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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과 고전 이야기

인문고전, 퇴계와 율곡의 사제동행을 발견하다.

by 코리안랍비 2022.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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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선생의 [자성록, 언행록, 성학십도]를 잠시 보다가...
퇴계와 율곡의[사제동행]을 발견하다.

한때  율곡 선생은 어머니 사임당 신씨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금강산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생불'이라는 명성을 얻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불교가 유교보다  못하다"라는 소리를 하고 그  절을 나오게 된다.  그 절의 이름이 아마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머물렀다는 '백담사' 라고 한다. 그는 왜 "유교가 불교보다 더 낫다"고 천명했을까? 무엇이 나은 것인가? 어떤 것이 나은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그 후 율곡 선생은 9번이나 과거를 급제하는 '구도장원공'의 반열에 오른다. 

공부천재요. 공부의 신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퇴계 선생을 만나 자신을 스스로 낮추게 된다. 

너무 일찍 노력분발한 탓일까, 율곡 선생은 지천명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내 서재에는 퇴계 선생의 책들이 몇권 놓여져 있다.
그중에 [성학십도]는 정말 걸작이 아닐 수 없다.
17세의 어린 선조에게 써 준 유학의 10가지 도를 기록한 명저이다.
퇴계 이황 선생은 대구/ 경북에서 많이 연구되고,
아직도 그분의 사상과 학맥을 따르는 지류들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에서 퇴계의 [경철학]은 더 연구되고 발전되었다.
심지어 하버드대학에서는 퇴계의 학문을 강의할 정도이다.

그런 고로 나 자신도 퇴계의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맛보려고 노력하였다. 

퇴계 선생은 벼슬을 수십번이나 고사할 정도로
정계 진출을 외면하였다. 그래서 그의 호도 [뒤로 물러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물론 안동에 가보면, [토계]라는 동네가 있다.
옛부터 호를 정하는 경우는 동네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경우가 많다.
그 토계라는 말을 퇴계로 바꾸어서 자신의 호를 지으신 분이니
고향에 대한 사랑도 강하고, 권력에 대해서는 무상함을 너무나 잘 아셨던 분이시니 어찌 존경하지 않을까?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는 어떤가?
안타까운 현실이다. 국사책에서나 기억되는 이황 선생일뿐이다.
아니면 종이돈에서나 보여주는 인물로 기억한다.

이제 퇴계의 학문은 유물로 변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학문은 마르크스가 말한데로 사실 넓은 길이 아닌 오솔길이고, 가시밭길이다.
퇴계 선생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의 난초와 같은 향기를 발산하신 분이시다. 산의 난초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향을 내는 것처럼...

퇴계 이황 선생과 율곡 이이 선생에 대한 이름은 정말 드높은데,
정작 이 두분에 대한 책을 기꺼이 가까이 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또 둘은 그저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수장으로만 기억한다.

이들의 높은 학문적 수준과 넓이는 헤아리기 힘들다.
두 분의 우정과 학문적 주고 받음은 아름답기까지하다.
이들은 거의 신적 경지까지 다다른 학문의 성인들이었다.
이들은 마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제들을
보는 느낌이다.

오늘 글을 쓴 김에 퇴계와 율곡 두분의 이야기를 여기에 옮겨보고 싶다.
퇴계 선생하면 [도산서원]을 떠올린다.
하지만 도산서원 전에 [계상서당]이 있었다.

경이 51세 되던 해에
안동의 초당골에 단칸 서당을 지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계상서당이라 하고,
그곳에서 학문하며 찾아오는 제자의 교육을 맡았다.
7년 후인 58세 때, 약관 23세의 율곡 이이가 찾아와 배우고 입문한 곳도
바로 이 계당이었다.

율곡 선생이 찾아왔을 때 마침 3일간 비가 내렸다.
율곡은 비에 갇혀 머물면서 갈 길을 인도받고, 학문에 정진키로 했다.
율곡의 재주는 알아본 퇴계는 도학에 큰 기둥이 되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물론 기대와 함께 경계의 말도 잊지 않는다. 퇴계는 율곡을 자신의 학문적 지기로 삼고 또한 사제의 관계로 삼는다.
이러한 퇴계의 시와 편지는 율곡이 강릉으로 돌아간 뒤에도 전해진다.

율곡이 계당에서 퇴계를 스승으로 모시고
도학을 이어 후세에 전하겠다 다짐하며 선생에게 드린 시는 이러하다.

시냇물은 수사(공자학의 비유)서 나뉜 가닥이고,
봉우리는 무이(주자학의 비유)를 이었습니다.
학문을 닦으면서 살아가시니,
이룩한 도덕이 이 방 하나 가득합니다.
뵙고 싶던 회포를 푸니 구름속 달 보듯 머리 트이고,
웃음 섞인 말씀 듣고 나니 저의 어린석은 생각 바로잡힙니다.
소자가 와 뵌 뜻은 도학을 받잡고자 함이었으니,
시간을 헛 보내셨다 생각지 마옵소서.

퇴계는 율곡이 다른 길로 감을 경계하는 시를 지어 화답했다.

늦게사 돌아와 할 일이 아득하더니,
고요한 이곳에도 햇빛이 비치었음인가!
찾아온 자네 만나 학문의 바른 길을 가르쳤네
학문 길 힙겹지만 탄식 앓고 나아가면,
외진 이 산골 찾아온 일 후회되지 않으리.

그러자 율곡은 [한계수 받들어 마시고 선생님의 도학을 이를 각오 새겨 맹세합니다.]라고 언약한다. 이렇게 계상서당은 두 어진 학자가 만나 학문을 승계한 뜻깊은 서당이 되었다.

두 성리학의 거목은
하나는 영남학파를 이루고, 하나는 기호학파를 이루어서
지금도 두 줄기속에 유학이 이어지고 있다.
서로 경쟁하면서, 서로 협력하면서 한국역사의 큰 물줄기를 형성하였다.

지금 우리의 유학은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살아있는가?
난 이 유학이 우리나라의 분열과 혼란을 바로잡을
귀한 가르침이며, 철학이며, [탈무드] 같은 고귀한 가치로 여긴다.
유학의 부흥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란다.

신유학혁명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른 철학과 학문과도 교유하는 사제동행의 자세를 확립한다면 

능히 살아남아 그 위세를 떨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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