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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과 고전 이야기

에세이, 그리스 고전, 그 현대적 의미

by 코리안랍비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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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고전, 그 현대적 의미


대학에 입학하면서 제일 먼저 본 책은 철학서들과 고전들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문학만 읽었던터라, 고전은 무척이나 생소한 것들이었다.그래서 제일 먼저 서구철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칸트를 선정하여 그의 책들을 읽어보기로 하였다. 1학기에 철학개론수업을 들으면서 철학의 기초를 공부하면서 칸트 철학책을 읽어나갔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말인지 개념정리도 되지 않고, 너무나 난해하고 어려운 용어들이나 개념들이 나를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래서 조금 난이도를 낮추어서, [철학사]를 먼저 읽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도 철학을 어려워하면, [철학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책과, [철학사]를 읽어보라고 권유한다. 일종의 산을 먼저 보로 나무를 다음에 보는 식이다. 넓게 보고 깊이 보는 훈련이 중요하다.

철학의 발달과 더불어서 철학자들의 계보만 익혀도 어느 순간 철학의 세계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학 1학년생이었지만, 철학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니 어느새 다른 과목들도 좋아지게 되었고, 세계를 품는 사람이 되어갔다.

1학년 학생이 서양철학자들의 계보와 철학의 흐름을 꾀고 있다는 것에서 다른 학생들과는 다른 생각과 가치관이 형성되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나에게 가장 먼저 들어온 나라가 그리스이다.

또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면서 성경을 공부할 때 두번째 나라가 이스라엘이었다.
하나는 헬레니즘의 대표요, 하나는 헤브라이즘의 대표이다. 이 두 사상의 대흐름은 서양철학의 근간이면서, 서양학문의 근간이요, 서양사상의 근간이었다.

여기서 바로 인문학Humanitas이라는 위대한 학문적 체계가 형성이 되었고, 두 나라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학문적 진보, 지성적 진보를 보장받게 된다.

결국 28살의 나이로 유학을 갈때, 이스라엘을 가게 되었고, 가까운 그리스와 지중해 연안 국가들을 만나게 된다. 이것은 나의 일생일대의 행운이며, 자랑이며, 감격이다.

오늘은 그리스 고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의 현대적인 의미를 나누고 싶다.
이런 글을 쓰면 마치 어려울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그동안 쌓아왔던 체계의 일부를 밝히는 것이며,
그저 "나는 그리스 철학을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소회를 밝힐 뿐이다. 다른 문헌의 도움없이 밝혀본다.

물론 이 글을 제대로 읽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시 몇줄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다고 하지만,
진지하게 끝까지 읽어주는 몇몇 독자들이 있어서 이 글을 작성하는 이유도 된다. 지천명의 나이가 되면서 아직도 내 속에 학문적, 사상적 진보를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더 갈급하고 배고프다. 그래서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저자들을 만나고, 더 많은 대화와 토론의 기회를 갖고자 하는 것이다.


도대체 고전이 무엇이며, 무엇을 고전이라고 하는가? 그저 옛날 책을 고전이라고 하는 것인가? 고전을 배우면 무엇이 좋은가? 고전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인가? 고전을 배우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변하는가? 등 갖가지 질문들이 떠오를 것이다.

고전은 시대정신과의 연관 속에서 읽어봐야 한다.
고전은 생명력이 강한 잡초와 같아서 아무리 밟고 외면해도 끊임없이 현대에서도 되살아나고, 지금은 더 강해진 것 같다. 문명의 이기를 타고서 수많은 사람들이 접하기 때문이다. 경제가 발달하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행복을 갈구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이 궁금하다.
그래서 고전을 찾고 철학을 하고 교양을 구한다.

철학적 고전의 생명력은
바로 철학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였다.
비판되지 않는 사상, 비판되지 않는 철학은
그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기독교 철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한 비판위에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약성서가 그리스어로 쓰여 있으며, 그 저자들은 그리스어를 알고 있었으며, 기존의 그리스 철학에 대한 문제점과 지향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근대 철학은 중세 기독교 철학이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형성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기존의 계몽주의 이후 발전하기 시작한 자본주의 체계룰 부정하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만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틀렸지만 여전히 그들의 그림자는 강하다.

도끼들고 철학한 전복의 철학자겸 신학자
니체는 플라톤 철학에 대해서 비판의 칼을 들고 나왔다.
그렇지만 생전에 플라톤과 종교학자들을 두루 연구한 현인이다.

근대 철학의 신으로 불리우는 비트겐슈타인은 기존의 그리스 대표 철학자들을 모두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그들이 말장난에만 빠진 철학자들이며, 이들의 철학에 유럽이 무기력에 빠졌다고 본다.

최근에 자크 데리다는 과거의 철학자들을 모두 준정신병자 취급을 하며 해체주의를 들고 나왔다.

그렇지만 이들 모두는 그래도 할말은 없는 철학자들이다.
왜냐하면 여전히 그리스 철학과 고전에 빚지고 있어서 그렇다.

그렇다면 그리스 고전은 왜이리도 질기고 강한가?
바로 서구사회의 근간이 그리스 철학이나 고전에 기초하고 있어서 그렇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한때 전유럽을 휩쓸었고 아시아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비판을 당한 플라톤은 여전히 강세를 떨치고 맹위를 떨치는 최고의 철학자로 군림한다.

비트겐슈타인을 필두로 한 논리실증주의도 한때는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고, 검증가능성이 중요하다고 하여 철학이나 인간성도 검증가능한 입장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수학과 과학을 철학보다 더 중시여기고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역사를 부정하며 폐기되어야 ㅏㄴ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너무나 급진적이고, 그러면서 고도의 합리화가 있었지만 이제 그들의 논리실증주의는 낡은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렸다. 검증가능성 자체가 문제가 된 것이다. 과학과 수학이 발달하고, 교육학이나 심리학이 발달을 하여도 여전히 인간문제는 해결되어지는 것보다 더 복잡해지고 불분명해졌다.

그리스의 고전 철학자들의 위세는 더 강해진 것 같다.
이들이 이렇게 생명력이 강한 것은,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다" 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시대가 변해도 인격은 달라지지 않는다" 라고 주장한다. 결국 이들이 중시여긴 것은 [인간다운 인간]을 만드는데 있다. 그리스어로 교육이 [파이데이아 Paideia] 인데 이는 [전인교육]을 말한다. 그러면서 제일 중시여기는 것은 교양을 갖춘 사람 - 고전에 입각한 교육을 받은 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을 - 클라시쿠스 Classicus 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파이데아는 인문학 즉, 후마니타스와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

플라톤은 세상을 구원하는 생각을 하였는데 그래서 그는 이데아를 제시하였고, 이는 인생들의 불완전성과 불안정성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이라는 과목도 만든 사람이 플라톤이다. 이는 사람들이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 없는 혼란한 존재라는 것이며, 그 불안을 견디며 이겨가며서 살아야 할 운명을 갖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신을 찾고, 위안을 찾으려고 하고, 초월적인 이데아의 세계에서 해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기독교 철학에서 나중에 이데아는 하나님으로까지 발전한다.

마르크스는 이론보다 실천에 무게를 두고, 사람들의 사유나 생각을 외면했다.
인간의 불완전성과 불안정성을 외면하고 신앙의 세계도 외면하였다. 사람들의 사유나 생각을 외면하게 되면 결국 사람들을 어느 틀에 가두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산사상이 가지는 최대 맹점이다.

그래서 여전히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운동과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 이유가 된다.
그리스 고전철학이 강점이 실천보다 이론에 있다는 것도 깊이 상기해야할 점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적 인간을 중시여겼다. 이점에서 헤브라이즘도 동일한 입장이다. 탈무드적 인간, 즉 이론적 인간을 제일 중시여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그저 생물학적인 삶에만 안주하기보다는 죽음이라는 최악의 파국을 당하더라도 스스로의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을 검토하며 평안을 구하기를 바라였다. 그래서 기꺼이 죽음도 불사한 것 같다.

플라톤도 불안하고 힘든 세상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이데아를 제시하고, 진리를 추구하도록 강조하였다.내가 대학 1학년 시절 읽었던 칸트에 의하면 "진리라는 것은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고귀하고 영원한 가치이다. "

진리추구자란 구도자이다.
구도자는 당장의 이익이나 이기심보다는
영원성이나 고귀함을 추구한다. 이런면에서 그리스 철학자 상당수는 구도자였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우리는 그리스 철학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더 떨어진 것 같다.
지능도 떨어지고 인격도 떨어졌다.

물론 철학이라는 것이 그 시대의 정신을 대변하는 것이었지만, 지금 철학은 과연 그러한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현대의 철학자들의 글을 읽어보아야 한다.

그중에 [존재의 철학자인 하이데거]가 있다. 그는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망각하고 산다고 말한다. 그래도 그의 철학도 그리스 고전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면서 늘 고민의 중심에는 [인간]과 [인간성]에 있다.
또한 [해체주의자 자크 데리다]가 있다. 그는 기존의 그리스 철학자들의 답습을 하기 보다 여전히 그들의 사유를 존중하면서도 비판한다. 심지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에 나온 그의 철학적 사유를 부정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데리다는 그들에게 빚졌음을 밝힌다. 자신의 철학적 토대는 여전히 그리스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그리스에서 왜 철학이 발달했는지는 그 지형을 보면 알 수 있다고 강변했으며, 이들 그리스 고전철학을 기본적으로 깊이 넓게 공부하지 않고, 현대에 와서 비판할 수 없음을 강변한다.

우리가 그리스 고전이나 철학을 읽는 이유는 자명하다.
결국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에 있으며, [시대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며, 과거의 철학자들의 사유를 나도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불안정한 존재이다. 이는 곧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스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가 곧 철학의 시작이며, 곧 자신을 알게 되었을 때, 자아의 발견을 이루게 되고, 철학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또한 신학에서도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불안정한 존재라고 밝힌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이 말한데로
"나는 누구이며, 당신(하나님)은 누구십니까?"가 곧 신학적 인간학이다. 이를 통해서 인간이 죄인이며, 신의 뜻과 섭리에 맞추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철학과 신학의 지향점은 [인간구원이며 세상구원]이다. 그래서 현세는 철학으로, 내세는 신학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젊어서부터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사람" 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20세를 넘어서 21세기에 와도 여전히 고민하고, 앞으로도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떻게 살것인가 how to live?" 이다. 결국 죽음이라는 파국과 숙명을 맞이하겠지만, 지금 나는 잘살고 있으며, 존재의 이유와 목적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사유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고전독서를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독서천국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독서를 하는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있음을 감사하고 살아있음에 기뻐하고, 살아있음에 행복을 증진하고 나누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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