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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브루타의 본질(Havruta Essential) 연구
본질(本質)이란 무엇인가?
본질이란 철학적으로 그것이 빠지면 존재가 성립되지 않는 고유의 특질을 말한다. 그리고 온전히 그 존재만이 가지는 특징이기도 하다. 새의 본질은 무엇일까? 머리와 몸통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새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늘을 난다는 것만으로도 새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새가 아니더라도 곤충이나 비행기나 헬리콥터는 하늘을 날기 때문이다. 즉 새의 본질은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나는 것이다. 본질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가지는 고유의 특질이라면 우리는 본질에 대한 이해를 현상보다 먼저 해야 한다.
유대인 마크 주커버거가 설립한 페이스북의 본질은 무엇일까? 아무리 경제적으로 95%를 광고에서 수익을 얻는 광고회사라고 하여도 페이스북이 광고 사업을 없앤다고 페이스북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페이스북의 본질은 '연결 Connectivity'에 있다고 주커버거는 자신의 CEO로서의 미션을 말했다. 그렇다면 구글의 본질은 무엇인가? 구글의 본질은 ‘검색 SEARCH'이다. 원래 성경과 탈무드를 검색하려고 어느 저명한 랍비가 만든 프로그램을 구글이 인수하여서 전 세계의 모든 지식과 정보를 검색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본질은 개인으로서는 자신이 누구인가? 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며, 기업으로서는 사업의 생명이나 생존가치가 걸려 있는 중요한 것이다. 무엇이든 본질만 찾으면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갈 수 있다. 본질을 알아야 어떤 개념이나 현상에 관한 참된 이해를 얻을 수 있으며,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Clue)를 찾을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간결함은 최고의 지혜다”라고 하였다. 스티브 잡스는 “더 이상 단순화 할 수 없을 때까지 단순화하라” 라고 하였다. 여기서 간결함과 단순화는 결국 ‘본질을 추구하라’라는 것이다. 레오 바바우타(Leo Babauta)는 “간결함은 두가지로 압축된다. 본질을 발견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왜 최고의 인물들은 가혹할 만큼 단순화(simplification)에 대해서 집착할까? 그것은 단순화를 할 때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본질을 발견하지 않는다면 결국 본질에서 멀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반드시 ‘본질이나 핵심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교과서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그 교과서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과 핵심을 찾으면 쉽게 그 교과서를 정복할 수 있다. 또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 일이나 업(業)의 본질과 핵심을 찾으면 그 일을 수월하게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창조적으로나 생산적으로 일을 해나갈 수 있다. 본질과 핵심을 잘 찾는 것은 바로 ‘단순화나 간결함의 지혜’를 갖는 데서 비롯된다.
본립도생 (本立道生)
논어에 보면 ‘본립도생’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기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라는 의미이다. 얼마 전에 성균관대 신정근 교수가 말한 기본에 대한 중요한 대목이 있다.
“기본이라는 것은 출발 지점이기도 하지만 다시 회귀할 지점이기도 하다. 기본없이 시작할 수는 있지만 오래갈 수 없다.”
언어를 배우려면 알파벳을 익히고, 운동을 잘하려면 체력을 기르고, 군대에서는 기초적인 군사훈련을 탄탄하게 되풀이해야 하고, 책을 읽으려면 독서의 기본인 낱말이나 용어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는 모두 다른 상황들에 속하지만 본질상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두 기본(基本)에 해당하는 것이다.
기본은 사람이 무엇을 하려고 할 때 처음에 반드시 내 것으로 갖추어야 할 자질적인 특성이기도 하고 결코 건너 뛰어서는 안되는 절차이기도 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공부가 기본공부나 기반공부이다. 이 시기에 기본을 잘 갖추지 않으면 고등학교에 가서 도약할 수 없다. 기본에서 모든 것을 출발하고, 기본으로 돌아가면 “지금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까? 라는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다.
본질이나 핵심을 놓치지 않는 다는 것은 바로 기본이 탄탄하다는 것을 말한다. 기본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일어나는 수많은 현상들 너머의 근원을 찾아가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철학자들은 지난 2-3000년이 넘도록 현상을 넘어 근원으로 시선이 향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은 날마다 일어나는 사건과 현상만을 보는데 반하여 철학자들은 ‘현상을 넘어 근원적인 이유’를 찾아갔다. 그래서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한다. 그것 또한 기본에 충실한 사고방식에서 비롯된다. 기본은 무슨 일을 하기 위해 꼭 갖추어야 할 자질이고 문제가 생기면 되돌아와서 다시 점검해야 할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은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지키고 누구라도 존중해야 할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에서 ‘철학’이 나오는 것이다.
이 세상 수많은 민족들 중에서 유대인들은 철학적인 입장에서 기본을 중시여겼다. 이들은 조상서부터 부여받은 성경적 전통과 탈무드의 삶의 원리를 지금도 고수하고 있다. 기본에 충실한 민족이 된 것이다.
히브리어로 질문은 ‘셰알로트’라고 한다. 보통의 질문은 교과나 어떤 의문점이나 호기심에 대한 질문이라면 ‘쉐알로트’는 아주 강력하고 적극적인 질문행위를 말한다. 어떤 문제에 대한 실제적이고 직접적이며 도전적인 질문을 말한다. 그렇다면 ‘좋은 질문은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좋지 않은 질문도 있다는 것이다. 소위 ‘쓰잘데 없는 질문들’이 그것이다. 그렇자면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본질에 기초한 질문은 절대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질문을 바꿈으로써 상황을 역전시키는 사례가 수도 없이 일어났다.
MBA 대학원 시절에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케이스 스터디’를 자주 연구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연구에서 공통점은 바로 ‘질문을 바꾸는 것, 그리고 방향을 바꾸는 것’이 대단한 성공과 효과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질문을 바꿔야 본질이 보인다.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이다. 이를 다시 라틴식으로 바꾸어보면, 호모 퀘스처너스(Homo Questioners)다. 인류역사의 발전은 질문을 통해서 일어났다. 질문을 통해서 인류 역사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곧 ‘인간이 생각하는 힘’을 발휘해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발명하고, 발견하며, 발전시켜왔던 것을 말한다. 그런데 발명, 발견, 발전은 반드시 ‘질문방식’에서 달라진다. 본질과 결부되는 질문이 아니라, 본질과 핵심을 놓치지 않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수도 없이 질문을 한다. 하지만 문제는 질문방식이다. 질문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본질을 제대로 찾아갈 수 없다. 질문방식을 바꾸면 새로운 본질을 포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제는 평생교육시대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보면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보통 사람들은 “평생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가장 많이 던질 것이다. 이 질문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의 문제점은 마치 공부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선생님에게 “우린 왜 공부를 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 ~란?, ~ 다! 식의 정의를 내리는 질문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이면서 사유(思惟)하기를 거부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자로 사유라는 단어를 보면, ‘생각하고 생각하다’ 하다라는 의미이다.
질문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질문의 효과를 거두기가 힘들다.
‘평생교육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것보다 ‘왜 사람은 배우려고 하는가?’ ‘사람은 왜 평생 동안 학습을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바꾸어야 한다. 무엇이라?는 질문에서 왜? 라는 질문으로 그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왜 당신은 이 일을 하는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때 이는 어떤 그 일을 하는 ‘힘’을 물어보는 것과 같다. ‘그 일을 하게 하는 힘이나 원동력’이 있다면 그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가치가 잘 드러난다. 평생교육이나 어떤 일을 사로잡고 있는 힘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결국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힘이나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과 만나게 되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본질적인 가치를 만나게 될 것이다.
하브루타의 본질
위에서 ‘평생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죽은 질문이며, 형이상학적인 질문이라고 하였다. 이런 질문보다는 ‘왜 우리는 하브루타를 하는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접근해야 한다. 나는 본 글에서 ‘하브루타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그 본질을 대화와 의사소통에서 찾아보고자 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하브루타는 ‘두 사람이 짝을 지어서 질문과 토론을 하는 학습방식’이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하브루타는 개인학습이나 집단학습을 배제한 개념이 되고 만다.
엄밀하게 말해서, 하브루타의 기원은 ‘탈무드식 학습방식’에서 비롯되었다. 탈무드를 공부하기 위하여 두 명이 모여서 fact to face 라는 대면방식으로 서로 격렬하게 떠들면서 학습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을 한국에서는 마치 새로운 교육의 패러다임이나 교육의 모델처럼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전혀 아니다. 이미 유대인들은 2000년이 넘도록 지켜온 이들의 ‘교육유산 Educational Heritage’이다. 오랫동안 유대인들은 ‘본질과 핵심을 파악하는 질문’을 던져왔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을 중심으로 토론하고, 어떤 일정한 법칙과 지적 성장을 발전시켜왔다. 그 핵심 텍스트가 바로 ‘토라와 탈무드’이다. 토라와 탈무드를 공부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공부이다. 그리고 평생 공부이기도 하다. 또한 세대와 세대간의 공부이기도 하다.
랍비중에 탈무드를 히브리어로 50여년을 완역한 ‘스타인살츠’는 말하기를 [토라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이라면 탈무드는 인간이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이다. ] 이들의 토라와 탈무드식 학습은 다른 타학문이나 일상생활에 크게 영향을 미쳐왔다. 바로 ‘유대인 정체성 Jewish Identity'라는 이름으로 영향을 미쳐왔다. 어렵고 복잡한 토라와 탈무드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혼자서 감당할 수 없고, 반드시 둘 이상의 집단의 역동성(다이나믹스)이 요구되었다.
토라와 탈무드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바로 ‘교육’이라는 것이다. 유대인 교육의 본질과 핵심은 바로 토라와 탈무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본질과 핵심을 감당하는 존재들은 바로 이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탈무드를 공부하는 학생을 ‘탈미드 Talmid’라고 부른다. 이 토라와 탈무드를 공부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학습 기법 Learning methods)'들을 발전시켜왔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하브루타’이다.
필자는 하브루타의 어원이 ‘하베르’라는 아람어에서 기원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생활하면서 단 한번도 ‘하브루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한국에 와서 몇 년 후에 ‘하브루타’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하브루타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하여, 본질과 양상, 그리고 그 유행어에 대한 현상까지 살펴 보았다. 이를 히브리 말로 ‘다라쉬 Darash’를 한 것이다. 다라쉬라는 것은 자료를 모으고 수집하면서 그리고 자료를 면밀하게 컨텐츠로 만드는 작업이며, 서치에 대한 리서치를 하는 행위를 말한다. 결국 정보 information를 만드는 행위이다. ‘다라쉬’는 유대인들이 평소 제일 잘 하는 학습파트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풍부한 독서와 사색도 들어간다. 풍부한 독서와 사색을 하다보면 어떤 원리나 비밀(비법)도 발견하게 된다. 이를 ‘소드 sod' 라고 부른다. 소드는 비밀이라는 뜻인데, 여기에 어원을 둔 '예소드 Yesod'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기초나 기본’이라는 말이다. 기초나 기본이 탄탄할 때 시크릿도 생기는 것이다. 기본이 충실하지 않으면 결국 원리나 비법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엘리자 시걸(Aliza Segal)의 하브루타의 본질
이스라엘 교육학자중에 ‘엘리자 시걸’이 있다. 그녀는 ‘하브루타’에 대한 자신의 논문에서 하브루타의 본질을 일정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 중에 일부를 소개한다.
두 명 이상의 학습자들이 모여 토라나 탈무드를 하면 하브루타라고 하지 않고 복수형인 ‘하브루토트(Havrutot) 라고 한다. 필자는 하브루타 시스템의 긍정적인 측면을 말하고자 한다. 하지만 혼자서 공부하는 독학 스타일의 부정적인 측면도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마치 혼자 공부하는 것이 당연한 것 처럼 말하지만, 공부 그 자체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명의 혼자들이 모여서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한 명을 위한 교실이 없기 때문이다. ‘한 명을 위한 교실’ 이것은 교실이 아니라 감옥이다. 인류 역사에 한 명을 위한 교실, 가정은 없었다.
교육자들이 고민해야 할 부분은 어떻게 하브루타 타임을 가져야 할 것인가?이다. 이는 혼자서 공부하는 것이 좋지 않고 여럿이 모여서 공부하는 학습형태야 말로 일상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브루타의 경험적인 목적과 잠재된 유익과 장점을 잘 파악해야 한다. 한국의 하브루타는 사실 수동적이고 학습자들에게 피동적인 역할만을 부여한다. 그러다보니 본질에서 상당히 멀어져있다.
우리는 하브루타의 역사적인 측면과 더불어서 오늘날의 현대사적인 측면을 같이 고려해야 한다.
하브루타(친구)와 하브루타(지적 친교)하라 !
유대인들에게 하브루타란? 역사적인 측면이 크다. 많은 수의 유대인들은 베이트 미드라쉬에서 하브루타 방식으로 토라와 탈무드를 익히거나, 일반 기타 학문을 학교에서 익혀왔다. 이들의 성경적이고 탈무드적인 전통은 이들이 생활일반에서도 편만하게 나타난다. ‘하브루타 타임’을 위해서는 반드시 제대로 된 준비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하브루타 타임은 상당수 여러 강좌(시우림 Shiurim)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으면 아주 불만족스러운 클레스가 이어진다.
모든 유대인들의 클레스에는 반드시 배운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금물이다. 텍스트를 반복하여 보는 것은 좋지만 배운 내용을 다시 그대로 찍어 내듯이 하는 것은 창의성 유도에 걸림돌이 된다. 먼저 학생들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생산하고 효과적으로 질문을 던지도록 격려’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한국적인 하브루타의 정립은 하브루타 시스템의 기원을 우리는 잘 파악하고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본질을 연구함에 있어서 성경을 모르는 비신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토라와 탈무드 학습이 하브루타의 본질에 속한다면 이를 수용하려는 마음도 갖추어야 한다. 토라 공부나 탈무드 공부는 파트너들이 서로 역사적인 측면과 전통적인 측면을 가장 공유하고 공감해주는 인식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샤밧(안식일)에 대해서 공부한다고 하면 랍비 힐렐의 전통을 반드시 공부를 해야 한다.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교육기관은 ‘예시바 yeshiva' 이다. 복수형으로는 ‘예시보트Yeshivot'이다. 이들은 학생들을 반드시 앉아서 대화하면서 파트너들끼리 학습하도록 한다.
‘예시바’ 라는 말은 실제적으로는 '야샤브’라는 어원에서 나왔다. 이는 ‘앉아서 공부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반드시 앉아야 한다. 서 있는 사람은 선생이나 랍비들이다. 학생들이 앉아서 있으면 토론이 격렬해져도 반드시 서로에 대한 존중을 더 앞세우게 된다.
베라코트 63장 전반부를 보면, “토라공부는 혼자서 공부하지 말고 여러명이 그룹을 형성하여 같이 공부해야 제대로 배워진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한국적인 상황에서 ‘하브루타 프렉티스’가 형성되기는 쉽지 않다. 이 말은 한국에서는 ‘혼자 공부하는 것’이 매우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서는 나름대로 생겨난 교육전통이다. 같이 협력하여 무엇을 한다는 것에 대한 관념이나 이상이 약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브루타는 서로 상호적인 노력(interdependence)가 들어가야 한다. 하브루타는 그리하여 ‘협력 학습’이라는 이름이 붙어야 맞다. 하지만 협력 학습과 하브루타는 여럿이 학습한다는 측면에서는 유사하나 교육개념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은 있다.
유대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러한 협력학습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기에 평상
시에 쓰지 않아도 이들은 생활속에서 녹아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화’라고 불러도 좋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문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풍토나 분위기 climate'만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하브루타 학습은 ‘노스텔리지- 이상향’가 아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보조적이고 그저 대안적인 교육방식 중에 하나일 뿐이다. 이 방식은 그리 혁신적이거나 합리적인 방식도 아니다. ‘서로 떠들면서 두뇌를 격동시킨다’라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바로 일방적인 주입식 성경공부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생각과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준다는 면에서 자기주도적인 교육성과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하브루타 환경을 살펴보자. ‘둘이 모여서 토라나 탈무드를 가지고 시끄럽게 떠드는 학습’이 과연 합리적인가? 고민을 해야 한다. 만일 한국교회에서 여러 명의 학생들이 서로 짝을 지어서 떠들면서 신랄하게 성경을 가지고 떠든다고 한다면 그것은 ‘발라간 - 히브리어로 난장판’이 된다. 이러한 상황을 과연 수용할 수 있는가? 아마도 거의 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나 상태를 수용할 수 있는 환경은 한국에서는 도무지 조성하기 어렵다. ‘그저 조용한 하브루타 타임’만 가질 뿐이다.
원래 예시바에서 이루어지는 하브루타는 유대인들에게 규범(norm)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 하브루타는 예시바나 비예시바에서 ‘혁신 innovation'이 되어갔다. 다른 교육적인 방법들이 시들어가고 사라져가도 이 하브루타 방법은 여전히 강세를 보이게 되었다. 한국 땅까지 그 영향이 미쳤으니 하브루타는 강력하면서도 효과적인 학습의 툴이 된 것이다.
하브루타의 방법이 단순히 학습적 효과를 거두기 위한 방법에서 나중에는 인지적(cognitive), 정서적(affective), 그리고 심지어 사회적 유익(social benefits)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인지적 유익 cognitive benefits
전통적인 방식면에서 하브루타는 두 명의 학자가 서로를 날카롭게 한다는 측면이다.(탈무드 타니스 7장 전반부, 샤바트 63장 전반부) 두 개의 머리가 하나의 머리 보다 낫다는 것이다.(Two heads are better than one) 한 명의 학생이 또래 집단의 학생들을 이길 수는 없다. 개인은 팀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베이트 미드라쉬(배움의 집)의 공통적인 경험이 이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전 세계 어느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나 질문은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벅찬 질문들은 협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나 세상의 문제들은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상당히 많지만, 빠른 시장의 변화나 유행이나 트렌드의 속도에 맞추려면 반드시 ‘협력학습’을 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다. 변화하지 않으면 변화 당하는 것이 21세기 정치나 경제나 경영환경이다.
하브루타는 반드시 소리를 내어서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 주어진 텍스트나 학습내용에 대해서 계속적인 ‘긴장감’이나 ‘몰입감’을 유지해야 한다. 유대인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은 바로 ‘할라카나 아가다’라는 부분을 소리내서 읽는다. 이들이 소리를 내는 것은 바로 집중력과 관련이 있다. 소리를 내면 서로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탈무드중에 ‘한 사람에게 물고기를 하루 동안에 잡아주면 하루에 필요한 물고기는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물고기 잡는 법을 하루 동안에 가르쳐주면 그는 평생 동안 물고기를 얻을 수 있다’ 라고 한다. 토라나 탈무드를 가르치는 것은 마치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기’와 비슷하다. 어느 것이 더 힘든 것인가? 물고기 잡아 주는 것이 사실 어렵다. 선생의 역할이 계속해서 물고기 잡아 주는 역할이라면 이 역할은 정말 타성에 젖게 되고, 생산성이나 교육효과 면에서 낙후하게 된다.
한국은 21세기에 와서도 아직도 20세기의 방법으로 낙후된 교육방식을 지향하고 있다. 바로 ‘물고기를 잡아주는 교육법’의 한계에 갇혀 있다. 한국은 물고기를 잡아주는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을 이제는 해야 한다. 유대인 탈무드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먹고 살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도둑을만든다”라는 말이 있다.이것이 바로 ‘물고기를 잡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의 교육적 중요성’이 있어야 한다.
하브루타 스타일은 바로 학생을 선생으로, 선생을 학생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들어간다.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이 유대사회에서는 동일한 흐름으로 인식한다. 탈무드도 ‘가르치는 것이 배우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브루타 스타일은 바로 본질상 인지적(cognitive)이다. 아마도 한국에서도 하브루타 스타일은 가장 합리적인 학습스타일로 제시되어져야 한다. 그 이유중에 하나가 학급의 수가 줄어들고, 학생수가 줄어들면서 ‘개인과 개인’간의 교감을 주로 할 수 있는 학습 분위기를 이제는 더욱 크게 조성하고 격려해야 한다. 교실은 학생들간의 우정의 무대이면서 지적인 무대이다. 서로 우정과 지성을 갈고 닦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사의 책임이다. 그래서 앞으로 [인지과학적 입장]에서 하브루타가 더욱 권장되어야 한다.
정서적 유익(Affective Benefits)
베이트 미드라쉬(배움의 집)이나 스쿨에서 하브루타로 학습하는 것의 경험은 정서적 유익을 준다. 친한 친구끼리 대화하고 서로 교감하는 시간은 정서적 안정감과 더불어서 학습에 대한 의욕도 높여준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서로 정서적인 교감을 충분히 이루게 되면 서로 위로와 격려를 얻게 된다. 즉 마음이 관리되어야 외적인 학습의 효과도 덩달아 올라가게 된다.
창의성(creativity) 도 다른 하브루타 시스템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유대인들의 예시바(예시보트)에서는 자주 강조되는 가치가 있다. 바로 독립성, 비판적 사고, 창의성이다. 종교인 학교에서도 이러한 측면이 강조되는 것이 신기한 부분이다. 일반 학교에서도 똑같이 위의 3가지 측면의 교육적 가치를 부각시킨다.
유대인들은 토라 학습(토라 리쉬마)이 자신의 영혼을 위한 것이며, 이 학습을 통해서 지속적이고 발전적인 연쇄반응이 일어난다고 본다. 어렵고 복잡한 토라 학습을 통해서 다른 일반학문들에 대한 지적 습득이 상당히 수월해진다. 그래서 토라나 탈무드 학습은 이들에게 ‘수월성 교육’의 측면이다.
랍비 요셉 솔로베이치크는 말하기를 “토라 학습은 실제적이고 도전적이며 독창적인 사고를 생성시키는 중요한 기반이다” 라고 말했다.
일반 학문분야에서도 경제학, 물리학, 생화학, 법학, 의학, 철학, 심리학, 언어학 등 어렵고 복잡한 분야들이 많다. 하지만 하브루타 스타일로 다져진 학생들은 이러한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머리를 써서 살아라” 라는 탈무드의 격언을 말하지 않아도 서로간의 머리와 머리를 맞대로, 더 나은 솔루션(해법)을 찾아나가는 공부는 공부를 더 쉽고 재미있게 만드는 첩경이 되는 것이다. 하브루타는 ‘남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는 창의적인 능력’을 키우데 좋다는 것이다.
아울러 하브루타 스타일은 학습이해력이나 학습속도가 떨어지는 친구를 도와주는데도 유익하다.하브루타 스타일은 본질상 창의성의 유익도 주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한다는 측면에서 정서적인 유익을 준다. 예를 들어서 심리학이나 문학수업을 할 때 큰 소리로 읽는 것이 조용히 읽는 것보다 이해를 도와주고 기억을 더 잘 하게 해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우리는 조용히 공부하는 것이 학습 효과가 더 좋을 것이라는 ‘착각 아닌 착각’을 하면서 생활해왔다. 물론 공부는 조용히 해야 한다. 그것은 혼자 공부 할 때가 그렇다. 하지만 집단속에서 공부할 때는 함께 2인 1조가 되어, 다인 1조가 되어서 ‘어우러지는 공부’가 더욱 효과적이며, 서로 소리를 내어서 공부하는 것이 서로에게 공동의 이해를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 함께 학습한다는 것은 ‘참여하고 적극적 집중’을 유발하는데 있어서 좋다.
어느 교회에서 ‘통독성경’에 참여해 본적이 있는데 소리를 내서 읽으니 읽기 속도도 빨라졌고, 성경에 대한 이해도 2-3배높아진 결과를 얻었다.
소리를 내어서 읽고, 소리를 내어서 분석하고, 소리를 내어서 의견을 모으고, 소리를 내어서 토론하는 시간은 어려운 학습을 자신감 있게 바꾸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하브루타 스타일로 교실 분위기를 포맷하고, 교회학교 분위기를 포맷하면 영적, 정서적, 지적인 영향력을 골고루 미치게 되고 성장을 하게 한다.
사회적 유익(social benefits)
하브루타 스타일은 실제적인 사회적(사교적) 유익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준다.
하브루타는 “질서 있는 훈육 discipline of Order"이라고 부른다. 유대인들은 오전에는 성경이나 탈무드와 관련된 교육을 하고, 오후에는 한국처럼 일반과목들을 지도한다. 그런데 이 모든 지도에는 반드시 또래집단, 동기들의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브루타 스타일은 긍정적인 또래집단의 압력(peer pressure)을 격려한다. 긍정적인 또래집단의 압력이라는 것은 혼자서 공부하는 외골수적으로 공부하는 스타일에는 반발을 갖게 하지만 ‘혼자의 지혜보다 팀의 지혜’를 갖도록 조장하며, 서로 깨어있게 하고, 서로 역할수행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브루타 학습 스타일에는 ‘바탈라 - batalah - down time'이 있다. 이는 time-wasting 시간소비가 크게 일어난다. 이 말은 하브루타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라는 개념이다. 친한 친구끼리를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하여도 시간소비가 아깝지가 않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식 사고로 전환하여 생각해보자. 앞에서 ‘물고기를 잡는 법’이라는 것을 가르쳐 줄 때, 학생들은 바로 물고기를 잡을 수는 없다. 물고기를 잡으려고 한다면 시간을 소비해야 한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잡힐 때까지 많은 시간이 할애된다. 이것을 유대인들은 ‘생산적 바탈라 productive batala' 라고 부른다. 밥이 맛있으려면 ‘뜸을 들이는 시간’이 필요하듯이, 학습에서도 ‘뜸을 들이는 시간 - 바탈라’가 없으면 안된다.
하브루타 타임의 대부분의 시간들은 상당히 ‘시간 소비적’인 면이 강하다. 하지만 이런 ‘시간 소비적’인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브루타 석세스(성공)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브루타가 한 순간에 삶을 바꾸고,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생산적인 바탈라’의 과정이 없이는 하브루타 석세스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브루타 스타일은 반드시 첫번째로 ‘왜 why?'라는 질문이 들어간다. 또한 역사적인 측면, 인지적인 측면, 그리고 영적인 측면까지 들어간다. 두 번째로 하브루타 스타일은 반드시 '어떻게 How'라는 질문이 들어간다. 이는 ‘하브로트(동기, 학우)에게 배우는 시간’이 들어간다. 앞서 하브루타가 시간 소비적인 행위라고 하였는데, 바로 동기에게서 배우는 시간을 통해서 자신의 배움이 좋아지게 하기 위한 시간 소비가 되는 것이다. 그러데 이 시간 소비가 결국 투자(investment)로 이어진다. 그래서 필자는 하브루타 스타일 외에 다른 좋은 학습성취도를 높이는 방법이 있다면 제시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교육적 모델로서의 협력적 학습(cooperative learning as an Educational Model)
협력적 학습 이론은 1949년 ‘모턴 듀치’라는 교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의 이론은 21세기에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협력적인 교실은 그들의 또래집단을 중요하고 가치있는 학습의 원천들로서 인식한다” 라고 말했다.
몇 가지 협력적 학습의 경험들은 나중에 시스템적으로 구성이 되어졌다. 비록 선생들의 역할은 축소가 되었지만 학생들의 역할은 확대되게 되었다.
협력적 학습은 KWL이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K는 What I know about something? 무엇인가를 ‘아는 가’ 라는 측면이다. 그리고 W는 What I would like to learn about something? 이다. 이는 내가 무엇인가로부터 배우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이다. 또한 L은 What I have learned about something? 이다. 이는 내가 무엇인가로부터 배운 것은 무엇인가? 이다.
안다 - 배우고 싶다 - 배웠다. 라는 측면에서 3그룹으로 나누어서 협력 학습을 하게 한다. 그리고 3 그룹으로 나누어서 서로 나눈 것을 피드백을 한다. 그리하여 교사는 각각의 그룹에서 가장 설득적인 논쟁(토론)이 일어난 것을 선정한다. 이런 구조는 학생들이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급우들과 나누며 서로의 역할에 충실하게 만드는 효과를 갖게 한다. 이러한 학습을 - ‘컨텐츠 기반 학습’ 이라고 부른다.
협력적 학습은 사회적 스킬을 기르는데 다른 방식들도 동원한다. 이 방법은 ‘조용한 목소리’로 의견을 제시하며, 서로 ‘격려의 말들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지나친 논쟁의 과열은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싸움도 일어나게 한다. 또한 차트(charts)를 이용하여서 비주얼(시각적)한 측면도 부각시키고, 서로의 생각을 들음(listening)으로서 자신의 생각과 비교하기도 한다. 협력 학습은 하브루타 러닝과는 비교될 수 있지만 둘 다 학생들이 소수 그룹속에서 독립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공통적이다.
유대인 교육에서 하브루타 스타일로 해야 하는 나이는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협력 학습은 어릴 수록 좋다고 한다. 하지만 하브루타는 앞서 말했듯이 독서와 사색의 기반이 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들다. 적어도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하브루타 스타일로 학습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두 가지 방법을 혼용하여 해보는 것도 좋다.하브루타가 둘씩 짝을 지어서 ‘나와 너’의 방식으로 하는 것이라면 협력적 학습은 둘 이상 적어도 5명의 맴버들이 모여서 학습하는 형태이다. 하브루타가 각 개인에 포커스를 맞춘다면, 협력적 학습은 교실 전체의 환경을 통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교실은 ‘협력적 학습 - 한국에서는 모둠 학습이라고부른다.’이 ‘하브루타 스타일’보다 많은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5가지를 살펴보자.
1. 학생들은 공통의 과제나 학습활동에 함께 참여하여 역할을 분담하여 수행한다.
2. 학생들은 적어도 2명부터 5명까지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3. 학생들은 공통의 과제나 학습활동을 수행할 때 협력적이고, 친사회적인 행동으로 감당해야 한다.
4. 학생들은 긍정적으로 상호의존적이 되어야 하며, 공통의 과제나 학습활동을 수행할 때 서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5. 학생들은 개별적으로 공통의 과제나 학습활동에 있어서 역할에 충실해야 하고 그리고 책임감있게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기준으로 협력적 학습은 이루어진다.
하브루타와 협력적 학습은 유사하기는 하지만 구조적으로는 동일하지는 않다. 협력적 학습이나 하브루타는 비교적 고학년 위주로 이루어지는 것이 적절하다.
고등학교 졸업자들의 경우 이미 많은 사회적 기술들을 협력 학습을 통해서 얻었다. 가령 다른 친구들의 말이나 의견을 들어주는 것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다른 친구들을 고무시키고, 사람이 아닌 아이디어를 비판할 수 있는 능력도 갖게 된다.
협력적 학습이나 하브루타의 장점은 바로 시간 소비적인 특성이 있지만, 그 시간 안에 중요한 과업을 성취하는 것에 있다. 일정한 바탈라(시간소비)가 필요하지만 그 바탈라가 없이는 하브루타의 시간이 궁극적으로 구조화될 수 없다.
학생들에게 어떤 지식과 이해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생각하기를 가르치는 것의 중요성은 날로 날로 커지고 있다. 질문을 던져보고 그리고 과제를 부여하는 것은 생각하는 기술을 향상시켜준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더 나은 사상가들(생각하는 사람 thinkers)이 되고, 학습자들(learners)이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다른 학생들이나 사람들의 말을 충분히 들어주는 것은 본인 스스로의 생각하는 기술을 더욱 날카롭게 한다.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 또는 견해를 비교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평가하고 비교하면서 발전한다.
결국 하브루타는 ‘말의 힘’을 강조한다.
그래서 탈무드의 랍비 야파 엡스타인은 ‘하브루타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우정(지적 친교)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이다.(Havruta o Mituta)
고대부터 현대까지 수많은 역사 동안에 학습은 조용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유대인 사회에서 학습은 엄청난 ‘스피킹 볼륨 speaking volumes'을 자랑하였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의 텍스트들(책들)은 말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 집단에서는 조용한 것보다 시끄러우면서, 그러면서 말하기와 대화위주의 학습이 2-3000년이 넘도록 이어진 것이다. 말로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말로 회복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우리의 대부분의 삶의 모습은 말하고 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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