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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에 대한 대(大) 착각
[신은 죽었다] 라면서 서구 기독교 라는 거대한 나무에 도끼를 든 철하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의 저서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구절을 선사했다.
나는 방랑자.
아득히 먼 길을 걷는 자라오.
길 어디에도 종착점이 없으며,
쉴 곳도 없다오.
영원토록 방랑하는 유대인처럼,
나는 이 길을 걷는다오.
비록 나는 영원하지도 않고
유대인도 아니지만...
그의 저작에서 조로아스터교의 예언자 차라투스트라가 과연 이렇게 말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상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방랑하는 유대인]에 대한 부분이다.
유대인들은 세계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전 세계 각지를 방랑하며 흩어져 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의 신앙과 전통을 고집한다는 이유로 어느 사회나 포용되지 못하고 녹아들지 못하였다. 흩어진 유대인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눈다. 스파라디와 아쉬카나지로 나눈다. 이들의 흐름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좌파와 진보주의자들, 우파와 보수주의자들로 나누어서 서로를 공격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낸 민족이다. [유대인 방랑사]나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보면 이들이 이루어낸 성취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이들에게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흩어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방랑과 소외]라는 두 단어는 유대인들에게 합당한 말이다.
이들은 방랑을 하면서 [생존 기술]을 익혔고,
소외와 차별을 받으면서 [자신들만의 정체성과 결속력]을 강화하였다.
이들중에 위대한 유대인들의 수를 여기서 열거하는 것은 지면이 부족할 정도이다.
이들이 시도한 실험과 작품이 20세기 세계사를 주도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읽고 있는 상당수 책들이 나오는 주인공들이 유대인들이다.
어떤 고전이나 위대한 저작을 읽을려고 하면 유대인들이 항시 등장한다. 대학시절부터 자주 읽었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서적들, 에릭 프롬이나 프로이트, 아들러 서적들, 빅터 프랭클, 비트겐 슈타인, 노암 촘스키의 서적들, 그리고 여성학자 한나 아렌트,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만, 경영학자 피터 드럭커, 미술가로서는 피카소나 샤갈이 있고, 대 문장가인 [극단의 시대]를 쓴 에릭 홉스봄도 있다.내가 기억하는 사람들만도 너무나 많다. 이 사람들은 살면서 전혀 이스라엘에 발을 들여본 사람들이 거의 아니다. 물론 샤갈은 이스라엘에 여러 번 와서 자신의 그림을 전시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흩어진 유대인들의 후손]이다.
아인슈타인은 하도 유명해서 더 거론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우리는 이러한 유대인들에 대한 대 착각을 많이 갖고 있다. 오랫동안 “유대인들은 가장 뛰어난 두뇌와 이해력을 가진 민족”이다 라는 [유대인 신화]를 사람들은 만들어냈다. 나는 오랫동안 유대인 연구를 하면서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대 착각을 발견하였다.
제일 먼저, ‘유대인식 교육의 탁월성’을 강조한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성과를 낼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있지만 이들이 남들과 다른 독특한 교육을 받아서 그렇다고 여긴다. 그런데 유대인 사회에서 교육을 받아보니 이들의 교육이 한국의 교육보다 더 낫다고 평가하기는 힘들었다. 다만 이들의 교육을 대하는 태도나 기질은 한국 사람들보다 더 탁월한 면이 있다. 교육을 최우선으로 두고 움직이는 것은 한국과 비슷하나, 그러나 한국은 현실주의에 기초한 교육에 전념한다고 하면 유대인들은 현실을 창조하는 교육에 전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획일화된 교육방식을 지향하고, 개성을 강조하면서도 서로 협력하는 [융합식 사고]를 기반으로 한 교육이 특징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교육을 하면 과연 뛰어난 학자나 노벨상에 버금가는 사람들을 만들 수 있을까? 그것도 의문이다. 유대인들과 한국인들은 서로 비슷하다고 하지만 전혀 비슷한 면을 찾아보기기 힘들다. 여러 문헌들은 상당히 ‘합리화’를 하지만 그나마 비슷한 면이 교육에 대한 열정이다. 그것도 비교적 20세기 이후에나 비슷하다. 그러나 교육은 열정만으로 되지 않는다. 상당히 복합적인 개념이다. 집단의 능력도 따라주어야 한다.
위의 열거한 유대인들을 보면, 부모들이 그 자녀들을 유대인처럼 키우고 양육하지 않았다. 프로이트의 부모의 경우 ‘비유대인처럼 행동하라’는 인생의 처세술을 심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유대인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자신의 의사요 학자로서의 자부심을 앞세운 인물이다. 유럽에서는 수많은 유대인 박해와 학대가 있었기에 더욱 스스로 삼가고 조심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독특한 교육방식이 유대인들을 구별하는게 아니라 ‘교육만이 살길이다’ 라는 의식을 어려서부터 내재화한 효과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유대인식 교육]이 다른 민족들의 [교육방식]을 능가하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로, 유대인들은 모두 천재요 영재라는 신화이다.
이런 글을 쓰면서도 천재와 영재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다. 탈무드에 보면 [인간은 모두 천재로 태어난다. 그리고 그 천재성을 발휘하고 돕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와 선생의 역할이다] 라고 말을 하였다. 그렇다고 이들은 ‘타고난 천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천재는 없다’ 라고 말을 한다.
세계 인구의 0.2%인 유대인들이 노벨상의 23%나 되는 노벨상을 수상한다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무리들?이 있다.내가 보아서는 굉장한 무리?를 한다.
내가 만난 유대인들은 한국인들보다 상당히 떨어지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틀렸고, 독일인들은 유대인들보다 더 나은 우수한 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나름의 [게르만 우생학]을 들고 나왔다. 노벨상 수상자의 상당수는 서구에서 나왔다.
그나마 일본이 노벨상 수상자를 여럿 배출하는 이유는 바로 [탈아입구]에 있었다. 아시아를 넘어서 유럽의 학문과 정치, 문화와 역사를 그대로 일본에 투영시키고 정착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일본인들의 성실과 근면의 윤리성이 이들이 노벨상을 타는데 일조하게 하였다고 본다. 그렇다면 일본은 [천재국가]인가? 전혀 아니다. 이들이 가진 지식이나 정보, 그리고 수많은 문헌과 연구는 바로 [축적의 산물]이다.
유대인들은 [성서와 탈무드]를 자주 자신들의 인생학습서요 교과서로 삼았다. 그래서 이들은 문맹자가 거의 없고, 그리고 다른 학문에 대해서도 [구도자적인 자세]가 높았다.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보다도 높은 학문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러한 학문에 대한 열정도 [생존기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문을 체계적으로나 단계적으로 이루어간 노력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세 번째로, [유대인들이 세계를 지배한다] 라는 신화이다.
[시온 의정서]나 [세계정부론], 그리고 [비밀결사 프리메이슨], [달러화의 제조],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 등을 보면서 미국을 마치 유대인들의 시녀 국가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나도 대학시절에 이런 생각을 젖어 보았다. 미국은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나라라면서 한결같이 나름의 퍼즐을 맞추는 작업을 하였다.
현재 4차 혁명을 주도하는 것은 상당수 유대인들이면서, 사람들은 이들이 미국을 지배하지는 않지만, 사이버 스페이스의 최강자로서 지배하고 군림한다고 믿고 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오라클, 아이비엠, 인텔, 마이크로 소프트 등 굴지의 회사들의 창립자들이 유대인들이 많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4차 혁명이나 AI도 유대인들이 만들어서 지금 전 세계의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고 있다고 본다.
심지어 최근에는 우수한 생물학이나 유전공학의 힘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도 만들었다는 음모론도 들어보았다. 하지만 이들은 전혀 전 세계를 자신들의 손으로 쥐락펴락하고자는 [지배의 논리]가 별로 없다. 이들에게 도리어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의 통치와 지배’를 강조한다.
유대인들은 20세기 히틀러와 홀로코스트라는 악몽으로 살아왔다. 그런 이들에게는 [독일민족]에 대한 저주에서 벗어나 도리어 [독일민족]을 저주하고 무너뜨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라는 착각도 갖고 있다. 유대인들은 전혀 그런 발상을 갖고 있지 않다.
상당히 뛰어나고 대단한 인물들의 상당수가 유대인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구는 넓고, 세계도 넓고, 인구는 많다. 창조적 소수들이 많은 것은 바로 토인비 역사학자가 말한대로,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민족적으로 맞이한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여전히 우리는 수난 받으면서 방랑한 역사에서 이들의 정체성(Identity)과 탁월성(Greatness)을 찾아보아야 한다. 이들의 이러한 역사적 흐름들이 이들을 대단하고 웅장한 업적과 명성을 얻게 하였다고 보여진다. 이들은 불행한 장구한 역사를 벗어나 이제는 영광을 누리는 민족이 되었다.
2500년간 없었던 나라를 세웠고, 초강대국 미국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며, 세계의 명문대학과 명문연구소들의 상당수 브레인들을 확보하고 있다. 나도 그중에 한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다. 유대인 교수들의 교육과 가르침에 대한 열정은 실로 놀랍기만 하다.
우리는 유대인들에 대한 착각을 거두고, 이들의 진면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 것에서 온고지신도 해야 하지만, 유대인들의 수난과 방랑의 역사에서 교훈과 온고지신을 삼아야 한다.
오마에 겐이치라는 경영학의 구루중 하나인 일본학자는,
하버드 비즈니시 리뷰에서 [문화이식]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유럽의 나무나 유대인의 나무를 한국과 일본에 심으려고 하면 백이면 백 모두 다 실패한다고 한다. 그래서 먼저 그 나라와 민족을 만나서 오랫동안 배우고 익히면서 특징과 위대성을 발견하라”고 말을 하였다.
나무 하나를 옮겨 심으려고 하여도 쉽지 않은데
유럽인들과 유대인들의 나무를 옮겨 심는 작업은 정말 오랫동안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먼저 이들 나라에 가서 유학을 하고 배우려는 젊은이들을 정책적으로 많이 보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들이 돌아와서 한국과 일본에 유럽과 유대인들의 나무를 이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상당수 실패할 것이다.
수난과 방랑으로 다져진 유대인들의 마인드와 사고를 맞추어서 갈려고 하면 그만한 댓가를 치루지 않으면 안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국이 바로 유대인들처럼 오랫동안 약소국, 약소민족으로서 고난과 아픔을 가진 역사가 있어서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연구는 [역사적으로]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에 대한 대(大) 착각을 먼저 벗어나는 일이 우선이다. 그런 것에 휘둘려서 우리가 가져야 할 목적과 의미를 상실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정신문명의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 개인도 성장하고 눈부신 발전을 하려면, 바로 방황하고 방랑하는 마인드가 필요하다. 내적으로 고민하는 힘을 키우고, 삶의 생존의 기술을 높여 나가며, 자신들의 자존감이나 정체성을 키워나가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아직도 나는 유대인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면서도 한국이 연구를 같이 하면서 많은 실력을 갖추어 가는 것도 다행이라고 본다. <이 글은 유대인 연구가중에 하나인 함 모 교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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