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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강연 이야기

강연, 낙심(落心), 낙담(落膽), 우울(憂鬱) 그리고 재도약을 위하여

by 코리안랍비 2022.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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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심(落心), 낙담(落膽), 우울(憂鬱) 그리고 재도약 - 희망은 좋은 것이다.

랍비  2건  42회 21-12-08 23:21

#탈무드 인문학 연구
  • 구글출처 이미지 - 날마다 좋은 날 캘리그라피



낙심(落心), 낙담(落膽), 우울(憂鬱) 그리고 재도약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지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 갈라디아서 6장 9절 -


오늘은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다른 글들은
솔직히 허공에 주먹 휘두르기와 같지요
물론 이 글을 통해서 나 자신도 용기와 희망을 덧입습니다.

희망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희망은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절망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희망을 향하여 가다보면 반드시 희망은 우리를 기다리고 만나주는 것으로 압니다.


용인 에버랜드에 가보면 TX라고 불리우는 롤러코스터가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약 20번 정도 타보았습니다.
입시학원과 교육연구소의 원장이어서 학생들과 같이 다니다보니 그렇게 탔습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오르내리는 그 롤러코스터는 가장 인기가 많은 코스입니다.
사람들은 왜 그 롤러코스터를 타려고 할까요? 그 심리를 가만히 살펴보았습니다.
그 심리는 평상시 사람들이 모험이나 짜릿한 경험을 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잠시 롤러코스터에 자신을 맡기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나름대로 유쾌한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현실로 가져오면 달라집니다.

우리의 현실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시소’에 비유를 하거나 ‘오르막길이나 내리막길’에 비유를 하지만이 비유는 상당히 현대에 와서는 약한 비유입니다. 이것보다는 시소도 되고, 오르막 길이나 내리막길도 되고, 항해(sailing)도 되는 그런 정도의 삶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이를 그냥 ‘롤러코스터’에 비유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리 유쾌하거나 쾌감을 느낄 정도의 카타르시스는 없는 롤러코스터이기에 문제가 됩니다.

우리의 현실은 결코 녹녹치가 않습니다. 그런데 녹녹치 않은 상황에서도 우리의 삶은 계속됩니다. (Life goes on) 그런데 요즘 코비드 19(COVID)으로 인해서인지, 아니면 전체적인 분위기에 젖은 모양인지 낙심(落心)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와 중에 억울하고 힘든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늘어났습니다. 롤러코스터같이 좌충우돌하면서 바쁘고 분주한 세상에서 사람들의 억울함과 한 맺힘의 원성이 여기저기서 솟구치고 있습니다. 연일 우리가 듣는 소식은 너무나 어둡고 불안합니다. 차라리 뉴스를 보는 것을 피하고 싶습니다. 

 


청와대에는 국민청원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하루에도 수십 건이 올라온다고 합니다. 말도 안되는 청원도 있지만, 대부분의 청원들이 다 하소연하거나 어필하는 청원들입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일들이나 송사들이 너무나 많다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제도는 참으로 좋습니다. 억울하고 한 맺힌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국민을 위한 안심되는 제도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국민청원도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그 아래에는 청원이 먹히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억울하고 낙심되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낙심된 사람들은 결국 우울함과 정신적인 고통으로 인하여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더 힘든 상황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런 안타까운 순간이 오지를 않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문제 때문에 남의 문제에 대해서 경청하고 들어줄 입장이 아닙니다. 필자는 그것을 너무나 일찍 깨달아서 일단 기도의 자리로 갑니다. 그래도 의지하고 바랄 신앙의 대상이 있다는 것에서 항시 위안과 평안을 얻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입장에서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상담자로서 나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럴 때 상담을 하면서 “사람에게서 문제해결점을 찾는 것도 좋지만, 그 문제를 들고서 믿음의 자리, 기도의 자리로 가보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분이 신앙을 가지고 있던 없던 간에 ‘Help Me'라는 말이라도 하면 그것이 바로 기도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겉으로 못하면 속으로라도 기도를 해줍니다. 기도는 바램이기에, 우주의 기운이 오든, 무엇인가 행운이 오든, 직접 신의 도움을 받든 기도는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성서와 탈무드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낙심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낙심케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낙심한 사람들 중에는 아주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들은 비교적 낙심이 적습니다. 다만 본인 스스로 내몰려 살기에 이 또한 엉터리의 라이프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살아도 그런 사람들을 낙심케 하는 무리나 세력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우리가 낙심이나 낙담케 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평생을 낙심이나 낙담하지 않고 살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낙심하기 쉽기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힘 내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정신을 챙기십시오” 라는 소리가 때로는 그립고 반가울 때가 있습니다. “행복하십시오. 기뻐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라는 소리가 때로는 절실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요, 요즘입니다.

성서나 탈무드를 보면 ‘낙심하지 말라’ 라는 대목이 무수하게 등장합니다.
성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대목이 ‘두려워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낙심하지 말라’입니다. 무려 365번이나 나옵니다.

이런 대목이 왜 이리 많을까요? 그 이유는 낙심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낙심케 하는 나쁜 무리들이나 세력들이 많아서입니다. 물론 본인이 무엇인가 대단한 일이나 사업을 하다가 낙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은 본인의 실패로 인한 낙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억울하게 당하여 낙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낙심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국회에는 수많은 법들이 상정이 됩니다. 그런데 그 많은 법들이 통과되는데는 많은 시간과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회적으로 억울하고 힘든 사람들은 낙심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불이익과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바라면서 좋은 법들과 판결이 나와서 자신들의 억울함과 낙담함을 풀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제대로 풀리는 것은 결국 5%도 되지 않는다고 하니 국회의원들의 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이 국회의원들이 있는 곳이 입법부인데, 이 입법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원성과 야유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민식이법이 있는데 바로 내 앞집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잃은 그 후배 아빠를 보면서 ‘하늘에 있는 아들이 마지막 선물을 주고 갔네’라면서 같이 위로하고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시는 어린 아이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없도록 만든 것, 그러나 이 법이 다른 이들에게는 불편하지만 안전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일깨웠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후회하고 절망합니다. “사람이 지혜에 처하나 매우 어리석다”라는 현인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낙심해보면 낙심한 자의 모습을 이해합니다. 과부사정 과부가 이해하는 격으로, 우리는 낙심한 사람들에게서 가져야 할 정신은 바로 마음에 그래도 남아 있는 ‘근성’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낙심이 될 때 포기하지 않고 리바운드를 할 여지는 바로 ‘뿌리의식’입니다.

성서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한맺힌 과부’가 나옵니다. 그 과부는 아마 아들을 잃은 것 같습니다. 아들을 잃었는데 병들거나 사고가 나서 정당하게 잃은 것이 아니라 아마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나쁜 자들의 소행으로 인하여서 목숨을 잃은 것 같습니다. 그 과부가 된 사람은 그 지역의 재판관을 찾아갔으나 아무리 탄원을 하여도 그 불의한 재판관은 청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이라는 것은 공평한 재판을 하고, 제대로 판결을 내려야 하는데 아마도 가진 자들이나 권력 있는 자들에게 빌붙어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의 탄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과부는 재판관의 집에 가서 자주 ‘나의 원한을 풀어 주시오’라며 한 맺힌 부르짖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자 불의한 재판관도 두손 두발을 들고 그 과부의 한맺힌 간청을 들어줍니다. 억울함을 풀어줍니다.

재판관에게는 불의의 판단을 하였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의의 판단을 내리지 않은 것에 대한 불편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부의 문제를 해결해 줄 정도의 힘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번 간청하고 부탁해야 겨우 들어주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낙심한 사람들에게, 억울하고 우울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인간의 문제는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19가 닥치고 장기화되자 여기 저기서 힘들고 우울한 소리들이 너무나 많이 듣습니다. 물론 필자가 운영하는 학원 겸 연구소도 그리 녹녹치 않습니다.
남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럭 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라고 말을 하면서도
은근슬쩍 ‘낙심된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불신의 말이나 불평의 말은 삼갑니다. 원망하거나 험담의 말도 삼갑니다. 그런 말까지 하면 자신 스스로가 비참해지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시인 키이츠는 ‘낙담은 절망의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낙심이나 낙담은 히브리어로 ‘마사스’ 라고 합니다.
이는 ‘용해시키다. 황폐하게 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낙심과 낙담은 인생에서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해로운 요소라는 것입니다.

정말 낙심과 낙담은 남는 것이 없는 절망의 어머니가 됩니다.

실패에서는 그래도 배우지만, 낙심에서는 아무런 경험적 재산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예산 분이 자신이 생산한 햇사과 한 자루를 선물로 보냈습니다. 늘 잘 지낸 덕분으로 받은 것이기에 그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격으로 따지만 10만원 이상이 되는 것인데, 사실 이 사과는 낙과(落果)한 것입니다. 태풍에 떨어지거나 바람이 불어 사과끼리 서로 부딪쳐서 멍이 든 사과들이었습니다. 그 사과를 받아서 보니 상하고 멍든 부사 사과지만 맛은 여전히 좋았습니다.




이 사과를 보면서 낙과(落果)라는 것이 곧 낙심(落心)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낙심한 사람은 여기 저기 멍들고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래서 낙과한 사과는 상품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낙과한 사과라서 금새 썩어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과 한 자루를 여러 사람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과가 맛있었습니다. 여전히 사과로서의 근본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서 낙심한 사람도 그 가치는 여전히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낙심한 사람을 보면 측은히 여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사람 곁에 있고 싶지 않아합니다. 사람들의 의리는 그럴 때 드러납니다.
우리는 낙심하여 지치고 쓰러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그 사람의 가치는 여전히 있습니다.
목사는 아니지만 미셔너러의 자격으로 설교자의 입장에 설 때가 있었습니다.
주머니에 신사임당 5만원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5만원권을 들고서 “저의 설교를 잘 들어주시는 분에게 이 돈을 드립니다” 했더니 눈이 초롱초롱 해 졌습니다. 그러나 “그냥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구겨서 드리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실망한 눈초리로 변합니다.

그래서 일단 손으로 구겼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구겨져도 이 돈의 가치가 떨어집니까?”
“아닙니다.”

그리고나서 다시 5만원의 신사임당을 발로 밟았습니다. 다시 말했습니다.

“이렇게 밟혀도 이 돈의 가치가 떨어집니까?”
“아닙니다.”

그리고나서 이번에는 5만원의 신사임당님을 찢으려고 하자,갑자기 어떤 여성분이 말립니다.그래서 돈은 찢지 않았으나 다시 물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찢어도 이 돈의 가치가 떨어집니까?”
“아닙니다. 약간은 떨어집니다.”

우리 인간이 만든 최고이면서 최악의 발명품인 돈도
이렇게 가치를 상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신이 만든 최고이면서 어쩌면 최악?의
창조물인 인간의 가치는 과연 상실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최악으로 만들어지거나
그렇게 엉망으로 진화한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최고로 잘 만들어진 걸작품입니다. 

 

  • 꽈리식물 - 오묘한 자연의 작품


얼마전에 공주의 멋진 지인분이 직접만나 야생에서 자라는
‘꽈리식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꽈리식물을 화분에 옮겨서 집안으로 놓았더니 며칠후 시들어갑니다.
그런데 태풍이 부는 날에 다시 밖으로 내놓았습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 나무가 다시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살자, 또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놓았습니다. 집안에 놓았더니 다시 시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다시 빼놓았습니다. 그러자 다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야, 저건 태풍과 찬바람을 맞아야 사는 구나"

들의 핀 꽃들이나 식물들도 들에서도 잘 자라는데
인간은 왜 이리 ‘쉽게 시들고 낙심되는가’ 곧 이것은 인간이 너무나 편하고 즐거운 낙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도 고난이 있고 힘든 시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석주의 [대추]를 보면, 저절로 붉어 질리가 없다고 합니다.
저 안에 태풍이 몇개 들어가고, 벼락을 몇개 맞아야 하고, 온갖 비바람을 맞아야 하고, 뜨거운 태양의 뜨거운 맛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년 내내 햇빛만 비추면 결국 그 땅이 사막이 된다” 라는 어느 랍비의 말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재도약’ 다시 점프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점프하고 리바운드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롤러코스터를 탈 때 내려가는 순간 아찔하지만 다시 올라갈 때는 상쾌해집니다. 슬플 때가 있으면 기쁠 때가 있습니다. 낙심 될 때가 있지만, 결국 회복되고 재도약 할 때가 있습니다. 상처가 날 때가 있지만 그 상처를 꿰멜때도 있습니다. 아물때도 옵니다. 항상 어둡기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참고 인내하는 질긴 힘]을 가져야 합니다. 왜 낮과 밤이 존재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낮에는 수고하고, 밤에는 쉬라는 뜻입니다. 밤에 잘 쉬면 낮에 일을 잘하게 됩니다. 무엇이든 때가 있어서 우리는 그 때를 따라 부지런히 일하고, 부지런히 쉬어야 합니다.

1991년 사과 재배로 유명한 일본 아오모리현에 기록적인 태풍이 왔습니다.
1년 동안 땀흘리며 재배한 사과들의 90%가 낙과하였습니다. 농민들은 비탄에 빠지고 어둡고 힘든 현실에 하늘만 원망하였습니다. 이런 절망 적인 상황에서도 ‘난 상관없어’ 말하며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도 나이가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래도 떨어지지 앟는 10%의 사과를 가지고 [합격사과]라는 상표를 붙여서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보통 사과에 비해 10배 이상 비싼 값이었지만 불티나게 팔려 나갔습니다.

특히 엄청난 태풍에도 불구하고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몇백만 수험생들에게 힘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낙과를 팔 수는 없지만 그래도 떨어지지 않은 10%의 사과로 그는 대박신화를 내었습니다. 잃어버린 90% 때문에 절망하지 않은 남은 10%에 희망을 가지고 재도약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눈물겨운 행복인 것입니다. 

  • 일본의 합격사과 - 구글출처 이미지

 



우리는 잃어버린 것에 연연해서 낙심하는 것입니다.
물론 낙심하지 말라고 할 때 낙심된 감정을 버리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남아 있는 10%나 아니면 그 이상의 남아 있는 받은 복을 우리는 가지고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아직 살아 있다면 희망도 살아 있는 것이니까요...
희망은 좋은 것입니다. !! 

 



이 글을 쓰면서 지난 날 실패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또한 낙심하여 좌절한 순간들도 떠오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홍수나 태풍 사태로 고통 받는 다수들도 생각합니다.
그저 내가 할 일은 기다리며, 참고, 견디는 것이지만 그래도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기도마저 포기하면 그것은 다 포기하는 것이니까요...

IMF의 재정적 고난의 행군속에서도,
유학시절 이스라엘의 테러의 순간에도,
비싼 등록금을 치루면서 수중에 아무런 물질도 없을 때에도,
한국의 녹녹치 않은 생활속에서도,
여전히 지금까지 호흡하고 살아 있다는 것은
내가 들의 핀 꽃도 입히시는 신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자 BE LIVE" 에 집중해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꽈리식물에서, 아오모리사과라는 식물에서도 발견합니다.그리고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선을 행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서도 발견합니다.아니면 가까이 우리의 부모님들로부터도 발견합니다. 이웃에게서도 발견합니다.심지어 책과 뉴스에서도 발견합니다.

우리는 희망 있는 존재입니다.
별 볼일 없는 존재가 아니라 별 볼일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길을 걷다가 낙심되어 땅을 볼 때도 우리는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볼 수 있는 만물의 영장입니다.

아니면 땅을 볼 것 같으면 차라리 누워버리면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가능성과 아직도 세상은 살아갈 만한 곳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낙심하지 맙시다. ‘내힘들다’를 거꾸로 하면, ‘다들힘내’가 됩니다.
힘들 때 더 힘든 사람을 생각해요.

영국 속담에 ‘평온한 파도는 유능한 뱃사공을 만들지 않는다’ 라고 합니다.

‘유능한 선장은 풍랑을 만날지라도 정면으로 돌파하여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갑니다.’우리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삶은 계속 됩니다.

 

  • 구글출처 이미지 - 스티븐 코비의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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