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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브루타와 코칭 & 멘토링

아주 가끔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라

by 코리안랍비 2022.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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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끔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라

- 하브루타의 본질을 찾아서

대답할 수 있는 질문과 대답할 수 없는 질문중 어느 질문이 중요할까?
구글출처 이미지 / 한국일보 기사중에서

<무단전재 절대금지>

대답할 수 없는 질문

 

하브루타를 약 10여년간 연구를 하다 보니 '하브루타' 라는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성경공부나 탈무드공부 방법론'이 너무나 변질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브루타는 상당히 영적이고 신학적인 것이며, 종교적인 영역에 속한 '거룩한 방법론'이라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질문'이 제일 중요한 것이고,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토론과 답변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질문에 대한 연구를 하다보면, 질문의 종류나 양상도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질문연구를 계속하였던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내린 질문에 대한 것은 의외로 간단하였습니다.

 

바로 답 있는 질문과 답 없는 질문으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답 있는 질문은 누구나 풀 수 있는 질문이지만, 답이 없는 질문은 누구나 풀 수 없고, 그 답을 찾는 과정은 상당히 길고 오래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 자체가 보상이 되는 질문입니다.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맞출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런 질문은 아무리 많이 하여도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은 ‘시간낭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는 것은 지극히 차원이 다른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은 상당히 종교적이거나 신학적입니다. 그리고 영적이거나 영감적인 것입니다. 인공지능이나 다른 어떤 기계문명이 맞출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감수성이나 동심원상을 넘어서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종교 religion'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들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구한말에는 교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서양 사회에서 전래된 기독교가 한국에 자리를 잡기 까지는 1세기 이상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많은 박해와 핍박, 탄압과 배척을 거쳐서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 정착하였고, 한국인들의 삶의 주변을 차지하는 거대 종교요 거대 가치관으로 자리를 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불교도 그런 시간을 거쳐서 한국 사회에 정착하게 되었고 오늘날 이렇게 흘러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종교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세뇌시키는 작용도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인도에 가보면 힌두교가 있는데 이 힌두교는 자신들의 종교만이 세상에서 유일하고 제대로 된 진짜 종교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많은 인도에서 태어난 이들은 힌두교를 따릅니다. 하지만 인도 밖에서 보면 힌두교는 모든 것에 신이 깃들여 있다는 ‘허위사상’이 강합니다. 그리고 과학과도 거리가 멀고, 소위 말하는 ‘진리’와도 거리가 멉니다. 심지어는 ‘철학’과도 거리가 멉니다.

 

이와 같이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교,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종교를 발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정한 종교인’이라는 것은 종교가 가지는 본질과 사상에 충실하고 충만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보면 ‘천국은 어디에 있을까요?’ 라는 질문에 대해서 애매모호하면서 확실한 답을 줍니다. “천국은 내 마음속에 있느니라” 이 말 속에서 나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답답한 기운이 솟구칩니다. 하지만 진정해 보면 ‘천국도 내가 만드는 것이고, 지옥도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얼마나 알까요?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면서 자신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밝혔습니다. 이런 언명은 누구에게는 적용되어 어떤 사람이든 자신을 아는 것에서부터 인생의 귀한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학과 심리학’을 공부할 때, 진정한 종교는 자신에게 ‘신앙’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는 체험을 요구합니다. 체험하면 알게 되는 것이 종교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체험을 하게 되면 의심을 멀리하게 되고, 의심을 도리어 날카롭게 갈아서 끝까지 신앙세계를 탐험하고 탐구하게 만듭니다.

 

가령 기도에 대한 응답이 있다면 이는 곧 체험입니다. 신적 체험을 하게 되면 그의 마음속에 ‘의심의 구름’이 거치고 광명이 돋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슬람의 창시자는 마호메트입니다. 그의 진리는 그의 진리일 뿐입니다. 그가 밝힌 진리는 나의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마구 주어지는 선물과 다릅니다. 진정한 종교심이 있다면 그 진리를 찾아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자아의 회복을 찾아서’ 라는 [연금술사]에서 사용을 합니다. 자신을 찾는 것이 곧 진리를 찾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기독교인이 된 것은 ‘진리를 찾아가는 여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찾아 나서는 여행이란 마치 이 지상에서 천상으로 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교리문답서’입니다. 이 교리문답서가 가장 잘 되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교리문답서를 보다가 ‘답변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너무나 많이 달아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교리문답서에 대한 의심이나 비판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저 ‘아멘 아멘’ 하면서 받아들이는 맹신(盲信)이 강합니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을 보면 이런 ‘맹신’의 역사가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을 말합니다. 맹목적인 신앙은 사실 진짜 신앙이 아니고, 그저 감수성일 뿐입니다.

 

신앙도 의심을 통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사유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삶은 신비이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종교는 상당히 ‘신비주의적’입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있을 때에만 삶은 신비로울 수 있습니다. 내가 기독교인이 된 것도 단순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어서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성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신비’함으로 인하여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관념속에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실재로 살아 역사하며 말씀하시는 신의 임재(presence)를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질문들이 가져오는 유익을 잘 압니다.

하지만 신앙과 믿음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기보다는 현명한 답을 찾기 위한 ‘여정과 과정’을 중시여깁니다.

 

어떤 대답하기 어렵고 힘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주어져 있다면 그것은 질문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대답을 한다면 그 질문은 곧 죽어버립니다.

 

 

질문의 죽음!

 

그것은 나에게 지적인 탐구나, 신앙적인 탐구마저 끝나는 것을 암시합니다. 대답이 바로 주어진다면 그것은 지속적인 신앙과 종교에 대한 열망을 죽여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소위 ‘재미없는 종교’로 인식하게 됩니다. 대답을 찾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바로 질문이 사라지거나 죽는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나 신앙은 모든 대답과 권위에 대한 것을 내려 놓고 도리어 진정한 의문과 탐구를 끄집어내 보는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나 신앙은 지도에도 나오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것은 자칫 니체가 말한 대로, ‘위험한 여행’입니다.

 

많은 종교들의 특징은 우리 자신에게 무사안일(無事安逸)한 한 삶, 편안하고 안락한 삶의 방식을 제공해 왔습니다. ‘마음의 평화’라는 미명아래 종교에 의탁하고 의존하면 ‘평화’가 주어질 것이라는 맹목이 강하였습니다.

 

과학과 종교의 차이는 과학은 실재에 접근하는 방식을 취하고, 종교는 허구에 접근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과학과 만나서 종교적인 정당성을 이성적으로 확보하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을 보십시오. 그는 과학자이면서 ‘물질의 세계’에 대해서 깊숙이 파고들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마치 신비주의자 같이 자신의 과학사상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아인슈타인을 기억하고 칭송하는 것입니다. 그는 과학과 종교를 둘 다 아우를 수 있는 ‘직관과 영감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영감추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물리의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탐구가 필요합니다.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넓은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더 풍족하고 안락하게 가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더 연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경제적인 기반으로 건강까지도 더 낫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삶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삶은 그 자체로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세도 모르면서 내세를 알려고 합니다. 백년도 못살면서 천년의 기세로 살아갑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사람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존재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숨을 쉬고 그저 흘러가는데로 세월을 지내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사유하지 않는 인생, 성찰하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한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앵무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단 한 시간을 교리를 외우면서 마치 전체 기독교의 교리를 다 아는 사람처럼 돼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리를 외운다고 해서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을 파악하지는 못합니다. 기독교적 가치관은 그것을 행함으로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대해서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는 겸손합니다. 순수합니다. 맑고 건강합니다. 어린 아이가 그러한 모습을 가진 것은 ‘지식’으로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감성과 영성을 겸비하였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지식이 신앙과 종교의 본질을 외면하게 만듭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진정한 교인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가 되라는 것은 곧 다시 질문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궁금하여 못 견디고, 의심스러워 못 견디고, 알고 싶어 못 견디는 그런 순진무구한 무지의 상태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이 솟구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늘을 위한 질문, 신을 위한 질문, 자신의 거듭남을 위한 질문을 던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탐구열이 다시 불 붙고, 식물인간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천로역정에 나오는 ‘크리스찬 - 기독도’처럼 미지의 탐험이 될 것이고, 모험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비로운 향기를 내뿜게 될 것입니다.

 

많은 종교의 잘못이 우리 인간을 모조 인간이나 플라스틱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로봇과 비슷합니다. 인간지능속에 인공지능을 심은 것과 비슷합니다.

오랫동안 성경을 연구하고, 탈무드를 연구하고, 각종 종교서를 연구하면서 느낀 것은 결코 그러한 책들이나 사상들이 내게 완벽한 ‘율법’을 제공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계율은 자신이 깨어 있는 의식을 통해서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발견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의 나됨을 발견하는 것, 자기 이해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나 자신으로 남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각성된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나 자신을 알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나 스스로를 더욱 아는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행복은 거기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만약 에덴동산 안에만 있었다면 이들은 그저 자신들을 모르는 사람들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섭리(攝理)가운데 에덴 동산을 나와서 자신들의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이들의 인생 후반전은 달라졌습니다.

 

 

하브루타에서 가장 중요한 방법론은 ‘파르데스’입니다. 파데스는 페샤트, 레메즈, 드라쉬, 그리고 소드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소드 - 신비’입니다. 처음부터 하브루타는 ‘신비’에 대한 탐색과 탐구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도 ‘신비’로 마칩니다. 그래서 대답이 없는 질문이 많습니다. 대답이 없다고 해서 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질문에 대한 답은 곧 내 속에서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베르 - 친구와의 대화와 토론 속에서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자연과의 만남을 통해서도 찾아내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는 자신과 신과의 만남을 통해서 찾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과 종교의 본질이 ‘자아의 여행, 자아의 회복’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신비주의’에 대한 탐색과 탐구를 통해서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해 나갈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인간 그 미지의 존재여” 라고 하였습니다.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곧 ‘인간이해’ 입니다. 인간이해가 이루어지면 그 인간을 지으신 신의 존재에 대한 각성으로 이어집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아주 가끔은 던져야 합니다. 평상시에는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졌어도 아주 가끔은 ‘대답할 수 없는 근원적 질문’을 던짐으로서 우리는 ‘현실과 신비’를 오가는 존재로 남게 됩니다.

 

나이가 들면서 세상에 보이는 학문이나 가치를 따르던 데서 이제는 보이지 않으면서 있는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을 더욱 추구하게 됩니다. 영적이고 신학적인 것이 나의 삶을 어느새 에워싸고 있습니다.

 

20세기 경영학을 만든 구루 ‘피터 드럭커’는 “21세기는 영감적이고 신학적인 것이 지배하는 시대가 된다”라고 천명했습니다. 이 말은 보이는 물질과 과학이 인간의 삶을 지배할 것 같지만 인간은 이러한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 실용주의자들로만 전락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뛰어난 영감과 신학적인 통찰력, 창조력과 상상력이 높은 사람, 예술성이 높은 사람들이 더욱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깁니다.

그런데 인생과 예술을 같이 묶으면 ‘인생예술’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아티스트가 되고, 나 자신이 누군인지를 지속적으로 탐색하는 겸손함을 더욱 가져야 합니다. 성서와 탈무드를 맹목적으로 보는 눈은 거두고, 눈을 안으로 떠서 더 크고, 높고, 깊은 진리의 세계 속으로 더욱 나아가야 합니다.

 

곧 인생은 여행입니다. 영적이고 신학적인 여행입니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어떤 존경하는 분의 ‘소천소식 - 부고(訃告)’를 들었습니다. 그 분은 회의를 하다가 갑자기 심장마비(심정지)로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젊어서는 프랑스에서 유학을 한 석학으로, 교수자로 살았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봉사하며 섬기는 분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내 삶의 한 ‘스승’으로 자리를 잡으신 분이셨습니다. 그 분의 삶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삶’이라는 것이 뭐 길래, 우리는 이것에도 답변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무지한 자요, 유약한 자입니다. 인간은 흙입니다. 그런데 이 흙속에 진주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진 마음 속에 진주를 캐고, 그 진주를 밝게 빛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질문을 허락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설사 정답이 없어 보이지만 그러나 그 ‘질문하는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경건에 휩싸이며, 더욱더 나은 사람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질문이 없으면 ‘통찰력 insight'도 없습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우리는 겸손하고 온유함으로 대답하려고 준비하는 것에서 ’인생 예술‘은 피어납니다.

 

거리에 핀 장미를 보면서 우리는 ‘장미는 그저 장미다’ 라는 여기지 말고, 장미에게서 ‘향기’를 찾을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장미 꽃에도 가시가 있다’라고 여기지 말고, 시인의 눈으로, 예술가의 눈으로 ‘가시 많은 장미에도 꽃이 피었네’ 라고 볼 수 있는 그런 영감적인 눈과 시야를 갖기를 바래봅니다. 논리의 세상은 피곤하고 지칩니다. 하지만 신비의 세상은 밝고 희망찹니다.

 

내 손에 신비를 두고, 은혜를 두고, 통찰력을 두고 살아가는 기쁨을 더욱 알아가길 소망합니다. 대답 없는 질문도 질문입니다. 그것도 아주 근본적이면서 절대적인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여행과 탐색을 해 나가는 ‘진리추구자, 영적 여행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결국 '하브루타'입니다. 결국 '공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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