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과 유배문화
- 문화재청 연구도서를 중심으로
작년도에 문화재청에서 내게 보낸 큰 책자가 있었다. 문화재청 50주년 기념판으로 보는 것인데, [섬과 유배문화]에 대한 책자였다. 물론 너무나 두껍고 방대하여 살펴보지 않았으나 최근에 다산 정약용 선생과 추사 김정희 선생에 대한 여러 책들을 보던 차에 살펴보게 되었다.
다산이나 추사는 유배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위대한 인물로 부각되지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다산이나 추사 외에도 걸출한 인물들은 셀 수 없이 많으니 이 지면에서 다루기도 벅차다. 다만 보내준 책자만이라도 대충이라도 읽을 심산으로 보았는데, 이외로 흥미진진하고 재미가 있어서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참으로 좋은 시대다. 읽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유배지에서는 지필묵하나 구하기도 힘들어서 한양에서 택배(살짝 웃음을 주기 위해서 택배로 써 놓은 것이다)로 보내거나, 큰 고을에서 택배로 보내곤 하였다. 다산이나 추사도 그래도 자산규모가 있는 양반집이었으니 물자가 그래도 공수가 되어서 멀리 귀향지와 유배지에서 글도 쓰고, 후학들을 양성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의 유배인은 약 560명 정도였다. 왕족에서부터 양반, 중인, 평민, 여자, 어린아이도 유배의 대상이었다. 유배지가 정해지면 도착일까지 법으로 정해지지만 유배길과 유배생활도 신분의 높고 낮음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풍운아 연산군의 [인천 교동도 유배]는 유명하다.
또한 나이 어린 단종의 [영월 유배]도 유명하다.
[구운몽]을 쓴 천재 작가 서포 김만중의 [남해 유배]도 유명하다.
조선시대 양반은 정치 논쟁의 주도자이자 최대 희생자였다. 그 당시 성리학을 따르는 당파들의 싸움에서 밀린 사람들은 유배지로 추방되거나 격리되어져야 했다.
유배길에 드는 비용은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유배인들에게는 이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그러나 관직자와 양반들에게는 국가에서 말을 지급하고, 유배 길목의 수령들에게서 음식과 말을 제공받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권세가들은 마치 유람을 하듯이 유배길에 오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낭만적이라고 부르기 쉬우나 그리 낭만적이지는 않다.
이들은 비록 정치적으로 밀렸다고 해도 여전히 선비와 학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으려고 하였다. 유배지의 학문향상과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전라도에 문인들이 많이 나오게 된 배경도 바로 유배지에서 학문과 문예활동을 하고, 후학을 양성한 선비들의 공로가 크다. 정약용 선생만 하여도 조선 3대 시인으로 불리우는 제자 황상을 배출하였으니 말이다.
유배인들은 절해고도에 위리안치되어 고난의 유배생활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정치 정세의 변화에 따라 해배되거나 관직에 복직하기도 하였다.
[유배의 섬, 제주도]
조선시대에 가장 먼 유배지는 제주도였다. 한양에서 약 3000리길을 가야 하는 곳이다. 구불 구불 돌고 돌아 가는 곳이 제주도 유배지이다. 지금이야 관광지이지만, 그 당시 유배지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죽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제주도는 유배의 섬이라 불리운다. 이곳은 종신형을 받은 큰 죄인들이 가는 곳이다. 추사 선생이 거의 종신형을 받고 제주도로 갔으니 다시 고향이나 한양으로 오려면 죽어서나 와야 했을 곳이었다. 그러나 불후의 명작은 불우한 시절에 만들어진다고, 추사는 자신의 제자인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어 지금은 국보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선은 송시열의 나라였다] 라는 책을 보면, 우암 송시열도 1689년 제주도 유배길에 태풍을 맞아 완도 보길도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83세에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국문을 받으러 한양에 가던 중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는다. 권력무상인데, 그 권력싸움에서 밀리고 밀리면 결국 받는 것은 사약이다.
[서해안에서 가장 먼 섬, 흑산도]
서행안 흑산도는 가장 서쪽에 위치한 섬이다.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도라 했다고 한다. 흑산도에는 정조 즉위에 반대하여 유배된 홍찬해 선생, 신유박해에 유배된 자산 정약전 선생, 1876년 일본과의 조약체결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내었다고 유배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유배지였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나의 외가 근처에 무덤이 있다.
[유배인들의 생활]
유배지에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경제적인 문제였다. 이들은 자급자족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스스로 호구지책(糊口之策)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다산의 경우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글을 팔아서 인쇄 출판하여 생활비를 벌기도 하였다. 물론 대다수의 유배인들은 섬지방에서 나는 토산물을 가지고 근근히 생활을 영유해 나갔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아버지인 [김노경의 고금도 유배]라는 대목에 잠시 눈길이 갔다. 김정희 가문은 경주 김씨 명문가였지만, 당시에 안동 김씨의 득세로 정권 실세들인 삼사와 의정부의 모함과 탄핵을 받아 고금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추사 또한 안동 김씨 세도가들에 의해서 아버지 김 노경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1840년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가 되었다. 약 거기서 9년을 유배되었고, 다시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1851년에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다. 안동 김씨는 노론 집권세력이었고 이들의 득세로 추사 김정희 선생은 복직되지 않고 나중에 말년에는 과천에 은거하며 학예와 명리학과 선리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유배인으로서 살아온 세월에 추사 김정희 선생은 제주도에서 구절양장 산야를 보면서 [추사체]를 만들었다. 지금도 예산에 가보면 추사고택이 있다.
[정약전과 흑산도]
유배인들중에는 섬사람들의 도움없이는 유배생활에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섬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단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실학자 정약전이었다. 동생인 강진의 정약용과 수시로 서신교환을 하면서 흑산도 섬사람들과의 생생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자산어보]를 쓸 수 있었다. 또한 동아시아를 표류한 [홍어장수 문순득]을 통해 당시 폐쇄적인 조선에서 여러 나라를 간접적으로 경험한 기록이 남아 있다. [흑산도 홍어]가 유명해진 것은 문순득의 덕분이다.
정약전은 우이도에서 첩을 얻어서 슬하에 두 아들을 낳았다.
사람들은 정약전이 우이도에서 흑산도로 유배지를 옮길 때 마을 사람들은 그의 유배길을 막았다고 한다. 그는 유배지에서 끝끝내 복직되지 못하고 유배 10년 만인 1816년 향년 59세로 생을 마감한다.
[자산어보]는 일어볼만 하다. 유배시절에 쓴 해양수산생물 사전이다. 흑산도 주변의 200여종의 수산생물을 분류 연구하였다. 3년전 서울에서 [자산어보] 특강을 듣다가, 정약전의 책을 구입하여 보았는데 자신의 제자들인 장창대와 문순득은 [자산어보]를 쓰도록 도와준 사람들이었다. 자산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둘째 형님이다.
이 정약전을 좋아해서 어떤 사람이 내가 살아가는 아산 배방에 [자산어보]라는 횟집을 세웠는데, 흑산도 홍어 삭힌 음식을 주는데 일품이다.
[섬에서 학문과 예술을 꿈꾸다]
김대중 전대통령이 옥중에서 많은 학문과 예술성을 보인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내가 대학시절에 읽은 [대중경제론]은 걸작이다. 또한 신영복 선생도 마찬가지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걸작이다. 조선시대에는 어느 때보다 사화, 당쟁 등 커다란 정치적 사건의 연속이었다. 벼슬길에 오른다는 것은 자칫 목숨을 거는 일과도 비슷했다. 정치적 파란에 의해 남방의 고도로 유배된 유배인들은 그 고통을 학문과 예술로 승화시켜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환경이 곤궁할수록 더욱 훌륭한 작품을 창작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은 실천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정약전의 [자산어보]나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 모두 유배지에서 제작되었다. 그리고 천연두 관련 약을 만든 지석영은 완도 신지도에서 [신학실설]을 한글로 완성하여 백성들에게 쉽게 의학서를 접근하게 해주었다. 이들은 고립된 섬의 공간에서도 [학예(學藝)일치]의 경지를 이루어냈다.
[불후의 명작은 불우한 시절에 지어진다]
우리는 유배지에서 [학예일치]를 한 선비 문사들 덕분에 오늘날 귀한 문화적 가치를 향유하며 향연하게 되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이 많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잘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유배인들의 삶은 보면 하고 싶은 일이 궁극적으로 권력과 투쟁이 아니라 그저 학문이었음을 본다. 많은 유배인들은 자신들의 학문으로 그 유배지에서 자신들의 학문세계를 펼치고 실천하였다.
문득 나의 서재에 [자산어보와 목민심서]를 잠시 쳐다본다. 저가 그냥 나온 책이 아니라, 목숨을 담보로 하여 제작된 책이어서 그저 귀하게 다가온다. 평생 일만하다가는 우리는 자신의 학문을 펼쳐 나갈 수 없고, 불멸의 도서를 제작할 수 없다. 충분한 시간과 공간이 허락되어졌을 때 가능한 것이다. 후대가 나중에 평가할 것이다. 유배가 없었다면 추사나 다산은 그저 사람들의 호의나 후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후대가 후대를 해준 것이다.
그곳이 감옥이 되었든, 유배지가 되었든, 자신의 집이 되었든 말이다. 그래서 어떤 현명한 스승님이 “일만하지 말라”고 했던 말씀이 생각난다. 그래서 오늘도 책을 붙들고 씨름하며, 이렇게 백면서생의 글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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