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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길묻 24,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행복관

by 코리안랍비 202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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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리스토텔레스 - 니코마코스 윤리학 - 행복관에 대한 최고의 명저 표지
    구글출처 이미지 - 창 출판사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행복관과
진정한 행복자 되기에 관하여


살면서 2-3번이 아닌 2-30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 여러 권 있다. 나에게는 헨리 데이빗 소로의 [월든]과 레프 톨스토이의 [인생독본], 아우구스투스의 [고백록] 그리고 다른 하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성호 이익 선생은 일찍이 제자들에게, “어머니가 잃어버린 자식을 찾듯이 책을 읽어라” 라는 언명을 주었다. 고전읽기를 강조한 말인데, 갈급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책을 읽으라고 하니, 나 자신도 무엇인가 나에게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읽어야 할 책무나 의무를 느끼게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베르나르드 베르나르는 말하기를,

“우리는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탄 난쟁이들이다.
이로써 우리는 그들보다 더 멀리 볼 수 있지만,
이는 우리의 시각이 예리하다거나
우리 키가 더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공중에 끌어 올려 그들의 거대한 키 만큼
높여 주었기 때문이다. ” 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과학자 뉴톤의 말과 비슷하다. 자신을 낮추어 나는 겨우 [거인의 어깨에 올라 탄 사람]이다 라는 것이다. 고전을 읽으면 그 만큼 겸허해지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고, 사람이 고전을 많이 접하면 겸허해진다. 또한 옛것을 거울삼아 새로운 창조와 변화를 이끌어내는 온고지신과 법고창신의 자세와 꿈을 가져야 함을 본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야에서 틈나는대로 동서양의 고전을 탐독하기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아울러 현대 과학과 지식을 조화롭게 구성하여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실현하기에 애써야 한다.

몇 해 전에 미국의 시카고 트리분 신문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자주 인용되는 10대 인물을 거론하고 그들의 책들을 소개하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단 1명의 여성이 나오지를 않는다. 그만큼 고전이나 문학 그리고 철학을 남자들이 지배한 것이다.
앞으로 여성들에 관한 책들도 많이 읽고 접해야 한다.

거기를 보면 1번이 마르크스이다. 마르크스는 유대인으로서 전 세계를 양분한 인물이다. 그가 만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지금도 러시아와 중국을 통해서 구현되고 있다. 다음으로 레닌이다. 3번째로는 ‘세익스피어’이고 4번째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5번째는 성경 바이블이다. 6번째는 플라톤이며, 7번째는 유대인 심리학자인 프로이트이고 8번째는 살아있는 지식의 전설이며 보고인 ‘노암 촘스키’이다. 9번째는 관념철학자 헤겔이다. 철학은 헤겔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것이 좋다. 마지막으로는 ‘키케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 플라톤보다 상위에 있다. 놀라운 통계이다.

유럽에서는 플라톤이 단연 독보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한국에서는 다른 통계가 나올 것이다. 일단 이런 분들의 저작을 거의 읽지 않기 때문에, ‘읽어야 할 동양서들이 많아서 그럴 것이다’ 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


오늘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해서 잠시 논하고 싶다.
그것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에 대해서 논하고 싶다.
물론 이 책은 아들 니코마코스가 아버지의 강의록을 정리한 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버지의 이름대신 자신의 이름을 넣었다. 아마 아버지가 세운 학교인 [리케이온]의 학생들에게 강의교재로 삼아서 할 요량으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 천병희 교수의 번역 - 니코마코스 윤리학 - 최고의 번역책으로 평가
    네이버 출처 이미지



이 대목에서 이상한 점이 하나가 있다.
왜 플라톤은 자신의 가장 수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신의 학교인 [아카데미아]를 물려 주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이나 사상의 방향의 달라서 그렇다고 보여진다. 그 증거로 라파엘로로의 [아테네 학당]을 보면 플라톤은 손가락이 하늘로 올라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래로 향한다. 하나는 형이상학을 하나는 형이하학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러니한 것은[형이상학]이라는 책을 쓴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만큼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담은 것이다. 플라톤은 자신의 아들에게 학교를 물려준다.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리케이온을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자신의 윤리학 ETHICS을 물려 준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물려주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행복]이다. 행복은 물려줄 수 있는 DNA나 유전자가 아니다. 행복은 도리어 지식처럼 [축적]되는 개념이라고 보아야 한다. 자세히보면 행복도 농사와 비슷하다는 것을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증명해준다.

요새 행복(Wellbeing, Happiness)이라는 것이 이제는 식상한 주제처럼 되었지만 그래도 영원한 인생의 목적은 아직도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을 통해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지켜야 하는 도리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라며 포문을 연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곧 윤리철학적인 주제이다. 즉 옳고 그리고 좋고 나쁨을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것이 바로 인간다운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윤리와 정의가 제대로 배양된 사람이 인간다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절제하고 자제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였다. 절제하고 자제하는 삶이라는 것은 욕심과 방종으로 흐르지 않는 삶이다. 사람은 스피노자가 말한대로 ‘욕망 그 자체’이다. 그래서 절제하고 자제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이성의 제어를 할 정도로 자신을 지켜나갈 [수신능력]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다.

또한 큰 주제로 행복한 삶이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여기에 나름대로 행복에 대하여 자신이 나름대로 알고리즘을 만들고, 평가하고, 피드백을 하는 귀납법적 접근을 하고 있다. 이것은 행복도 생각하는 능력 - 사색능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코넬리우트 갈릿은 “교육은 생각하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지, 생각한 것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라고 하였다. 행복한 교육은 바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데 있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나는 사색에서 행복을 찾는다. 그래서 사색자가 되는데서 행복자의 길이 있다고 어느 정도 믿는다.

세계 최초로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이라고 정의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행복은 그 내용이 무엇이며, 그리고 그 목적에 다다르는 방법이 무엇인지 탐구해 나가는 것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핵심이며 행복론이다.

가끔 차를 타고서 돌아다니다보면 ‘모든 행복은 하나님께로부터’ 라는 교회광고구절을 본 적이 있다. 크리스찬이지만 그러한 대목을 만나면 ‘난감하다’ 행복을 너무 쉽게 규정하고 있다는 것에서 도리어 교회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된다. 제발 이런 식의 근본주의적 발상은 그쳐야 한다. ‘교회를 다니면 무조건 행복해진다’ 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은 행복을 너무 쉽게 규정하는 것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행복하다면 좋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행복과 불행은 평등하게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행복은 사실 탐구하는데 있다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 것이다. 행복도 노력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책에서 보면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기능인 이성(로고스)을 잘 발휘하여 욕구와 감정을 잘 조절하고, 중용의 실천을 통해 ‘품성적인 덕 Arete'에 이를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선(The good)이며 삶의 목표인 행복이기 때문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에 나온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다. 나는 [고전학자나 클라시쿠스]는 아니다. 다만 고전연구가 우리 시대에 주는 시사점이 너무나 크고 광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도 [지식인]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 행복해져라 캘리그라피 - 다음 출처 이미지

 


#Aristoteles의 행복관 정리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행복관의 주요 골자를 책을 읽어가면서 정리한 내용이다. 물론 친절한 해설을 달아 줄 것이다.

1. 모든 기술과 탐구 그리고 모든 행동과 추구는 어떤 ‘선’을 목적으로 삼는다. 여기서 목적이라는 것은 행복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예컨대, 의학의 목적은 건강의 추구이며,경제학의 목적은 부의 추구이며, 손자병법을 만든 것은 전쟁승리의 목적이다.

2. 모든 지식과 모든 추구가 어떤 선을 목적으로 삼으며 모든 선 가운데서 최고의 선은 행복인데, 일반 사람들은 ‘잘 살고 잘 처세하는 것’을 행복으로 삼는다. 일반 사람들은 각자의 행복을 쾌락이나 부나 명예의 추구처럼 명확한 것 같지만 행복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아플 때는 건강을 행복이라 하고, 가난할 때는 부유한 것을 행복이라 하고, 때마다 행복은 저울질을 당한다. 이것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의 위장된 형태이다.

3. 생활형태에는 향락적 생활, 정치적 생활, 관조적 생활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이나 행복을 쾌락과 동일시여기면서 향락적 생활을 좋아한다. 교양 있고 실천적인 사람은 명예와 정치적 생활이 목적이기 때문에 명예를 선 또는 행복으로본다. 관조의 생활은 사람이 덕을 소유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어진 삶을 펼치지 않고 미온적인 삶의 자세로 일관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관조적인 생활도 행복의 지속성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4. 돈벌이 생활은 부득이해서 하는 생활이고, 부는 우리가 구하는 선이 아니라 단지 수단일 뿐이다. 친구와 진리는 다 같이 소중하지만 친구보다 진리를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경건한 삶의 태도이기 때문에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아주 가까운 친구와도 단절할 수 있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현대인들에게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그리스인들에게는 돈보다는 진리에 대한 추구가 강한 모양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돈을 수단으로 보았지만,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돈이 너무 없어도 불행감이 높다는 것은 안 가르쳐주어도 아는 것이다.


5. 선이라는 것은 실체에 대해서도 성질에 대해서도 관계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실체는 본성상 관계보다 앞서는 것이므로 모든 선에 공통되는 이데아는 있을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물에 저마다 이데아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플라톤이 말하는 ‘선의 이데아’와 같은 보편적 선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6. 우리가 구하는 선은 여러 행동이나 기술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분명히 선이란 다른 모든 것이 그 자체 때문에 행해지는 그런 것이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로 보면 아픈 사람이 건강을 회복하는 것, 전쟁에 나아가서 병법이나 전략으로 승리하는 것, 건축에 있어서 집과 잘 짓는 것이 선이다. 모든 행동과 모든 추구의 목적이 선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의 목적이 있다고 하면 이 것이 곧 행동하여 달성해야 할 선이라는 것이다. 선은 이론이나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은 행해야져야 달성이 되는 목표요 목적인 것이다.

7. 분명히 목적은 하나 이상 있고 이 목적들 중에서 어떤 것은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선정되므로 모든 목적이 다같이 궁극적인 목적이아닌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선은 확실히 궁극적 목적이다. 우리는 언제나 행복을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할 뿐이고, 결코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선택하는 법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은 행복은 그 자체로 궁극적 목적이지, 행복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선택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행복의 순수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행복할까? 남의 귀중한 물건을 도둑질 하는 사람은 행복할까? 거짓말이 성공하고, 도둑질이 성공하면 행복할까? 여기서 문제는 바로 선이 아닌 악을 행하여 행복을 쟁취하겠다는 것이므로 이는 궁극적인 목적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희랍인들은 죄를 ‘하마르티아’라고 하였다. 이는 화살이 과녁을 향하여 가야 하는데 그 과녁을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신학을 공부하다가 이 말을 이해를 못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책을 보면서 깨우친 것이다.

8. 행복은 어떤 상태나 소유가 아니라 영혼의 고귀한 활동이다. 에릭 프롬은 자신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상태나 소유가 잠시의 행복과 위안을 주는 것이지만 ‘지속적 행복이나 만족’에는 거리가 멀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사람들의 대다수는 소유에서 행복을 구하려는 노력을 존재변화보다 스스로에게 더 강요하고 있다. 로또 복권을 사서[일확천금]을 노리는 것도 지나친 소유욕과 관련이 깊다. 그런데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참한 인생의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존재의 변화]에 더 기울어져야 한다.

9. 행복은 그 자체만으로 생활을 바람직하게 하고 더 부족함이 없는 자족적인 것이요 최고선이요 궁극적인 목적이다.

10. 유덕한 행위는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고, 동시에 선하고 고귀하기 때문에 행복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좋고 가장 고귀하고 가장 즐거운 것이다. 유덕자는 덕이 있는 사람을 말하며, 유덕의 추구가 고귀하고 가치있는 행위이기에 떳떳한 행복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유덕한 삶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복지(objective welfare)와 주관적인 좋은 삶(subjective well-being)이다. 동양에서는 ‘인화와 덕성’을 강조한다. 다른 이들과 잘 지내고, 다른 이들에게 덕을 끼치는 일이야말로 자신에게 ‘복으로 돌아오는 선한 일’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행복의 3요소는 바로 덕, 객관적 복지, 주관적인 좋은 삶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1. 행복은 한가함(여유)에 의존한다. 쉽게 말하면 레저와 스포츠가 들어간 레포츠의 개념이나 안식과 쉼의 개념이다. 우리가 바쁘게 일하는 것은 한가함을 얻기 위함이고 전쟁을 하는 것은 평화속에 살기 위함이다. 우리는 많은 일을 한후에 쉼의 가치를 알게 되고, 다툼과 갈등속에서도 평화를 얻고 싶어한다.

12. 인간의 고유한 이성의 활동은 관조적 활동이고, 자족성, 한가성, 쾌락성 및 비실증성을 갖는 관조적인 활동이 곧 완전한 행복이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eudaimon 에우다이몬)은 전 생애에 걸처 계속해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에서 밝힌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3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언제나 행복한 사람, 언제나 불행한 사람, 보통사람(행복의 씨앗이 떨어질 땐 행복하고, 불행의 씨앗이 떨어질 땐 불행한 사람)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속에 담긴 행복은 감정의 노예가 되어 이성의 명령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며, 의지의 나약을 통해서 이성의 명령을 위반할 경우 인간은 결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지성(이성) 감정, 의지가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영혼의 탁월한 상태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예전에 손문(쑨원)이 행복의 3대 기초를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설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이는 아레테(덕)에 기반한 행복은 아니지만, 신체의 안위나 건강도 행복의 요소임을 밝힌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행복의 주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불교나 카톨릭적인 사상에 의하면 마음먹기에 따라서 천국도 만들고 지옥도 만들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렵게 말을 했지만 “행복은 결국 생각하고, 사색하고, 선택하는 인간적 활동에 전형적으로 따르는 인간의 특권이고 능력이다” 라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인간만이 성취할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인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야 한다. ‘행복해져라’ 라고 주문하면 어느새 행복해진다고 한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주문하면 어느새 행복해진다.

수많은 [행복에 관한 책]을 읽어보고서 내린 결론이 있다.
나는 이를 [행복 평등성의 원리]라고 부른다.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학에서도 행복을 강조한다. 그 행복이라는 것은 ‘욕망이라는 분모를 최대한 줄이면 절제하는데 있다’ 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복은 절대행복이나 절대만족이 아니라 상대적인 행복이나 상대적인 만족에 머물러야 한다.

어느 누구나 절대적인 행복은 존재하지 않으며 절대적인 불행도 존재하지 않는다. 평등하게도 어느 누구나 행복의 씨앗과 불행의 씨앗은 떨어진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뷰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남자나 여자나, 권력을 가진 자나 못가진 자나, 직장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누구에게도 행복의 씨앗과 불행의 씨앗은 떨어진다. 우리의 생각은 마치 그러한 씨앗을 받아들이는 밭과 같다. 그 밭을 기름지게 만드는 것도 나요, 엉망으로 만드는 것도 나다.


랍비 힐렐은 ‘나를 잘 아는 이도 나요, 나를 잘 가르칠 이도 나다.’라고 하였다. 행복은 내 속에서 구하는 것이지 외부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속의 변화가 곧 행복의 길이지 소유의 많고 적음이 행복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어 보고자 했으나 정작 자신을 바꾸려는 생각이나 노력이 부족하여 좌절하는 것이다.

 

 


고전읽기가 행복감을 많이 준다. 작은 선행이 행복감을 준다. 다른 이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도 행복감을 준다. 아침에 일어나 모닝 커피를 마시고, 클라식 음악을 듣고, 새들의 합창소리를 듣는 것도 행복감을 준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반갑게 손흔들어주고, 웃음짓는 것도 행복감을 준다. 자고 있는 아내의 얼굴, 남편의 얼굴만 1-2분만 들여다 보아도 행복감을 준다. 행복은 어디에나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못보고 못느끼는 무관심과 무지가 문제이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얼마든지 있다. 행복의 반대는 불행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나태주 시인의 시가 어느 정도 행복에 답해 줄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행복주문을 하면서 하루 하루 기분좋고 행복하게 보내기를 바란다. 공리주의자 밴덤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보다 ‘최대 다수의 최소 불행’을 나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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