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와 사서삼경
위대한 것은 세월과 국경을 초월한다.
최근 들어서 동양고전에 흥미와 취미를 붙이고 있다. 어려서부터 한문학을 하신 아버지 밑에서 한자공부를 하였다. 한자는 표의문자이기 때문에 그 의미와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한자를 한자 한자 열심히 공부하면 반드시 ‘뜻이 있는 사람’이 된다.
아버지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설명을 하시는데 당시로는 초등학생들은 도저히 모르는 내용을 들었다. 이순신(李舜臣) 장군에게는 형님이 있는데, 그 형님의 이름이 이요신(李堯臣)이요, 그리고 그 장군은 순신이 되었는데, 이 요신의 이름은 바로 요임금을 말하고, 순신은 순임금을 말한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나라를 사랑과 평화로 다스렸으며, 정의롭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던 임금들이다. 그러한 임금들은 수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인구(人口)에 회자(回刺)가 되고, 그분들의 이름을 따라서 후대인들이 자녀들의 이름을 지었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위대한 것은 세월과 국경을 넘는다’ 라는 것이다.
나는 성서를 가르치고 탈무드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아울러 동양철학이나 사상도 익히고자 하는 것은 바로 축적된 지혜를 배우고자 함이다. 많은 크리스찬들은 동양의 [사서삼경]을 익히는 것을 게을리하거나, 아예 배척한다. 이는 [반지성주의]의 결과이다. 그렇다고 성서를 잘 알거나, 탈무드를 잘 아는 것도 아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거나 크리스찬이 아닌 사람들도 자신들 나름대로 형성된 사상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열심히 인문학이나 다른 학문들을 익히는데, 많은 수의 크리스찬들이 지성과 신학을 게을리 한다면 어디가서 자신들의 뜻을 펼칠 수 없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조상의 전통과 지혜를 고리타분하게 여겨 배우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탈무드나 사서삼경도 [조상의 물려준 지혜의 산물]이다. 한국 사람들이나 중국인들은 이제 명심보감이든 사서삼경이든, 읽기 편한 성경이나 불경이든 읽지 않으려고 한다. 지독하게 읽지 않으니 No brain들이 늘어간다.
그러나 유대인 자녀들은 지금도 조상의 지혜와 전통을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보다 더 귀중하게 여긴다. 조상의 전통과 지혜가 하드웨어라면 학교 지식은 소프트웨어가 된다. 소프트웨어가 발달해도 하드웨어 용량이 적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유대인은 전통과 지혜는 지식을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해, 자녀의 하드웨어를 먼저 늘린 뒤 학교 교육을 더한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큰 인물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보여진다.<현용수 , 쉐마교육>
탈무드는 ‘위대한 연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탈무드를 연구하는 자세로 익히지 않으면 도저히 탈무드의 세계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유대인들은 이 탈무드를 보존하고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목숨 걸고 연구하고 후대를 위해서 가장 강력한 [교육교재]로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사서삼경도 ‘위대한 연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서라면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말한다. 삼경은 <시경, 역경, 주역>을 말한다. 유교의 발원지인 중국에서부터 사서삼경은 근동 국가들인 한국과 일본 그리고 베트남과 여러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나는 탈무드와 사서삼경을 서로 연결지어 생각해보기로 하였다. 무슨 연관관계(association)이 있기에 그럴까? 하브루타를 해보자. 아마도 한국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런 글을 읽고서 흥미를 유발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 있다.
《탈무드》는 랍비(유대교의 지도자)와 그 제자들의 문답형식을 일부 취하고 있는데, 사서삼경 중 《논어》 역시 공자와 그 제자들의 문답을 중심 기술방식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두 경전만 보아도 [질문의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생들은 많아도 제자가 없고, 선생들은 많아도 스승이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 탈무드를 공부하고, 사서삼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문답형식]으로 되어 있는 경서들을 통해서 [제자됨과 스승됨]으로 나아가게 된다.
선불교의 경전을 보아도, [우문현답]이라는 말이 나온다.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현명한 대답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스승이요 현자이다. 아니면 현문우답을 하든가...
<나를 다스리는 법>
이 두 경서들의 공통점은 ‘나를 다스리는 법’을 강조한다.
모든 일은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큰일을 세우기 위해선 작은 것을 먼저 돌보아야 하며,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선 '나'의 근본을 먼저 닦아놓아야 한다. 성서 고린도전서를 보아도,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큰 일에도 충성된다”는 구절이 있다.
사서삼경에서 가장 처음 공부하는 《대학》에서는 이 이치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표현한다. 자기 몸을 수양하고 가정을 가지런히 하여 나라를 어질게 다스리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천하를 평정하는 일도 몸을 수양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니 역시 진리의 근본은 나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평천하(平天下)자체는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수신의 최종 목적은 바로 평천하에 있으니, 수신(修身)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준다. 최근에 수신학(修身學)이라는 중국의 학문분야가 있다는 것을 보면서 놀라웠다.
한국에서는 수신학(修身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고,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만 알아도 우리는 겸허하고 투명하게 학문에 정진할 수 있다. 하브루타는 바로 이런 자세로 하는 것이다. 속된 말로 개나 소나 다 하브루타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오만이고 독선이다. 수신(修身)이 안된 사람이 하면 이것은 득(得)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독(毒)이 된다.
《탈무드》에서는 자신을 수양하는 방법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을까? 랍비 힐렐은 자신을 깨끗이 유지하는 일을 큰 선행이라고 보았다. 단정한 일신을 선행의 결과물이라고 표현할 만큼 유대인들은 자신이 먼저 청결한 사람이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은 무엇이든 손을 닦는 일이 바로 마음을 닦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식사하기전에 반드시 손을 씻고, 그리고 식사후에도 손을 씻었다. 그리고 다른 집에 가면 손님들에게 반드시 씻을 물부터 내었다. 그래서 손이 깨끗한 사람이 양심이 깨끗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심지어 손씻기를 감사하는 기도문도 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전염병이나 역병이 돌아도 많은 이들이 건강하게 생활을 하였다.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에도 탈무드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유대인들의 청결습관이 갑자기 뜨기도 하였다.
<겸손과 겸허를 강조>
두 경전들은 서두에서부터 수신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겸손함과 겸허함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를 강조한다.
‘자기 신분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애쓰는 자는 저 스스로 인격에 상처를 내는 것이다.’라고 하며 자만에 빠지지 말 것을 전하고 있는데, 이와 비슷한 구절이 《논어》〈학이편(學而篇)〉에 기록되어 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꾸짖어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산에 있는 난초는 스스로 향기를 내되 전혀 자신을 드러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면 먼저 포지션부터 정한다. 그리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하면서 자기과시의 늪에 빠진다. 그럴때 스스로를 제어할 줄 모르면 군자라고 할 수 없다.
하브루타를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만심을 크게 경계해야 한다. 진짜 실력있는
사람들은 깊은 물과 같아서 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다. 빈깡통과 빈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나는 이런 사람을 수시로 본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겸양지덕(謙讓之德)으로서 배움을 얻는 데에 자존심을 장애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솔로몬 탈무드》를 보면 현명한 사람이 되는 일곱 가지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
1) 자기보다 현명한 사람이 있을 때는 입을 다문다.
2) 남의 이야기를 중단시키지 않는다.
3) 대답할 때 서두르지 않는다.
4) 언제나 급소(急所)를 겨냥하여 질문(質問)하고 이치(理致)에 닿게 대답한다.
5) 먼저 시작해야 할 일부터 착수하고 나중에 해도 괜찮을 것은 맨 뒤로 돌려둔다.
6)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한다.
7) 진실을 받아들인다.
탈무드는 간단한 말로 겸양지덕을 표현하지만, 그리 간단치가 않다. 탈무드를 유대인들은 ‘성전’이라고 부른다. [거룩한 경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읽을 때는 거룩함과 공의(公儀)로움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탈무드의 가르침에 6번째에 해당하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한다.'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 갖춰야 할 자세로서 언급된 것이다. 《논어》<위정편(爲政篇)>에서 공자가 제자인 중유(자로)에 한 말 또한 이와 같은 의미이다.
내가 아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 그러나 아는 것을 안다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해야만 정말 아는 것이다.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공자는 지식을 아는 것을 알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데 있다고 밝혔다. 놀라운 것은 인문철학의 선구자인 소크라테스도 크세노폰이라는 제자의 질문인 ‘지식’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아는 것을 안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데 있다”라고 하였다. 놀랍지 아니한가!!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세월과 장소를 초월하여 서로 지적 교류(交流)를 한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겸손하려면 혀를 조심하라>
《탈무드》와 《논어》에서는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 중, 혀를 통해 나오는 '말'이나 그럴듯한 변명 등에 대해 특히 경계하고 있다. 《탈무드》의 아주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에 그것이 잘 나타난다. 나는 탈무드중에서도 이 대목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어느 랍비가 어린 사환에게 심부름을 시키며 시장에 가서 맛있는 것을 사오라고 일렀다. 사환은 소의 혀를 사서 돌아왔다. 이틀쯤 후에, 랍비는 다시 그 사환에게 오늘은 값싼 것으로 먹을 만한 것을 사오라고 일렀다.
이번에도 어린 사환은 소의 혀를 사서 돌아왔다.
랍비가 말하였다. "저번에는 맛있는 것을 사오라니까 혀를 사 왔고, 이번에는 값이 비싸지 않은 것을 사오라고 했더니 또 혀를 사 왔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사환이 대답하였다. "혀가 아주 좋으면 이보다 좋은 것이 없고, 나쁘면 이보다 더 나쁜 것이 없습지요."
아마 그 당시에는 가장 맛있는 부위가 [소의 혀] 였던 것 같다. 나도 그래서 소의 혀를 먹어보았는데, 이를 한자로는 우설(牛舌)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처럼 맛있는 것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 탈무드의 이 스토리를 기억하였다.
겸손에 처하기를 바라면서 군자로서는 혀를 조심해야 한다.
요즘이나 예전이나 정치인들은 혀를 사용하는 것에서 못난 사람들이 많다. 대학을 S대를 나오고, 박사까지 한 사람도 남을 비하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혀의 권세’를 허비한다. 그런 사람들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혀’가 찰 노릇이다.
이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논어》〈공야장편(公冶長篇)〉에 등장한다.어떤 사람이 말했다. "옹(공자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염옹)은 어진 대신에 말재주가 시원찮습니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왜 말재주가 필요한가? 말재주로 사람을 대하면 상대로부터 미움을 받는다. 그가 어진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말재주가 왜 필요한 것인가?”
[或曰 “雍也, 仁而不佞.” 子曰 “焉用佞? 禦人以口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用佞.”]
공자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화려한 말재주를 펼치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하였다. 보이스 피싱(Voice fishing)을 당하지 말라는 것이다. 말은 줄이고 실천은 늘려야 한다.
<지도자 - 군자의 역할>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리더쉽)은 시대를 막론하고 학자들이 큰 관심을 가지는 연구주제였다. 어진 우두머리는 곤경에 빠진 자를 구해주고, 환난에 빠진 세상을 평정하여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지도자와 그 지도자의 행실이 중요한 만큼 《탈무드》와 사서삼경 모두 그에 대해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탈무드》에는 뱀의 일화로 지도자의 중요성을 전한다.
뱀의 꼬리는 언제나 머리가 가는 대로 쫓을 수밖에 없도록 맞붙어 있었다. 결국, 꼬리는 불만을 터트렸고, 머리는 자신의 일을 꼬리에 맡겨보았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계속하여 꼬리가 앞장서서 전진을 하였다. 이번에는 타오르는 불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시간이 갈수록 몸은 뜨거워져오고 주위는 캄캄해져 뱀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다급해진 머리가 안간힘을 다하여 구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몸은 불에 타고 머리도 함께 죽었다. 머리는 결국 맹목적인 꼬리에 끌려 다니다가 멸망해버린 것이다.
여기서 머리는 훌륭한 지도자를 뜻한다. 꼬리는 그를 따르는 백성보다는 지도자의 앞에 놓인 위기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머리가 위기 앞에서 주춤하고 제어를 내어주면 공멸의 결과밖에 낳지 않는다. 지도자인 머리는 항상 현명한 판단을 하여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그것이 온순해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참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사서삼경은 사실 칠서(七書) 모두 지도자(군자)에 대해 말하는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자를 만드는 것들, 군자가 해야 하는 것들, 군자가 이루어야 하는 것들 등 대개가 백성을 이끌어야 하는 자들에게 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공자가 중원 지방의 시를 수록하여 엮은 《시경》은 칠서 중 가장 대중적인 시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런 《시경》에서도 역시 지도자의 행동과 태도에 대한 시가 실려 있다.
다음은 《시경》 〈소아편(小雅篇)〉에 실린 시 중 일부이다.
老馬反爲駒(노마반위구) : 늙은 말이 망아지가 되는 것처럼
不顧其後(부고기후) : 뒷일을 경계하지 않은 채
如食宜饇(여식의어) : 먹으면 배부르도록 먹으려 하고
如酌孔取(여작공취) : 마시면 넘치도록 마시려 합니다.
毋敎猱升木(무교노승목) : 가르치지 않아도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듯이
如塗塗附(여도도부) : 진흙에 진흙이 덧붙듯이
君子有徽猷(군자유휘유) : 임금이 훌륭한 행동은
小人與屬(소인여속) : 백성들이 스스로 따릅니다.
백성들은 임금이 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어있으므로 임금이 행동을 삼가고 바른 지도를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거듭 전하고 있다.
<가장 큰 것은 하나로 통(通)한다>
오래된 책들 - 바이블, 고전 탈무드, 고전 사서삼경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이 역시 《논어》<위정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 성어가 속한 전체 문장은 “옛것을 알고 새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可以爲師矣.]인데, 옛것과 새것 모두에 치우침이 없어야 남에게 가르침이 될 만한 것이 된다는 뜻으로 볼 수 있겠다.
《탈무드》와 사서삼경이 아무리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 경전이라 할지라도 그 내용을 모두 따라야 한다거나, 옳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탈무드를 연구하고, 사서삼경도 수집하여 읽어본 필자로서는 [지금 시대와 전혀 맞지 않는 내용]도 수시로 발견한다. 그리고 [미신적이고 비합리적인 부내용]도 수시로 발견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진리를 추구하고 자기 발전과 자아실현을 도모하는 최적의 인문학서]라는 것을 발견한다.
이 경전들은 분명 ‘옛것’에 해당하고, 자연히 달라진 시대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여전히 공부할 가치가 있다. 한가지로 치우침을 막기 위해서, 가르침이 될 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다.
인류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영향을 미치는 큰 지혜는 쉬이 변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선학(先學)의 업적을 낡은 사상이라는 이유로 천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옛 현자들의 말이 지금과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학문으로써 익혀 착오(錯誤)의 반복을 없앨 것이며, 통(通)하는 부분이 있다면 진리로써 내면에 받아들이면 된다. 진보와 발전은 그런 마음가짐에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닐까.
[축적된 지혜는 세월과 국경을 초월하여 인생들을 가르치며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서로 질문하고 토론하는 하브루타 공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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