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있는 삶을 살라! ㅡ 목적이 이끄는 삶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5가지 질문은 자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행복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길 원한다.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이유는, 그래서 이토록 바쁜 이유는 그것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나 당장은 힘들더라도 미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한다. 아침에 깨어나면서 “오늘은 어떻게 하면 나를 비참하게 만들 수 있을까?” 라고 자신에게 묻는 사람은 없다. 그저 행복해지고 싶다.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마하트마 간디가 “한 분의 위대한 스승” 이라 칭했을 만큼 통찰력 있는 인물이었다. 150여 년 전 그는 매사추세스 주의 콩코드를 떠났다. 그곳이 너무 시끄럽고 산만하며 분주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과 동화된 삶을 살기 위해 월든 호수로 이사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한 절망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조용한 절망의 삶
소로의 시대뿐 아니라 현재에도 ‘조용한 절망의 삶’은 이어지고 있다. 아니 더 악화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매일을 그럭저럭 지내거나 단지 “버티고” 있다.
흔히들 경제사정이 좋아지면서 더 행복해 질 것이라고 믿는다. 개인의 경제건 국가의 경제건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확실히 과거에 비해 부유해졌다. 아파트가 올라가고 자동차가 도로를 뒤덮고 있다. 뭘 먹느냐가 고민이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진 않는다. 실제로 소득도 늘어났다. 그런데 더 행복한가?
현대인들의 우울증 증가추세는 가히 경악할 만하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추세이지만 (미국에서) 청소년과 젊은이들의 자살률은 지난 50년 사이에 5,000퍼센트나 증가했다. 게다가 자살률은 부와 정비례해 높아진다. 이 사실은 여러 통계지표들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돈이 더 많을수록 더 절망적이란 얘기다.
보스턴 대학의 철학교수인 피터 크리프트는 “당신이 부유해질수록, 당신 가족이 부유해 질수록, 나라가 부유해질수록 머리에 총을 쏠 가능성이 높아진다” 라고 말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현대인들의 인간관계도 점점 구렁텅이에 빠지고 있다. 결혼한 세 쌍 중 한 쌍 이상이 이혼이나 별거로 끝나며 그 비율은 계속 높아만 가고 있다. 결혼률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또 이직률은 50년 전에 비해 5배나 높아졌다. 기업이 변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달라진 것일까? 어쨌든 행복하지 않으니 부부가 헤어지고 직장을 옮기는 게 분명하다.
우리가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나는 사람들이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잊고 있거나, 아니면 엉뚱한 꿈과 목표를 좆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오락게임, 문란한 섹스, 술, 도박, 시끄러운 음악 등에 지나치게 빠져든다. 일부는 마약도 한다. 등교 거부나 은둔형 외톨이 등이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마주하기 두려운 현실을 잠시 잊거나 마음속의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서다. 이들에게 현실의 삶이란 가능한 한 회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가 하면 번듯한 직업인들은 일에 쫓겨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낼 시간 조차 부족하다. 그들에겐 목적의식이 있다. 성공적인 업무수행과 이를 통한 경제적 부의 축적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를 삶의 우선된 목표라 믿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다른 일들을 자꾸 미루게 된다.
요즘은 출산율도 낮다. 현대인들은 시간과 돈이 충분하고, 또 직장을 잠시 쉬거나 포기할 각오까지 해야만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차 들어갈 교육비도 문제다. 아이들이 주는 순수한 기쁨과 행복보다는 경제적인 측면을 먼저 고려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삶의 의미를 소비에서 찾으려고 한다. 쇼핑이 곧 행복인 시대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가의 자동차나 명품을 구입하고, 멋진 레스토랑에 앉아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꼭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행복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쉽게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드시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쾌락과 오락의 탐닉, 혹은 나태한 게으름 같은 것으로 우리의 삶에 엄습한 많은 것들을 잠시 잊고 무마하려 애쓴다.
사람들이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는 이유는 그런 행동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행복의 탈을 쓴 조용한 절망이다. 항상 동분서주하며 행복을 향해, 그러나 행복의 반대편으로 달려간다. 그렇다면 진짜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 패러독스
인간은 크게 네가지 측면을 통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 신체적, 정서적, 지성적, 정신적인 측면이 그것이다.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 신체적인 면에서, 당신이 만약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잠을 자고, 음식을 균형있게 섭취한다면 어떻게 될까? 기분이 아주 좋고 온 몸에 활기가 넘칠 것이다. 그래서 더 건강하고 행복해지면, 더욱 부유하고 풍족한 삶을 살수가 있다.
둘째, 정서적인 면에서, 만약 당신이 인간관계를 우선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당신은 자신의 욕심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사랑하는 능력이 커진다. 사랑하는 능력이 커지면 사랑 받는 능력도 커진다. 그러면 자신을 더 많이 알게 되고, 균형 잡힌 인생관을 키우며, 큰 성취감도 경험하게 된다. 즉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해진다.
셋째, 지적인 면에서, 만약 당신이 하루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어 좋은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비전이 생기고, 세상에 대한 이해력도 높아진다. 혼란스러웠던 것들이 분명해진다. 매사에 더 신중하고 현명하게 된다. 더욱 행복해진다.
넷째, 정신적인 면에서, 만약 당신이 매일 잠시라도 조용히 명상이나 산책을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다정한 내면의 목소리가 차츰 커지며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다. 초조감과 불안감이 줄어들며 집중력도 높아진다. 더 풍부한 삶을 경험하며 더욱 행복해진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패스트푸드가 나쁘고 운동이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가족이나 친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한다. 독서가 마음을 살찌운다는 사실도 안다. 명상과 기도도 하고 싶다.
휴식과 여유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즉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지 모두 알고 있다. 다만 귀찮고 바빠서 실천하지 않을 뿐이다.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닌가?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을 점점 줄이고, 행복해지기 위해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욕구들을 소홀히 하며, 행복해지기 위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소리 없는 불만을 애써 무시한다.
왜일까? 간단하다.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뭘 하느라 그리 바쁜가? 행복해지려고 너무 바쁘다. 머리든 몸이든 바쁘다 보니 지치고, 일단 에너지가 고갈되면 부지런한 사람도 게을러진다. 이것이 우리 시대를 홀리고 있는 행복의 패러독스다. 아이러니 하다. 행복에 대한 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 행복에 대한 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아이러니가 아니라 왜이러니다.
신체적인 면에서 보면, 우린 너무 바쁘기 때문에 규칙적인 운동을 하지 않는다. 준비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제대로 된 음식도 먹지 못한다. 심지어는 커피와 도넛을 양손에 들고 먹으며 종종걸음 해야 할 만큼 너무 바쁘다. 하루에 10분의 운동만 해도 충분하다고 하는데 이마져도 하지 않는다. 불행한 일이다.
우리는 잠도 규칙적으로 자지 않는다. 하루가 24시간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저만치 앞서 가는 시간들을 항상 뒤에서 급하게 쫓아가는 느낌이다. 꼭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은 점점 길어진다. 따라잡기는커녕 매일 더 뒤쳐지는 거만 같다. 느긋하게 심호흡을 한 뒤 “ 이젠 따라 잡았어!” 라고 생각했던 때가 언제인가? 우리는 원기를 회복시켜줄 소중한 잠을 도둑맞아 가며 온갖 잡다한 일들을 하느라 밤늦도록 돌아다닌 다음에야 잠자리에 든다. 왜?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정서적인 면에서 볼 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관계에 성공하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시간에 사람을 맞추지 말고 사람에 시간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물론 아니다. 이 사람한테 15분, 저 사람한테 30분, 하는 식으로 시간을 들인다. 그것도 정서적으로 가장 피곤한 시간대나 불안한 시간대를 말이다. 왜?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지적인 면에서 볼 때, 우리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즉 나를 더 상위의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할 좋은 책을 읽는데 매일 30분도 들이지 않는다. 왜?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일하고 놀고 잠잘 시간도 부족한데 공부가 왠 말이냐는 식이다.
정신적인 면에서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조차 갖지 않는다. 명상은 물론이요, 조용히 세상의 풍경을 감상하거나 산책을 하면서 머리를 비우지도 않는다. 왜? 무엇이건 당장 쾌락을 주는 일이나 생산적인 활동을 해야 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바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린 대체 뭘 하느라 그리 바쁜가? 대개의 경우 모든 것을 다 하느라고 너무 바쁘다. 결국에 가선 안 해도 상관없을 일을 하느라 바쁘고,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별 의미 없는 일을 하느라, 또 가까운 길을 놔두고 잘못된 길로 빙 돌아가느라 바쁜 것이다. 만약 안 해도 될 일은 하지 않고, 끝에 가서 의미 없을 일도 하지 말고, 먼 길은 놔두고 가까운 길로 질러간다면, 우리는 더 여유 있는 삶을 살면서도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선 먼저 각자에게 있어 삶의 의미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누구인가를 물어라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시대와 인종과 문화를 막론하고 삶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써왔다. 이 시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 신학자와 예술가, 정치가와 활동가, 수도사와 현자, 그리고 이밖에 모든 직업의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끝없는 고민을 하고 의견을 나눴다. 이를 모두 살펴보려면 대학을 30년 다녀도 부족하다. 그러나 결국엔 다음 5가지 질문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5가지 질문은 인간의 삶이 시작된 이래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계속 던져온 것이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각자가 추구할 삶의 형태나 방식, 방향이 결정된다.
1. 나는 누구인가?
2.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3. 나는 어디서 왔는가?
4.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5.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먼저 “나는 누구인가?” 와 “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는 현재에 관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내가 언제 가장 큰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끼며, 어떤 일에서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물론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한 철학적 문제가 있지만, 일단은 각자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도구라는 실용적 목적에서 보자.
“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란 질문은 과거에 관한 것으로, 다소 어려운 질문이다. 나를 창조한 것은 신일까, DNA일까? 나는 어떤 사람으로 태어났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가? 마지막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와 “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는 미래에 대한 질문이다. 당신은 어떤 꿈을 갖고 있으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방법으로 어떤 노력을 할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기독교의 “성서”, 불교의 경전들, 이슬람교의 “코란”, 힌두교의 “ 바가바드기타” 등 모든 신앙서들은 신이나 해탈을 중심으로 해답을 밝히려 애쓰고 있다. 또한 공자, 노자, 호메로스, 세익스피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도스토예프스키, 헉슬리, 헤밍웨이 등도 모두 조금씩 다른 해답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결국 같은 문제를 탐구한다.
우리들 역시 각자의 방식대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물론 짧은 시간 안에 명확한 답을 얻기는 힘들다. 역사에 회자되는 현자와 석학들에게도 힘든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이를 고민해 볼 때, 우리는 어렴풋하게나마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을 수 있고, 해야 할 일들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잡을 수 있으며, 나와 타인에게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그래서 먼 길을 돌아가는 헛수고를 줄일 수 있으며, 따라서 덜 바쁘고 덜 지치면서 더 행복할 수 있다.
어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갖느냐의 문제는 어떤 일을 하느냐, 어떤 것을 소유하느냐의 문제보다 훨씬 중요하다. 앞의 5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가 조금씩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삶의 의미와 목적은 하나다. 바로 “나”의 최고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나 자신의 위대함” 을 실현하는 것이다.
일단 그것을 깨닫고 이 목적을 위한 삶의 한가운데에 놓으면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반면 이 궁극적인 목적을 깨닫기 전엔 어떤 것도 이해되지 않고, 정처 없이 방황하며 조용한 절망의 삶 속으로 천천히 빠져들게 된다.
신체적, 정서적, 지적, 정신적 영역에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행동들은 곧 우리를 보다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일들이었다. 우리가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감을 맛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 위대한 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야 말로 행복의 지름길이다.
그렇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말처럼 “ 지금의 우리가 되는 것,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이 되는 것, 이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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