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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강연 이야기

인문산책,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을 읊조리다.

by 코리안랍비 2022.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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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늦가을이 되고,
찬바람이 불면 생각나는 시인이 있다.
바로 [목마와 숙녀]라는 시로 유명한 박인환 시인이다.
오늘은 정끝별 교수가 신문에 연재한 이 시를
다시 이 지면에 옮겨 놓는다.


세월이 가면
- 박인환(1926~1956)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예옥, 2006>



-사라졌지만 잊지 못하는 것, 갔지만 남는 것, 사람이고 사랑이다, 기억이고 세월이다. 전쟁 직후 대폿집에서 첫사랑을 떠올리며 '명동 백작' 박인환이 일필휘지로 쓴 시에 이진섭이 곡을 붙이고 임만석이 노래로 불렀다는 전설적 가을 명품이다. 이 시를 남기고 며칠 지나 숙취의 심장마비로 시인은 우리 곁을 떠났다.
시인도, 첫사랑도, 친구도, 전쟁도, 명 동 거리도 다 사라졌지만 시와 노래는 '명동 엘레지'로 우리 가슴에 남았다. 꽃 필 때는 피는 꽃처럼 오고 잎 질 때는 지는 잎처럼 가는, '그 눈동자와 입술'은 오래된 미래다. 미래의 옛날이다.나뭇잎이 떨어져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사라진다 해도 여름이어서 빛났고 가을이어서 서늘했다. 이 서늘한 가슴에 살아남는, 사랑보다 세월, 세월보다 기억!


부연설명하면, 이 시는 1956년에 지어졌다. 당시 명동에 있던 '동방살롱' 맞은편에 있는 빈대떡 집에서 박인환 시인은 지인들과 술 한잔을 하면서 즉석에서 이 시를 짓고, 함께 있던 이진섭님이 곡을 붙였고, 임만섭님이 그 자리에서 처음 불렀다. . 노래가 전하는 메시지가 쓸쓸하면서 서정적인 가사로 빈대떡 집에 있던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전했다고 한다.
죽석으로 지은 시이고, 즉석으로 부른 노래지만 그 당시 지인들이 풍류를 아는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인희 가수가 취입하여 불렀다. 이 글을 읽고 당장 들어보면 좋을 것 같다.

나에게 가장 멋진 대목은,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다

강원도 인제군 상동리에는 그의 문학관이 있고,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에도 나오듯이,
문학관은 마치 명동에 온 것 같이 꾸며져 있다.
기회가 되면 들려도 좋으리라...

그의 목마와 숙녀도 참 좋다.

木馬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木馬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출처] '木馬와 숙녀' '세월이 가면' 박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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