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은 찬반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하늘을 위해 전개되는 논쟁은 최종적으로 불후의 명작이 된다. 하늘을 위해 전개되지 않는 논쟁은 최종적으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어떠한 것이 하늘을 위한 논쟁인가? 그것은 힐렐과 샴마이의 논쟁이다. 하늘을 위하지 않는 논쟁이란 무엇인가? 모세에 대한 고라(Korah) 일당의 논쟁이다.”
탈무드 미쉬나 <아보트>편 5.17
외국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와서 제일 답답한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한국인들이 [대화의 기술]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대화의 기술이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고, 제대로 된 대화는 감동과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대화의 기술의 부족도 있지만, [토론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퇴보하는 모습을 더욱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다이얼로그, 컨버세이션, 펠로우쉽, 디베이트는 대화, 친교, 토론 등과 같은 것은 [커뮤니케이션 - 의사소통]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에 상당히 약한 모습을 보이는 한국인들의 이런 모습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로운 의견제시]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로부터 의견과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분위기]의 부재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오늘의 탈무드 인문학을 전개해 봅니다.
<자유로운 의견제시>
앞에서 [하늘을 위해 전개되는 논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미쉬나 아보트 편에 나오는 명구절인데, 이 구절을 잘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위해 전개되는 논쟁은 불후의 명작이 된다” 라고 하였는데, 왜 논쟁이 불후의 명작이 될까요? 그것도 하늘의 논쟁과 땅의 논쟁으로 나누어서 유대인 랍비들은 생각했습니다.
논쟁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토론]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생각해 봅니다. 왜 유대인들은 의견 대립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재로 논의나 토론을 전개하려는 것일까요? 토론을 하면 반드시 사람들이 다투거나 대립의 양상을 띄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토론은 거의 대부분이 [찬반토론]이 많습니다. 여권과 야권의 갈등구조를 보면 한쪽은 찬성, 다른 한쪽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식의 이분법적 토론은 서로 답이 없는 대립만 일어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도 찬반토론도 많이 하지만 , 사실 이들이 대립각을 세우는 경우는 [땅에 대하여 전개되는 논쟁]일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코로나 백신을 맞는 경우에 어느 백신을 맞을 것인가? 등등하여 여러 가지 샘플들을 등장하여 최적의 아이디어를 모으고 의사결정을 합니다. 이런 것들은 ‘땅에 대한 논쟁’입니다. 그런데 탈무드는 땅에 대한 논쟁과 더불어서 하늘에 대한 논쟁도 담고 있습니다. ‘하늘에 대한 논쟁’은 상당히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은 [불후의 명작]이 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논쟁의 가치가 높고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 철인들과 예술인들은 불후의 명작은 사실 [불우한 시절]에 나온다고 말을 합니다. 탈무드에서는 [하늘을 위해 전개되는 논쟁이 불후의 명작을 만든다] 라고 하니 얼마나 탈무드가 탁월한가를 보여주는 말이라고 봅니다.
잠시 이스라엘에서 동양인 최초로 [성서학 박사학위]를 받았던 [테시마 유로] 선생의 글을 살펴봅니다.
오늘 아보트 편에 나오는 1세기 전후에 활약한 유대의 2대 현인은 역시 힐렐과 샴마이입니다. 이들은 서로 [최대의 라벌]로서 존재하면서 유대교를 발전시킨 인물들입니다.
힐렐은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추구하며 사람들을 사랑하라” 라고 가르쳤습니다. 샴마이는 강직한 사람으로서 “말을 삼가고 크게 실행하라” 라고 가르쳤습니다. 힐렐은 사람들에게 온유하였고, 율법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샴마이는 대단히 엄격했습니다.
힐렐은 도덕론자에 가깝다면, 샴마이는 법학자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랍비로서 여러 토론문제에 부딪쳐야 했습니다. 가령 “안식일 직전에 항해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힐렐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경고한 반면, 샴마이는 ‘일몰- 해지기 전에만 귀향할 수 있다’고 안식일 직전의 항해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왜 안식일만큼은 힐렐은 엄격하였고, 샴마이는 유연했을까요? 이게 궁금하여서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살아온 환경의 차이가 있습니다.
상인 출신인 힐렐은 민법 해석에는 대단히 탄력적이고 유연한 반면에 기술분야에 대해서는 이해의 폭이 적었습니다. 한편 장인 출신인 샴마이는 상법 해석에 있어서는 대단히 엄격했지만 기술 분야에서만큼은 기술자 자신들의 판단을 존중했습니다.
[탈무드 미쉬나]가 말하는 [하늘을 위해 논쟁]을 전개한다는 것은 공공의 이익과 사회 복지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일,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한 사회 전체에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확신할 수 있는 발언이라면 절대로 타인에게 자신의 의견을 양보하지 않을 정도의 기개(氣槪)가 있어야 합니다.
다만 쌍방이 서로 양보하지 않고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합의(合議)하지 못한다 하여도 공공 이익과 사회복지를 위한 의견들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귀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못하고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람에게는 입이 있고, 생각이 있고, 지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표현의 상당수는 ‘말’과 ‘글’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토론은 ‘말’로 하는 것입니다. 말로 하는 것이기에 이 말에 논리성(論理性)과 정당성(正當性)을 부여하고, 그리고 분명하고 확실한 자기의 주장이 들어가야 합니다.
공공의 이익과 선을 위해서 그리고 더불어서 복지(well-being)을 추구하지 않는 토론은 정치적인 이익이나 자신이나 소수 무리의 이익을 더 앞세우는 [땅을 위한 논쟁]이 됩니다. 이런 논쟁을 보려면 [시의회나 도의회]를 가보면 쉽게 볼 수 있고, 멀리 갈 것도 없이 [국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파벌 확장과 관련된 대립은 엄히 삼가는 것이 탈무드입니다.
이에 대해서 토라에 보면 [모세와 고라 일당과의 논쟁]이 나옵니다. 고라 일당들은 공공이익과 사회복지를 위해서, 유대민족을 사랑하는 애족의 마음을 져버리고 자신과 자신의 무리들의 이익만을 구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이 무리를 물리칩니다. 하늘을 위한 논쟁에서는 파벌 확장을 위한 의견 대립과 사회를 위한 의견 대립은 엄격히 구분합니다. 전자는 부정하고 후자는 긍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을 위한 논쟁]이 아니라, [땅을 위한 논쟁을 구분하여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논의나 토론의 장(長)이라고 하는 것은 찬반양론으로 갈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부담 없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자리입니다. 찬반을 논하는 것이라면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아니면 제 3 지대를 찾아서 제 3안의 대안을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의를 제기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껍데기를 깨고 과감히 밖으로 나올 필요가 있습니다.
상자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은 상자 밖으로 나와서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제시할 몇 %의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질문 없는 수업에서 답변 없는 학습이 나옵니다. 일단 자유로운 질문을 하려면 기존의 [틀 - frame]을 깰 필요가 있고, 그리고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끊임없이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새로움이 창조적 아이디어를 도출해내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희망이 있어 보입니다.
나의 학창시절에는 상상도 못한 일이지만 학생들은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제시하는 모습을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공공이익과 사회복지]를 추구하는 면에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론논쟁의 기술]을 먼저 가르쳐주고, 그리하여 사적인 이익이나 파벌을 형성하는 식의 [땅을 위한 논쟁]은 좋지 않다는 것을 주지시켜 주어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부터 발언하기>
유대 사회를 가보면 두 사람이 모이면 세 가지 의견이 나오고, 세 사람이 모이면 최소 5가지 이상의 의견이 나옵니다. 그들은 자신이 발언하는 도중에도 머릿속으로는 또 다른 가능성과 생각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이 너무 식상해서 그렇지 사실 [생각의 힘]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공통점입니다. 유대인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 밤을 새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술을 먹지 않아도, 식사를 많이 하지 않아도 이들은 [입이 살아 있는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유대인 사회에서는 어린 순서나 젊은 사람들 순서대로 발언을 합니다. 그 원형은 고대의 유대 대법원이라고 할 수 있는 [산헤드린]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은 신약시대까지 존재했던 유대인들의 최고의결기관입니다. 약 70인 정도 되는 민족의 지도자들이나 대표들이 모여서 법안처리를 하였습니다.
이들은 젊고 어리다고 해서, 경험이 부족하고 미숙하다고 해서 선배들이나 장로들 앞에서 사양을 떨거나,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젊기 때문에 더욱 기발한 아이디어나 새로운 접근 방법을 도출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젊은 생각을 차단해버린다면 진보도 출구도 없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연장자나 장로는 젊은 사람들의 발언을 공평하게 평가하는 분별력을 발휘하여 최후에 발언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풍토나 전통이 여전히 유대사회에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 전체가 명석하고 뛰어나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를 가나 공부를 잘 하는 친구들도 있고, 못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다만 보통의 유대인과 명석한 유대인의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자는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반면
후자는 충분히 음미를 하고 사색을 하면서 입을 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기에도 [스피드 조절]이 필요합니다.
침묵이 금이다 silence is gold
라는 말은 아예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되 절제되면서 그러면서 심사숙고하여 무게있는 발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감동도 주고, 교훈도 주고, 그리고 핵심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든 사람들이 행동은 힘들어도 말에 대해서는 대단한 수준이 많습니다.
유학시절에 어느 철학과 교수의 초대를 받았는데,
약 10명 이상의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인 나에게 제일 먼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아마도 한국인인 내가 가장 젊어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내 나이를 알고서 깜짝 놀랍니다. “30세가 넘었다”고 하니 “20살로 보인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나이든 사람은 존경이나 존중의 대상이고, 젊은이들이라고 해서 실력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실력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기회가 필요할 때 자신의 의견과 아이디어를 확실하게 발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진리 앞에 나이는 무의미합니다. 현대 정치 세계를 보면 갈수록 젊어집니다. 물론 한국은 늙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젊은이들에게 말하거나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봅니다. 사실 상당수 정치인들은 ‘젊은이들을 무시’한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이렇게 말하기에는 지나친 일반화나 비약일 것 같지만 사회의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정치세계에서 확실한 비전과 지도력이 연장자의 권위를 초월합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시장의 흐름과 경기동향을 읽어내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새로운 부를 형성하고, 사회를 리드합니다.
유대인 경제학자였던 죠셉 슘페터는 “혁신은 창조적 파괴다”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혁신할 수 있는 나이는 몇 살일까요?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굳어갑니다. [젊은 그대] 만이 혁신할 수 있습니다. 젊어서 혁신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그 혁신에 대해서 긍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혁신할 수 있다는 것은 곧 [평등의식]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정말 잘 배우는 사람이고, 혁신적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입니다.
혁신은 창조적 파괴라고 해서, 기존의 것들을 마구 파괴하는 식의 혁신도 금물입니다. 그 사람을 innovator 혁신자 라고 부르지 않고 destroyer 파괴자라고 부릅니다. 기존의 것, 전통이나 좋은 가치관에 대한 겸손한 자세가 중요합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나 [법고창신]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기존의 것에 대한 겸손한 자세]
는 선배나 주위 사람들의 인격을 절대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탈무드는 [어떤 사람도 경멸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개인적인 인격의 존엄성과 존재가치를 외면하는 것은 [토론자의 바른 자세]도 아니고, 그리고 비인간적인 처사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피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있는데,
[만장일치]입니다. 탈무드를 공부하다가 크게 공감이 갔던 부분입니다. 특히 사형(death penalty)을 언도할 때 재판관의 만장일치로 무죄 판결이 내려질 수 있지만 만장일치로 피고의 유죄를 결정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즉 탈무드에서는 “사형 판결을 내릴 경우 재판관의 만장일치로 결정된 사형은 무효다” 라고 정해져 있습니다.
사실 재판관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권력을 함부로 남용하여 ‘사회학적으로 죄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처벌을 제대로 해야 하는데 축소하여 재판하는 일’은 재판관 맘대로 하겠다는 발상을 멀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장일치가 물론 이상적이긴 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현실적으로 만장일치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 방송을 보면 서로 격렬하게 패널들이나 의원들이 토론합니다. 절대 이들은 ‘모든 의견은 서로 대립하는 것’ 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A라는 안에 대해서 B안이 있다고 하는 양자대립의 구조는 없습니다. 정반합의 원리처럼, B안이 나오기가 무섭게 C안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C안에 대해서도 다른 각도나 관점(PERSPECTIVE 퍼스펙티브)에서 D안이 나옵니다. 이렇게 제시되는 의견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이로 보건대 유대인들의 토론능력이나 논쟁습관을 보면 [창조적이고 신선한 아이디어의 생산]이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말은 말을 낳고, 의견은 의견을 낳는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모든 가능성을 끝까지 모색한 후에 그들 만의 최선의 안을 채택합니다. 또한 제한 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최후에 남은 두 개의 안 중 하나를 채택합니다.
그렇다면 왜 논쟁에서 의견 대립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토론과 논의를 전개할까요? 그것은 바로 “모름지기 하늘을 위해 전개되는 논쟁은 최종적으로 불후의 명작을 만든다” 라는 것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탈무드 하브루타 토론]의 무대나 장을 자주 만들어야 합니다. 탈무드가 정말 강력한 책은 아니고, 그저 우리는 탈무드가 말하는 가르침을 오늘에 되살리는 [온고지신]의 정신을 더욱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하늘을 위한 토론으로 이어질 때 최고의 것이 나오고, 불후의 명작이 나온다고 하니 우리도 토론으로 [불후의 명작]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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