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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토라와 탈무드 이야기

나사렛 탈무드 인문학 칼럼, 하늘을 위한 논쟁, 땅을 위한 논쟁

by 코리안랍비 2023.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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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위한 논쟁, 땅을 위한 논쟁

 

 

탈무드 인문학 칼럼  

 

하늘을 위한 논쟁, 땅을 위한 논쟁

 

외국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와서 제일 답답한 부분 중의 하나가 한국인들의 [대화의 기술]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수직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교사는 가르치고 학생들은 그저 듣습니다. 목사는 설교하고 성도들은 그저 듣습니다. 어른은 말하고 아이들은 듣습니다. 듣는 만큼 말을 하여야 대화의 선순환이 이루어집니다. 또 배운 만큼 질문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에는 대화의 기술도 부족하지만 더 부족한 것은 제대로 된 [토론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유로운 의견제시]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로부터 의견과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분위기의 부재(不在)가 많다는 것입니다. 

 

탈무드 미쉬나 아보트편 5장 17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모름지기 하늘을 위해 전개되는 논쟁은 최종적으로 불후의 명작이 된다. 하늘을 위해 전개되지 않는 논쟁은 최종적으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어떠한 것이 하늘을 위한 논쟁인가, 그것은 힐렐과 샴마이의 논쟁이다. 하늘을 위하지 않는 논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세에 대한 코라(Korah)일당의 논쟁이다.”

 

랍비들은 논쟁을 ‘하늘을 위한 논쟁’과 ‘땅을 위한 논쟁’으로 나누어서 생각했습니다. 토론을 하면 반드시 사람들은 다투거나 대립의 양상을 갖게 됩니다. 한국의 토론은 거의 대부분이 [찬반토론]이 많습니다. 또한 [반대를 위한 반대]가 많습니다. 이런 식의 이분법적 토론은 이미 정해진 답을 가지고 하기 때문에 도리어 대립만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토론회피나 토론분위기가 죽어 버립니다.

그런데 유대인 사회에서는 일찍부터 [하브루타 havruta]가 발달하였습니다. 그리고 찬반토론의 성격이라도 ‘땅을 위한 토론’에 대해서는 도리어 반대를 하였습니다.

 가령 우리는 코로나 시대에 백신에 대한 토론이 많았습니다. 이런 것은 ‘땅을 위한 토론’의 성격입니다. 그런데 탈무드는 땅에 대한 논쟁과 더불어서 하늘에 대한 논쟁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논쟁은 [불후의 명작]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가치가 높고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탈무드를 보면 힐렐은 온유한 사람으로서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추구하며 사람들을 사랑하라.” 라고 가르쳤습니다. 샴마이는 강직한 사람으로서 “말을 삼가고 크게 실행하라.” 라고 가르쳤습니다. 탈무드 미쉬나가 말하는 ‘하늘을 위한 논쟁’을 전개한다는 것은 공공(公共)의 이익과 사회복지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에 공헌(供獻)을 할 수 있는 일,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런데 토라를 보면 [모세와 고라 일당과의 논쟁]이 나옵니다. 고라 일당들은 공공이익과 사회복지를 위해서, 유대민족을 사랑하는 애족의 마음을 저버리고 자신과 자신의 무리들의 이익만을 구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이 무리를 물리칩니다. 하늘을 위한 논쟁에서는 파벌 확장을 위한 의견대립과 사회를 위한 의견대립을 엄격히 구분합니다. 전자는 부정하고 후자는 긍정하는 것입니다. 

 유대사회를 가보면 두 사람이 모이면 세 가지 의견이 나오고, 세 사람이 모이면 최소 5가지 이상의 의견이 나옵니다. 논의나 토론의 장(場)이라는 것은 ‘찬반양론’으로 갈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부담 없이 다양한 자기 의견을 제시하는 자리입니다. 상자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은 반드시 상자 밖으로 나와서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제시할 몇 %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질문 없는 수업에서 답변 없는 학습이 나옵니다. 

 

원칙적으로 유대 사회에서는 어린 순서나 젊은 사람들 순서대로 발언을 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 원형은 고대의 유대 대법원(국회)이라고 할 수 있는 [산헤드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은 신약시대까지 존재했던 유대인들의 최고의결기관입니다. 이들은 [젊은 생각을 차단해 버리면 진보도 출구도 없다] 라고 말합니다. 

 

유대인 경제학자인 죠셉 슘페터는 [혁신은 창조적 파괴이다. Innovation is a creative destruction] 라고 말했습니다. 혁신할 수 있는 나이는 몇 살일까요?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굳어갑니다. [젊은 그대]만이 혁신할 수 있습니다. 젊어서 혁신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그 혁신에 대해서 긍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혁신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평등의식]이 높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젊은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정말 잘 배우는 사람이고, 혁신적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건강한 [탈무드식 하브루타 토론]의 무대나 장(場)을 자주 만들어야 합니다. 하늘을 위한 토론으로 이어질 때 최고의 것이 나오고, 불후의 명작이 나온다고 하니 우리도 탈무드식 하브루타 토론(debate)으로 [불후의 명작]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이 칼럼에 대한 저작권한은 김재훈 작가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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