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토라와 탈무드 이야기

왜 탈무드가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인가?

by 코리안랍비 2022. 9. 10.
728x90
반응형
SMALL

왜 탈무드가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인가?

구글 출처 이미지 - 왜 탈무드가 중요한 책인지 이해하게 해준다.



어떤 사상가(Thinker)가 한국에는 한국적인 사상이 있는가?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서양사회에는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헬라철학이나 자연과학사상이 존재한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부철학이나 신학이 존재한다. 서양은 우수한 기술문명을 중심으로 지리상의 발견과 더불어서 제국주의적으로전세계에 자신들의 사상을 공급하였다.

그런데 동양으로보면 인도에서는 힌두교나 불교가 융성하여 자국만이 아니라 주변국에 막대한 정신적, 영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중국은 제자백가의 등장과 더불어서 춘추전국 이후에 대단한 사상가들이 출현하였다. 도가를 필두로 하여, 법가나 유가가 등장하였다. 이것은 중국이 세계의 축으로 발전하는데 앞장서게 하였다.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에서는 자신들의 사상의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서 중국과 한국에서 그리고 다른 외세에서 주요 사상들과 철학, 관념들을 받아들였다. 물론 성리학은 한국에서 급성장하였지만, 명리학은 일본에서 급성장하였다. 물론 일본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불교인 -신도이즘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이제는 대표할만한 사상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북한의 경우 [주체사상]이라는 것이 있어서 다른 중국과 일본과는 거리를 둔 공산사상에 근거한 나름의 사상을 펼친다.

물론 남한에서는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경계할 사상으로 취급하지만 나름의 국가적인 주체성이나 한민족의 주체성을 수립하려는 의식은 좋은 시도라고 본다. 한국은 실학사상이 있었는데, 실사구시하고 이용후생하는 이 실학이 이제는 박물관으로 들어가 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실학 박물관이 있어서 그나마 실학에 대해서 관심이 조금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다.

나름대로 한국은 지금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을 나누는 진영논리가 생겼지만, 이 진영논리라는 것도 그 경계가 애매하고, 그리고 투명하지가 않다.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보수층 전라도 중심으로 한 진보측 이런 지역구도도 사실상 사상적인 틀이나 인식의 틀과는 무관해 보인다. 이러한 사상의 공백이나 진공상태가 이어진다면 한국과 한국민의 [정체성]의 혼란이 올 것이라고 본다.

물론 [한국학]이라고 하여도 한국의 고유의 전통과 역사를 살리려는 노력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 파급력은 떨어져 보인다. 이번 명절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추석이나 설날]의 명절이 이제는 휴일개념으로 전락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반드시 후세대에게 사회화하고 물려줄 소중한 문화유산이 있는데 이제는 잊혀져가고, 잃어버리는 것들이 되어 버렸다.
중국은 공자나 맹자의 사상, 혹은 주자학을 다시 부흥시키려고 하고 있다. 공산주의 사상만으로는 중국민들의 사상적 공백이나 진공상태를 채워주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기독교 국가인 미국과 그리고 비기독교 국가인 중국의 사상적 갈등이나 정치사상적 갈등으로 이어질 소지가 크다. 기독교는 인권을 강조하는데, 중국은 아직 인권에 대해서 갈길이 멀다.

한국의 경우 오랜 전통을 가진 불교보다는 기독교가 크게 대중적인 입장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사상적 부재는 심각한 상황이다. 교회현장에서 40년간 있어본 나로서는 이러한 [사상적 부재]의 심각성이 너무나도 많이 보인다. 대승적인 기독교가 강하다보니 소승적인 기독교의 입장이 약한 것이 사실이다. 자기수양이나 성찰, 자기를 비우고 새롭게 갱신하며 거듭나는 소승적인 기독교가 너무 약하다.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서 더욱 이러한 현상이 증가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는 일이 가속화될 것이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교회는 지금 큰 위기를 맞고 있다. 다시 교회의 본질이나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어떤가?
유대인들도 상당부분 지금의 세대를 걱정하고 우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도 “앞으로의 세대는 지금까지 인류가 유지하던 세대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세대가 될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유대사회가 이제는 IT, 교통혁명, 정보통신, 디지털문명, AI, 4차 혁명으로 이어지는 사회에서 기존의 전통이나 가치관들의 혼란이 이어지고 있고, 심지어 기존의 문화유산도 이제는 정신적으로 밀어내는 ‘문화’가 형성되어가고 있다.

부모세대가 물려준 가치관대로 살지 않는다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신의 위기나 사상의 위기가 곧 가장 위험할 수 있다.
유대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텍스트가 바로 [토라, 모세오경]이다. 토라는 신앙적인 정체성의 본질을 다루고 있으며, 무엇보다 신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다룬다는 것에서 그 가치와 비중이 가장 높다. 그러면서 이 토라에 기초하여 형성된 탈무드는 유대교의 기반이 되었다. 탈무드는 오랫동안 구전되었던 영적인 유산으로 보아서 [토라 쉐바알-페] 즉 ‘구전토라’라고도 부른다.

탈무드에는 토라처럼 많은 이야기들이 기록되었다. 토라의 형성과 발전에 대한 것부터 시작해서, 여러 조상들의 이야기, 그리고 유월절이나 다른 절기의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었다. 그리고 토라에서 비롯된 구절을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랍비들이나 학자들의 토론을 많이 담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탈무드를 “지금도 살아서 숨 쉬는 문서”라고 부른다.

그리고 토라는 모세오경으로서 그저 5권의 책을 모은 것이지만, 탈무드는 모세오경에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도 상당히 실려있고, 전설이나 구전도 상당히 실려있다. 그중에서 신뢰할 수 있는 부분도 많지만 신뢰하기보다 의심스럽거나 황당한 부분도 존재한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탈무드의 역사성이다.
탈무드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넘어서 가나안을 정복하는 이야기와 더불어서, 제 1차 성전이 무너지고,제2차 성전이 무너진 기록도 담고 있다. 탈무드는 첫장과 마지막장이 공백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탈무드는 여전히 기록되어지는 책이다.

유대교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이러한 우상숭배 문제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주 외세의 침입을 받고서도 오랫동안 저항을 해 왔다. 강력한 외세의 침입을 받아 유대교의 존립이 흔들리고 위태할 때가 많았다. 토라는 여전히 많은 서기관들의 노력으로 필사되고 유지가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조상들의 유전을 지키려고 [탈무드 제작]에 열과 성을 다한 것이다.

어느 문헌을 보니, 제 2차 성전의 몰락이 A.D 70년에 있었는데, 사두개인들(종교정당)은 즉시 무너졌고, 여전히 바리새파 사람들은 건재하였다. 이들은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온 [구전 토라]를 모으고 되살렸다. 그래서 방대한 지식과 지혜의 백과를 만든 것이다. 이들은 방대한 탈무드의 기록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전념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탈무드 학교를 세우고, 토라와 탈무드를 병행해서 공부하도록 강권하였다.

신명기 11장 9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자녀들에게 가르치라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라마드 RAMAD]이다. 이는 단순히 가르친다는 의미가 잇지만, 동일하게 배우다라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운다.
교육학에 보면 가장 높은 학습효과는 ‘가르치는 것’에서 온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오랫동안 교육현장의 경험으로 보면 가장 잘 배우는 사람은 ‘학생보다 선생’이다.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 학생의 입장과 선생의 입장을 동시에 가진다.
가르치다와 배우다가 동일한 어원으로 되어 있다면, 또 생각해 볼 것이 바로 ‘읽다’이다. ‘말씀을 강론하다’는 구절은 토라를 강론하라는 것인데, 이 강론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성서의 구절을 읽어주고, 그리고 읽어준 것을 풀이해주는 일이 강론이다. 하지만 단순히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준까지 가야 한다. 또한 제한적으로나 부분적으로 가르치고 강론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이 없고 전인적으로 가르치고 강론하라고 하는 것이다.

유대교의 생존을 보장한 것은 바로 이 [강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평생에 자신들의 토라와 탈무드의 지식과 지혜를 얻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자신들의 소중한 문화유산이요 지혜유산을 민족적 생명으로 여기는 것이다 .
앞서 한국에는 뚜렷한 사상적인 것이 없다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아쉬운 것은 한국고유의 것들에 대한 인식수준이 낮을 뿐이다. 세대가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사상적 공백이나 진공상태가 생겨난 것은 [세대간의 대화와 강론의 시간]의 부재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내 말에 공감하기 어렵다면,
저 위에 쓴 [강론]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만일 토라가 단순히 성문서(Written Text)로만 존재했다면 유대교는 멸절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성문으로 된 텍스트를 구문으로 읽었다. 소리를 내어 읽었다. 그리고 이 텍스트를 가지고 토론하고 서로 거침없이 대화하고, 강론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다. 이들은 [입이 살아 있는 민족]이다.

[입이 살아 있는 민족]이라는 말은 필자가 처음 사용하지만, 이들은 단순히 질문만 한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가지고 묵상하면서 그리고 자신들의 생각과 주장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은 탈무드를 [구전 토라 Oral Torah]라고 하였다는 것부터 보면, 이들에게 토라의 텍스트 리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독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저 눈으로 하는 것이요, 하나는 입으로 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을 보라 눈으로 책을 읽는 아이들보다 소리를 내서 책을 읽는 아이들을 비교해보면 이해의 속도나 이해의 량이 다르다는 연구보고가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소리를 내어 읽는 것이나 낭독은 큰 학습효과를 가진다. 그리고 읽는 재미도 주어진다.

탈무드가 왜 유대교에서 이렇게 중요한지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것이 아니지만 한국화한 좋은 경전과 텍스트들, 번역서들이 많다. 이러한 것을 그저 눈으로 읽고,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소리를 내어서 읽고, 강론하는 시간들이 많아져야 한다.

한국민들도 유대민들 이상으로 [책의 민족이요, 문자의 민족]이다. 다만 강론하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서 게으르다면 다음 세대가 아니라 현세대에서부터 위기를 자초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친구와의 지적 친교를 도모하는 [하브루타] 방식의 [성경읽기나 고전읽기]는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하브루타가 단순히 학습법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무너지는 일이다. 학습법을 넘어서 생존과 발전을 도모하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탈무드가 밝혔듯이 [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다] 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브루타는 강론이 되어야 한다.

강론과 설교는 엄연히 다르다. 강론은 homily라고 하며, 설교는 Sermon이라고 한다. 강론은 '누구와 말하다'의 의미가 있다면, 설교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서로 구별되어 있다. 설교는 권위적인 면이 강하다면, 강론은 서로 평등하거나 수평적인 면이 강하다. (강론에 대해서는 2세기 오리게네스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성경말씀이나 경전을 영적 차원에서 더 발전시키는 해설로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기승전결에 구애받지 않는 특징을 갖는다.)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을 읽고, 남을 읽고, 사회를 읽고, 세상을 읽어나가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것도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이 같이 소리를 내서 읽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이 강론하고, 아들과 딸이 서로 듣고 배우는 일에 게으리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개인과 가정의 시대이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학습교재를 널려있다.
예전처럼 도서관에 가거나, 멀리 대학교까지 가지 않아도
충분히 인터넷을 활용하여 원거리 학습도 할 수 있다.
학습하기 좋은 시대이다. 이 시대에 주어진 문명의 이기를 잘활용하여 우리도 우리 자신도 성장하고, 가정도 성장하여, 사회와 국가를 살찌게 해야 한다. 교육만이 살 길이라면 더욱 그렇다. 성경이 아니어도 좋다. 다른 좋은 책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서로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평생교육의 시대이다. 이제는 허송세월하지 말아야 한다.
유대인들이 세대간에 탈무드와 토라를 읽으며 강론하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듯이 우리도 텍스트나 고전을 가지고 세대간에 서로 대화하고 강론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서로 유대관계도 좋아지고, 친교가 이루어지며, 신뢰가 더욱 생겨서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일들]이 크게 일어날 것이다.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