잎사귀는 부추 같기도 하고 마늘종 같기도 했다. 배가 고팠던지 여섯 장의 흰 꽃잎 위에 얹힌 연노랑 속꽃이 달걀프라이로 보였다. 추사체로 상징되는 그가 수선화를 유달리 아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제주도에 유배되어 위리안치의 형벌을 받아 9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할 때 수선화는 존재 그 자체로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수선화가 있어서 그는 오랜 동안의 제주도의 유배생활을 견디어 내었을 것이다. 한 떨기의 수선화 속에서 아내와 자식들 얼굴이 비춰졌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임금님의 얼굴도 겹치는 날도 있었으리라.

수선화는 왜 수선(水仙)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수선은 중국에서 사용하였는데, 하늘에는 천선(天仙)이 있고, 땅에는 지선(地仙)이 있고, 물에는 수선(水仙)이 있었다고 한다. 수선화는 그리하여 신선의 자태가 느껴지는 꽃이다. 그리하여 제주도에 지천으로 있던 수선화를 보고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수선화(水仙花)

추사 김정희

날씨는 차가워도 꽃봉오리 둥글둥글
그윽하고 담백한 기풍 참으로 빼어나다.
매화나무 고고하지만 뜰 벗어나지 못하는데
맑은 물에 핀 너 해탈한 신선을 보는구나.

나중에 추사 김정희 선생은 강진에 유배중이었던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수선화'를 선물로 보내기도 한다. 그 둘은 의형의제하는 사이였고, 서로 인문지기였으니 외로움 학자들끼리 교우하는 즐거움을 '수선화'로 나눈 것이다.

수선화도 아마 외로웠을 것이다. 수선화도 혼자 피고 혼자 진다. 우리 사람들은 식물이나 동물의 외로움을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꽃이 시든 다음에 비로소 꽃의 외로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반려견이 죽은 다음에 비로소 그 반려건의 외로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당진에 갔을 때이다. 그곳에 어떤 전원생활을 하는 서울분을 만났다. 그 전원주택 주변에는 온통 ‘수선화밭’이었다. 그런데 그 분에게 물어 보았다. “왜 이리 수선화에만 심으셨습니까?” 그분의 대답이 걸작이다. “외로울 때 가장 좋은 친구가 수선화입니다.” 그는 수선화를 정말 정성과 사랑을 다해서 가꾸고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면서 전혀 ‘외로움이 없어 보이는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아마도 그의 외로움을 수선화에게 전가했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최소한 수선화에게 ‘감정이입’을 했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 자신도 ‘전원생활’을 한다면 ‘수선화 꽃밭’을 조성하고 싶다. 그리고 외로운 사람들을 초대하여 ‘고기파티’도 하고 ‘시낭송’도 하고, 그리고 서로 지적인 유희를 즐기고 싶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필요한 존재가 ‘친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는 제 2의 가족이며, 두 개의 영혼을 가진 하나의 존재이다.”라고 하였다.

각자마다 외로움의 감정의 정도는 다를 것이다.
외로움이 심하다면 아직 ‘생명력’이 꿈틀리고 있는 것이다. 외로움은 슬픈 것이 아니다. 외로움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수선화 꽃과 같은 것이다.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 사랑과 고결, 신비와 자존심 그리고 내면의 외로움]을 의미한다. 원어명은 나르키소스(Narkissos)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는 용모가 매우 뛰어난 미소년으로 성장, 많은 이성과 동성의 구애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많은 사랑을 거절했다. 그 중 나르키소스에서 거절당한 이가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에게 나르키소스도 똑같이 사랑의 고통을 겪게 해달라고 했다. 이를 복수의 여신이 들어줬다.
결국 사냥을 하던 나르키소스는 목이 말라 샘에 갔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빠져 움직이지도 않고 샘만 들여보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가 죽은 자리에서 꽃이 피었는데 그 꽃이 나르키소스의 이름을 따 나르시소스(수선화)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이는 결국 '자기애'를 나타내는 나르시시즘에서 유래된 것이다.

겨울은 ‘고독의 시즌이고 외로움의 시즌’이다 "수선화 꽃말은 1월에 참 어울리는 꽃이다. 그러나 수선화에게 우리는 우리의 외로움을 같이 나누는 여유가 있어야 하겠다.



시의 본질은 은유다. ‘수선화에게’ 이 시의 제목은 모두가 수신자(받는 사람)이다. 수선화에다 빗대어서 우리에게 전하는 은유적 메시지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며 토닥 토닥 우리를 다독인다.

너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란 말이 있다. 마음보(심보)가 고약해서가 아니라 남들도 나처럼 힘들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다소 위안이 되기 때문일 게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에 이르면 다함께 행동하기를 요청하는 청유형(부탁형)으로 들린다.~마라, ~가라, 등의 어조는 당당하게 살아보라고 세뇌시키는 느낌이다. 하느님도, 새들도, 너도, 산 그림자와 종소리까지 외롭지 않은 대상이 없다. 그러니까 너무 그리 약하게 굴지 말고 ‘외로움’도 충분히 받아들이면서 한번 견뎌보자는 주문처럼 읽힌다. 견디면 그만이다.

잘 견디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괜찮은 사람이다.
다들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가자. 지나친 외로움이 아닌 그냥 사람을 성장시키는 외로움이라면 언제라도 수용하여 살아가자.

정호승 시인도 말한다.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정호승 시인은 나의 아동문학가인 이모님의 동기동창이시다.
이런 분이 한국땅에 있다는 것은 마치 넓은 사막에 '수선화를 수 놓은 듯한 ' 기쁨 있다. 감사하다. 시가 진정 외로운 영혼에게 감동을 준다.

 
  • 아산의 신정호수에서 찍은 사진 - 홀로 걷는 나그네의 여정을 담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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