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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동식물의 문학사 & 탐험사&세계사

동식물의 세계사21, 뒤로 물러서지 않는 뱀의 세계사

by 코리안랍비 2022.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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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물러서지 않는 뱀의 세계사

사람들이 제일 혐오하는 동물중에 아마도 1위는 ‘뱀’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상당수 뱀들이 독이 있고, 물리면 죽는 경우도 많아서 위험한 동물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일단 사행보행(기어다니는 것)을 하는 뱀의 움직임도 흉측하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일단 뱀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긴장이 앞선다.

유선형의 날렵한 머리, 먹잇감을 찾는 듯 쉼없이 날름거리는 혀(야콥슨 기관), 꼿꼿이 치켜든 목, 자유자재로 꿈틀거리며 방향을 바꾸는 몸통, 소리없이 움직이는 뱀의 모습은 사람들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원초적인 공포심을 자극하는 듯하다.(뱀탐지이론 중(中)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뱀은 우리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또한 인간과 함께 유구한 역사를 함께 해 오면서 때로는 두려운 존재로, 때로는 다산을 약속하는 풍요의 이미지로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되어 왔다. 이러한 뱀의 이중적(二重的)인 이미지는 고대 신화와 설화 속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어 사람을 죽이는 치명적인 독성을 지닌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다산성과 가복(家福)의 화신이기도 하였다.

동양에서는 12지간에 들어가는 동물이지만 이상하게도 뱀에 대한 혐오가 대단한 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혐오는 비교적 현대에 와서 생긴 일이고, 사실 뱀은 아주 신성하고 영험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뱀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우리가 뱀을 무서워하는 것보다 뱀이 인간은 무척이나 무서워한다고 한다. 모든동물들의 최대 천적은 인간이다. 뱀이 등장하는 다큐멘타리나 영화를 보면 흉측하지만 그래도 뱀구경이 제일 재미있는 구경거리중에 하나이다. 동물의 왕국은 사실 뱀이 나오면 즐겨보는 프로그램중에 하나이다.

칼 융의 [집단심리학] 강의를 잠시 들은 적 있는데, 사람들이 뱀을 싫어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창조시 뱀에게 당한 집단 기억’이 이어져서 그렇다는 논리를 들은 적 있다. 일종의 무의식속에서 뱀에 대한 집단적 히스테리가 많다는 것이다. 칼 융은 아마도 기독교적 심리학자다보니,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은 것에서부터 저주가 생겨, 뱀은 땅에 기어다니고, 사람들은 노동하고 자녀를 낳는 수고를 하게 되었다는 것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뱀에 대한 세계사는 긍정적인 입장과 부정적인 입장 이라는 두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실 나도 뱀을 제일 싫어하고, 한편으로 무서워한다. 일단 기어다니는 것들에 대해서는 심리학적 이상으로 묘한 자극을 받는다.

요즘 뱀구경하기 힘든데, 이 지면을 통해서 실컷 뱀구경을 하시기를 바란다. 뱀에 대한 종류나 생물학적인 특징도 다루지만 뱀의 여러 가지 신화적 입장, 종교적 입장, 문화적 입장을 더 살펴볼 것이다.


뱀에 대해서는 정말 하기 싫은데 그래도 꾹 참고 글을 준비해본다.


<뱀과 관련된 신화와 문학이야기>
문학은 바로 현대인의 신화다. 신화나 문학 속에 등장하는 뱀은 혐오스러우면서 동시에 매혹적이다. 뱀은 탈피를 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이 탈피하는 동물인 뱀은 신화에서는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였다. 우르크의 길가메시 서사시를 보면 뱀이 등장한다. 뱀이 자신의 허물을 벗고 새롭게 매끈한 몸으로 나오는 것은 부활과 재생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죽는 생물이 아니라 불사조처럼 계속 자라나고 커지는 생물로 여겨지기에 장수나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정착하고 농경하는 사회의 경우 뱀을 긍정적으로 보거나 숭배하는 문화가 많으며, 반대로 유목 생활을 하는 건조지대나 사막 지역의 경우 부정적인 동물로 터부하며 악신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의 왕관에는 뱀이 머리를 치켜든 상징이 새겨져있다. 뱀의 모양은 그림, 조각, 부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북유럽 신화의 ‘요르문간드’ 같은 경우에는 아예 온 세상을 감싸는 세계를 상징하는 신적인 존재이다. 인도 신화의 ‘나가’도 악역으로 나타날 때가 있지만 풍요와 생사를 관장하며 세계를 창조한 젖(우유)의 바다에서 활약하는 위대한 존재이다.

불교와 힌두교에서도 뱀은 중요한 존재였다.

뱀에 대한 숭배의식의 극치를 바로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이다. 앙코르와트의 사원을 지키는 존재가 바로 Naga 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뱀신’이다. 앙코르 왕조는 11세기 중엽 도성 좌우에 거대한 바라이(인공저수지)를 축조해 물 걱정을 해결했는데, 모든 것이 ‘나가’의 덕분이라고 생각해 거대한 앙코르와트 사원을 건립하면서 나가 조각을 입구에 세웠다. 앙코르란 말 자체도 산스크리트어로 ‘도시’를 뜻하는 ‘나가라 Nagara'에서 나온 것으로 뱀을 뜻하는 ‘나가’와 ‘산다’란 의미의 ‘라’가 합쳐진 말이다.

이스라엘 인들은 뱀을 ‘악의 화신’으로 여겼다. 기독교 이전의 그리스 로마 시대에서는 놋뱀이나 헤르메스의 지팡이등 치유의 상징인 동시에 메두사나 히드라 등의 괴물처럼 사악한 존재이기도 하였다. 수메르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신인 엔키를 상징하는 동물이 뱀이다. 참고로 엔키는 일종의 대적자 역할을 맡고 있는데 그래서 그 이후 거기에 영향을 받은 여러 신화에서 최고 신의 대적자는 주로 뱀으로 나오곤한다. 수메르 신화의 ‘닌기쉬지다’ 라는 치유의 신도 있다. 이 신의 이름은 수메르어로 ‘훌륭한 나무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의 어깨 위에는 뿔 달린 두 뱀이 얽혀 있다. 이것은 하나의 문양이 되었다.

오늘날 이 문양을 파르마콘(Pharmakon)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군대 의무병과으 상징이 되었다. 약국의 문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
파르마콘 모양은 이중나선형 모양이다. 이는 불교의 법륜이나 오늘날 뫼비우스 띠 등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서양권에서는 성경속에서 선악과를 따먹게 하여 아담과 이브를 타락하게 하는 뱀의 모습을 한 사탄이었으며 이 때문에 뱀은 저주를 받아 땅에 기어다니게 된다. 그래서 종신토록 기어다니며 땅의 흙과 먼지를 먹고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성경에서 나오는 뱀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나하쉬’라고 하는데, 이는 ‘간교하다’라는 의미이다.

반대로 마태복음 10장 16절의 경우, 뱀을 지혜의 상징으로 쓰기도 하고,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말하기도 한다. 뱀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동물이다. 그래서 후퇴하지 않는 특성이 있고 지혜롭게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는 동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중국 신화에서는 자신들의 인류의 시조로 치는 복희와 여와가 뱀의 형상을 하고 있다. 정확히는 반신반사의 모습으로 표현되어진다. 한국신화는 곰이 조상으로 나오지만, 중국신화는 뱀이 조상으로 나온다. 아무래도 건국신화도 한국이 더 나은 것 같다.



<예수께서도 뱀이었다.?>
모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자 불뱀(사막뱀)이 와서 많은 이들을 물었다. 그런데 모세가 놋뱀(구리뱀)을 만든다. 이 뱀을 보는 자는 살고, 이 뱀을 안보는 자는 죽는 일이 생겼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고 싶은가? 아니다 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놋뱀을 본 사람마다 살아난 것이다. 그 뱀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느후스단’이고 나중에는 세계보건기구나 의학학회의 상징이 되었다. 세계보건기구 WHO를 보면 뱀의 모습을 한 놋기둥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성서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달린다고 한다. 이 예수를 보는 자는 살고, 보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예수께서도 구원하는 뱀?이었다고 말했다. 신학과 성서학도 잠시 공부한 나로서는 그 말이 너무 징그럽게 느껴진다.

물론 그리스 신화에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적인 동물이 바로 뱀이다. 의과 대학생들이 의사가 될 때 하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라는 것이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며, 그는 평생 자신의 스승을 ‘아스클레피오스’라고 생각하였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했다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라는 대목이 있다. 한편 아스클레피오스의 아버지는 ‘아폴론’이다.

의료관련단체를 보면 바로 엠블런스에는 뱀이 감겨진 지팡이가 나온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놋뱀이나 그리스 신화의 아스클레피오스의 이야기나 서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지팡에서는 두 마리가 그 지팡이를 감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바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서로 결합된 모습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뱀을 곧 사탄이라고 여기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뱀은 그저 생물의 하나일 뿐이다. 상징성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



<뱀과 가까웠던 역사인물들>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조에 보면 혁서세가 죽은지 7일만에 유체(遺體)가 흩어져 땅에 떨어져서 사람들이 합장을 하고자 하니 큰 뱀이 쫓아와 방해해서 결국은 흩어진 시체를 각기 장사지내고 오릉(五陵)또는 사릉(蛇陵)이라고 했다고 한다.
담엄사 북릉이 바로 이 능이다.

김 수로왕의 이야기에서는 도적으로부터 무덤을 지키는 뱀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묘에 금과 옥이 많다는 소문이 돌아 도굴꾼들이 많았는데, 약 30척(10미터)이 넘는 뱀이 사당앞에서 눈을 번뜩이며 8-9명의 사람을 물어 죽였다고 한다. 그래서 뱀이 묘를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신라 48대 경문왕 때에는 왕의 침전에 저녁마다 무수한 뱀이 모여들어 궁인들이 놀라 쫓으려 하나, 왕은 뱀이 없으면 편안히 잠을 잘 수가 없으니 쫒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후 백제의 견훤은 구렁이와 처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렇듯 뱀은 죽은 사람의 수호자이며 수호신의 이미지이다.


<뱀먹기 - 공수부대의 훈련중 하나>

예전 공수부대에서 생존훈련법으로 뱀을 먹는 법을 가르친 바가 있다. 오래전일인데 뱀이 많이 나오는 뱀동굴에서 각 조로 나누어서 뱀을 한 마리씩 잡는 것이었다. 그 잡은 뱀을 밖으로 가져나오면 각 조원당 한 덩어리를 잘라서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이다. 그런데 그 덩어리가 입으로 들어가면 계속 꿈틀거린다. 그것이 목으로 넘어가면 뱃속에서도 여전히 꿈틀거리는 기분이 든다.

원래 뱀에는 기생충도 많은데 이러한 뱀을 먹는 것 자체가 무슨 훈련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뱀을 먹느니 차라리 굶어 죽는 것을 선택하겠다.


<나무꾼을 살린 꿩이야기 - 강원도 상원사>
어느 나무꾼이 두 마리의 꿩이 뱀에게 잡혀 먹히려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뱀을 죽여버리고 살려주었다. 그날 밤 산 속의 어느 집에서 젊은 여인을 만나 대접을 받으며 자게 되었다.

한밤중에 눈을 떠보니 큰 뱀이 자기의 몸을 친친 감고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여인은 뱀의 화신으로 죽은 남편 뱀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었다. 그 때 어디선지 종소리가 울려왔고 뱀은 도망을 가버렸다.

이튿날 종소리가 난 곳을 찾아가 보니 퇴락한 종루에 꿩 두 마리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것이 오늘날의 상원사이다.<한국민속대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뱀은 왜 다리가 없을까?>
뱀은 파충류인데도 불구하고 육상 척추 동물이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는 다리를 완전히 잃어버린 동물이다. 그런데 약 1억 5천만년전 뱀의 조상에는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비단뱀이나 보아뱀은 몸 속에 작은 다리뼈가 남아 있다고 한다. 비단뱀은 태어나기전 배아 발달과정에서는 다리가 자라기 시작하다가 완전한 다리가 되지 못하고 끝내 완성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도마뱀은 다리가 있다. 그러나 도마뱀은 뱀이 아니다. 뱀과 도마뱀이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둘은 친척이다.

뱀은 지구상의 거의 모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다리가 퇴화하면서 기어 다니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사막, 강, 바다, 호수, 숲 등 어디에서나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이다. 뱀은 다리가 없어서 도리어 적응한 동물이다.
우리가 흔히 쓸데없는 일을 사족(蛇足)이라고 하듯이 다리가 없는 뱀은 어디든지 갈수는 있지만 멀리 갈수는 없다. <과학문화포털 중(中)>


<불교경전 백유경에 등장하는 뱀>
뱀은 어리석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숲속에 뱀 한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머리와 꼬리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꼬리는 머리가 늘 앞장서고 자신은 뒤따라가야만 하는 게 불만이었고, 머리는 언제나처럼 자신이 선두로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서로 앞장서겠다고 다투던 날이 이어진던 어느날,
참지 못한 꼬리가 나무에 또아리를 틀었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자 머리는 꼬리에 선두를 양보했다. 하지만 앞장선 꼬리에는 눈이 없어서 앞에 있던 불구덩이를 피해가지 못하고 불에 타죽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면 화를 부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난 불교인은 아니지만 이 이야기를 자주 학생들에게 말을 해준다. 탈무드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존재한다.

<숫파니파타>에 보면 부처가 뱀의 비유를 한 적이 있다. 바로 허물을 벗는 뱀의 모습을 빌어서 수행자나 도를 닦는 이들의 바른 모습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뱀이 허물을 탈피하듯이 과거의 나를 탈피하고 새로운 나로서 거듭나라”라는 말을 한 것이다. <불교신문 2877호 참조>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뱀>
‘어린왕자’를 읽어보면 코끼리를 집어 삼킨 뱀이 보아뱀이 나온다. 얼마나 큰 뱀이면 코끼리를 집어 삼킬 수 있을 만큼 큰 것인가? 뱀은 정말 신기하게도 손가락만한 크기부터 시작하여 10미터도 넘는 뱀이 존재한다.

동화에 등장하는 보아뱀은 아니더라도 어머어마하게 큰 뱀이 지구상에 존재한다. 가장 큰 뱀중에 하나가 그물무늬왕뱀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영화‘아나콘다’나, ‘보아뱀’이나 ‘그물무늬왕뱀’도 모두 ‘보아과’에 속하는 뱀들이다. 그물무늬왕뱀은 보통 5미터에서 8미터 정도 나가며 몸무게가 160킬로그람 이상이다. 육식성으로 새나 포유로를 잡아 먹는다. 그래서 성장할수록 몸이 커진다. 심지어 표범이나 악어처럼 무서운 맹수도 잡아 먹는다고 한다. 그러니 생텍쥐페리가 ‘어린왕자’에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설정할만도 하다.
나는 서울대공원에서 이 ‘왕 뱀’을 본적이 있다. 이 뱀에게는 넓은 공간이 필요하여서 처음에는 20마리였다가 나중에는 2마리로 줄었다고 한다. 커도 너무 크다.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의 책을 읽으며>
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뱀과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모티브를 만들었다. ·오마이뉴스에서 소개한 책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를 잠시 본 적이 있다. 이 책은 여성이 차별을 많이 받았음을 보여주는 책으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오늘 글을 읽고 여성독자들은 궁금하면 사서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여성은 타자이며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여성은 불완전하고 무능력하며
무가치하다고 말했다. 2000년동안 인류는 파울로스(바울)의
말이라고 알려진 성경 구절을 되뇌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원조의 이야기, 뱀의 꾀임에 넘어가 인식의 나무(선악과)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의 이야기는 더 자주 입에 올렸다. 그런 다음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생각이 수천년동안 사람들의 머리에 뿌리 내렸다. 몸으로 밀고 들어와 살과 피가 되었고 우리의 행동방식,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결정했다.“(502페이지)



<한비자의 ‘학택지사’>
한비자의 책을 보면 재미있는 부분들이 나온다.
그전에 잠시 읽었던 내용인데 인상이 깊어서 여기에 남긴다. 바로 ‘학택지사’에 대한 고사성어의 유래이다.

메마른 연못에 살던 뱀들이 물이 마르자 다른 연못으로 옮겨가려면 마을 앞 큰 길을 건너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잡힐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었다. 작은 뱀 하나가 가장 큰 뱀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을 따라 마을 앞 큰 길을 건너가면은 사람들은 그냥 뱀이구나 하고 죽일 것이나, 당신이 나를 업고 떠받치면서 길을 건너면 사람들은 필시 신령스런 뱀들이구나 하고 우리를 건들이지 않을 것이다” 라고 제안을 하였다.
이에 많은 뱀들이 그대로 따르니 정말 사람들이 쳐다보면서 “과연 상서러운 뱀들이구나” 라고 건드리지 않아서 무사히 다른 연못으로 이동했다는 일화이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떠받들듯이 예우하면 큰 고난이 닥칠 때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다는 내용이다. “내가 높아지려면 내 주변사람들부터 높여 주는 것이 진정 내가 높아질 수 있는 방법이다” 라는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나보다 신분이 낮거나 생활수준이 낮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격 자체나 인성 자체가 나보다 아래일 수는 없다. 요즘 나이든 사람들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젊은이들을 낮추어보고 어리다고 마구 가르쳐 들려고 한다. 하지만 젊은이라고 해도 어른 이상의 생각과 인격을 갖춘 사람들이 많다.
“작은 뱀을 태우고 행군하라”
내가 높아지려면 내 주변 사람들부터 높여야 한다.
학(涸)택(澤)지(之)사(蛇) - “섬김은 위대한 리더의 필수 조건이다”


<길가메쉬 신화의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뱀>
현대는 너무나 과학화되고, 합리화되어 사람들은 이제 신화와 신앙에 대해서 더욱 무지해지고 있다. 과연 과학화되고 합리화되는 것이 스마트한 것인가? 결코 아닐 것이다. 인간은 갈수록 뇌가 줄어들고 있다. 무지와 무관심이 깊어지고 있다.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
길가메쉬 신화의 에필로그 부분을 소개한다.
길가메쉬를 만난 우트나피쉬팀은 대홍수와 그가 거대한 배를 만들어 살아남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리고 나서 길가메쉬에게 불멸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전해준다. 7일동안 깨어있을 수만 있다면 불멸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길가메쉬는 곧 잠이 들었고 7일후 깨어난 길가메쉬는 슬프지만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우트나피쉬팀은 길가메쉬에게 절망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신들은 그에게 용기와 전투의 기술, 지혜와 위대한 선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트나피쉬팀은 자신을 찾아온 길가메쉬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불멸 대신 젊음을 되찾을 수 있는 식물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알려준다. 길가메쉬는 우트나피쉬팀이 갈르쳐 준 곳에서 식물을 얻고 여행을 계속하지만 도중에 몸을 씻는 동안 뱀이 그 식물을 훔쳐가고 만다. <뱀이 해마다 허물을 벗고 새로운 피부로 시작하는 과정을 설명해주는 신화일 것이다.> 실망하고 피곤하지만 길가메쉬는 그의 죽음을 기다리는 우룩으로 돌아간다. 길가메쉬의 깨달음은 여행 도중에 만나는 여신의 설득으로 요약된다.


“길가메쉬, 당신은 어느 쪽인가? 신인가, 인간인가? 네가 추구하는 불멸의 삶은 결국 찾지 못할 것이. 신들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인간은 자신의 손으로 지탱하는 삶을 부여 받았다. 그대, 길가메쉬여! 배부르게 하라. 낮과 밤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 하루하루를 기쁨의 향연으로 삼고 낮과 밤을 춤추고 놀아라. 네 손을 잡은 아이의 눈을 바라보아라. 당신의 아내가 당신의 가슴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하라.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쓰면서도 징그러워서 대단히 혼났습니다.
오늘 밤은 뱀꿈을 꿀듯ㅡ 뱀꿈은 아들을 얻는다는 꿈이라던데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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