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놉티콘 PANOPTICON
그리고 시놉티콘 SYNOPTICON
우리가 인문학을 해야 할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일단 칼 마르크스는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40전에는 이공학적으로 살고, 40이후에는 인문학적으로 살아라"
40이후에 이공학을 하려면 정말 머리와 몸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40이후에는 지혜와 혜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인문고전을 탐독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나 자신도 인문고전을 제대로 읽기 시작한 것은
불혹의 나이인 40 이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 읽는 책마다 읽혀지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교 1-2학년때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냥 읽은 것 같습니다. 철학서라서 그런지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마치 캡사이신 같은 휘발성 물질이 나와서, 금새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후 몇번을 읽으려고 하여도 정말 내용이 금새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40이후에 읽으니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됩니다. 사실 이 책은 칸트가 40대 초반에 쓴 책이라고 하니, 칸트의 지성수준이나 천재성이 얼마나 대단하지 알 것 같습니다.
이제는 어느 책을 읽어도 읽혀지는 기쁨이 있습니다.
인문학을 읽게 되면, 나 자신을 발견하고, 시대를 발견하고,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고, 사회문제를 발견하고, 곧 지평이 넓어지고, 관점이 넓어지면, 세계관이 넓어집니다. 초장이 길었습니다.
오늘은 특이한 제목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시쳇말로, 듣보잡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날날의 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회철학적 개념입니다. 조지 오웰, 미셀 푸코, 김용규 박사와 홍성욱 교수의 책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공리주자인 제러미 밴담이 만든 [파놉티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말은 [감옥시설] 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에 시놉티콘을 말하렵니다.)
파놉티콘은 원형으로 된 거대한 감옥인데, 바깥으로는 죄수들을 가두는 방이 있고, 중앙에 죄소들을 감시하는 원형의 감시탑이 있습니다.
죄수들의 방은 항시 밝게 되어 있어서 간수들이 죄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앙감시탑은 어두워서 간수를 볼 수도 없고, 간수가 자신을 감시하는지도 모릅니다. 밴덤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파놉티콘의 핵심구조입니다.
그런데 이런 파놉티콘에 대한 개념을 조지오웰이라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인용합니다. 바로 <<1984>> 라는 작품에서 말입니다.
"지상경찰이 한 개인에 대한 감시를 어떤 개통으로,
또 얼마나 자주 행하는지는 그저 측정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을 언제나 감시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입 박에 소리를 모두 들리고 캄캄한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모든 동작이 감시받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야 하고, 또 그것이 본능처럼 습관화되어 버렸다. "
미셀 푸코는 1975년에 자신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오웰의 습관화나 규율권력의 내면화를 말해줍니다. 오웰의 시대에서 푸코의 시대는 엄연히 다릅니다.,그러나 그 연장선은 동일합니다. 산업혁명기에는 감옥이 감시와 처벌의 장소였지만, 그 이후에는 사람의 육신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감시와 처벌의 대상으로 변한다. 영혼을 괴롭히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이제는 파놉티콘이 단지 감옥만 아니라, 군대, 병원, 공장, 학교, 심지어 가정까지 똑같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라는 말까지 등장시킵니다. 이 말은 자신의 침대보다 다리가 길면 다리를 잘라 죽인다는 신화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니면 침대보다 짧으면 다리를 늘려서 죽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는 지극히 제도권사회라고 부릅니다. 제도권 사회는 모든 것이 규격과 규율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사람도 제조되어지는 과정을 거친다고 봅니다. 푸코는 거의 200년이 지나서야 밴덤이 파놉티콘을 살립니다.
푸코의 개념으로 본다면, 감옥이라는 것이 이전에는 육체적인 처벌이나 고통이 주류였다면, 이제는 현대의 감옥개념이 바로 영혼에 대한 규율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홍성욱 교수)
시간이 되면 조지 오웰의 <<1984>>나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도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인문학이라는 것은 고전과 현대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습니다. 나와 인간에 대한 이해, 나와 사회에 대한 이해, 나와 국가에 대한 이해, 나와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혀줍니다. 수많은 위인들이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높은 수준의 학문과 지성을 쌓은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됩니다. 흉내내고 모방하면 가능합니다.
다음으로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그의 저서 <<통제사회에 대하여>> 쓰면서 이제는 컴퓨터와 기계가 지배하고, 숫자와 코드가 통제하는 사회가 되었음을 밝힌다. 슈퍼 컴퓨터가 인간생활의 상당수를 통제하고 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은 아닐지라도 상당한 양의 개인정보를 국가의 컴퓨터속에 담아 놓고 있다. 그리고 자본이라는 논리로 사람을 얽어매고 있다. 지금이 오히려 더 철저하게 감시.통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언론에 의한 감시까지 받고 있다.
이러한 언론에 의한 감시를 '시놉티콘 SYNOPTICON' 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노르웨이의 토마스 메티슨이라는 학자가 [소수가 다수를 감시하는 파놉티콘이 근대 사회의 감시의 원리로 자리잡았던 19세기 동안 다수가 소수의 권력자를 감시할 있는 언론과 통신기술이 발달했다고 주장하면서, 다수가 소수를 감시하는 언론의 발달을 시놉티콘이라고 부르는데서 연유하였습니다.
사실 여론이나 언론의 감시가 이제는 권력자와 대중이 동시에 서로를 감시하는 시스템입니다. 이를 조지 오웰은 "빅브라더가 지켜보고 있다" 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제는 감시의 시선에서 정보와 기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요즘 공공기관이나 금융기관의 어디를 가도, 나 자신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실이나 나도 모르는 것들을 정말 많이 자료화하고 문서화하여 보관하며, 이를 통제나 관리의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실제 우리는 통제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통제나 관리코드에 어긋나면 우리는 처벌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미 길들여져 가는 것입니다.
언론을 보면 권력자가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가공하여 선전하고 심지어 여론을 조작하기 위한 도구로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국민들의 감시를 국가나 지도자들이 받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를 [역감시]라고 합니다. 이는 권력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래서 언론을 제 5의 권력이라고 부릅니다.
여론이나 언론의 힘이 막강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시놉티콘의 시대가 확실히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여론이나 언론의 그물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표준화된 윤리성, 국제수준의 윤리성이 더욱 요구됩니다.
그러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도 상당수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프라이버시도 주장하기 힘든 사회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개인의 신상과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공개나 드러남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방송과 신문만 아니라, sns,cctv, 시큐리티 서비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유투브, 카톡들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심지어 성서는 하늘나라에 생명책에 우리를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통제속에서 살다가, 통제속으로 죽습니다. 죽음까지도 통제하는 통제사회의 전능성이 이제는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아는 상당히 불안정합니다. 다만 스스로 삼가서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근신하면서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을 지키고 성숙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펠리시아 램포트 Felicia Lamport의 시중에
<<사생활박탈 Deprivacy>>가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아무 기록도 없는 빈 칸처럼
알려지지 않았고 무시받는다고 느낄지라도
용기를 내라 !
우리의 중대한 자아는
거대한 데이터 뱅크에 보관되고 있으니
우리의 유년시절과 성년시절은
효율적으로 편집되고
우리의 저축과 보증은
모두 영원히 파일화되며
일반적이고 특별한
우리의 취향과 성향,
수입과 정규 활동 과외 활동 모두
이것이 우리의 행복한 상태일지니
우리가 죽을 날까지
하늘에 있는 거대한 컴퓨터에 의해
우리가 낚아채져서 죽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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