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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토라와 탈무드 이야기

현문현답, 성경과 탈무드 속의 결혼에 대한 질문, 그 현명한 대답

by 코리안랍비 202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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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혼은 신성한 것 - 성경과 탈무드 속의 결혼식 - 사진
    구글출처 이미지 - 결혼은 실전이고 팀웍이다.



결혼에 대한 질문, 그 현명한 대답
(창세기 2장 24절을 중심으로) 


선불교에 보면 [우문현답(愚問賢答)] 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답을 구한다’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어리석은 질문들’을 던진다는 것이다. 그 질문이라는 것이 자신들의 고민이나 들어주는 질문들이 많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선사나 고승들은 반드시 현명하게 말해주어야 한다.

나 자신도 수없이 많은 ‘어리석은 질문들’을 받는다. 그 질문이라도 고마워서 나는 최대한 ‘현명한 답변’을 해주려고 애를 쓴다. 그런 질문을 잘 받아주는 사람을 나는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정확하면서도 확실한 대답이나 대안을 내 놓으려고 애써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선생자격’이 전혀 없다. 사범대학을 나오고, 교육대학을 나왔어도 학생들의 질문에 대해서 현명하게 답변해주고, 그리고 학생들의 어느 질문에도 친절하고 침착하게 답변해주는 ‘포용성 Inclusiveness’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돌에 새긴 나의 글씨 - 삶



그런데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는 말 대신에 ‘지문현답’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요즘 세상에 솔직하게 말해서 우문현답은 없다.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답은 없다” 지문현답이다. “지혜로운 질문에 현명한 답이 있다” 지혜로운 질문을 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지성과 탐구력이 있어야 한다. 단순한 ‘질문만들기’는 시간낭비일 뿐이고, 비생산적이다.

얼마 전 S 그룹 계열사에서 같이 근무했던 선배가 책을 냈다. 그 책은 “최고의 석학들은 어떤 질문을 할까?”이다.

그 책을 보면서 평소 ‘질문하기’를 즐겨하는 나 자신이
만들어내는 질문이 지극히 평범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질문만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질문은 본질적으로 구체적이면서도 확실해야 하지만, 구체적으로 확실한 것은 뻔하고 결과적인 것이고, 정말로 추상적이지만 확실한 명답을 찾아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석학들의 질문은 쉬운 듯 하면서도 상당한 고민과 고뇌를 요구하는 질문들이 많았다. 추상적이면서도 예리하고,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변화를 도출해 내는 질문들이 많았다.

얼마 전에 어떤 목사 겸 노교수로 부터 창세기 2장 24절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내가 오히려 질문을 해야 하는데, 많은 책을 쓰신 교수답게 이스라엘 현지에서 공부한 젊은 나에게 물어보시는 것은 겸손함과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질문은 결혼에 대한 것이었다. 창세기 2장 24절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 대목은 후대의 성경 기자가 중간에 추가하여 끼어 놓은 구절이다. 이 구절에 대한 수많은 연구자료와 설교자료, 그리고 주석자료들을 살펴보았다. 약 50편은 본것 같다. 그런데 그 내용이라는 것이 천편일률적으로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한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신학자나 철학자라도 깊이 파고 넓게 연구하지 않는다면 ‘겉핧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결혼에 대한 명언문구들은 무수하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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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출처 이미지 - 바닷가에 새긴 러브 마크하이네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21세기 들어서, 요즘의 청년들의 결혼관을 보면 성경이 말하는 결혼관과 상당히 위배되기도 하고, 세속의 풍속을 따라 제멋대로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결혼 자체를 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생각을 가진 청년들이 많다. 그런 청년들은 부모세대가 너무 고생하는 모습과 더불어서, 그리고 부모세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다. 행복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결혼에 대해서 강하고 긍정적인 입장을 갖는다. 사랑하며 미래를 약속한 사람과 행복한 결혼을 하고, 행복한 가정을 갖겠다는 것(home sweet home)을 기본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그런데 많은 교회현장의 청년들도 결혼 자체에 대해서 무척 회의적이기도 하고,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가속도에 따라서 자신의 현실과 결혼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 교수님의 질문 속에서 결혼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부부가 연합을 하고 일체가 되어 가는 것인데 이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하고자 다각도로 연구하였다. 결혼이라는 것은 사실 사회학적으로 가장 사람을 안정적으로 만드는 제도이면서 인간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도록 하게 한 생산적인 기능을 갖는다.

물론 성서는 ‘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옆구리의 갈비뼈를 취해서 여성 하와를 만드시고 그녀를 ‘에제르 케네게도 - 도와주면서도 반대하는 사람 ’ 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런데 그 둘이 서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 한 몸을 이루는 의식을 갖게 하신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 육체적인 관계를 가짐으로서 그 속에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부부의 사랑의 관계는 무조건적인 사랑인 아가페적이고, 친구간의 우정같은 필레오적인 부분, 그리고 육체적인 쾌락의 에로스 적인 부분들이 서로 공유되고 공존한다.

“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잇샤(’is∨-s∨ah)는 “남자”를 뜻하는 이쉬(’is∨)라는 말에 여성형 어미가 더해져 이루어진다. 성경은 성숙한 여자나 가정을 가진 여자를 이샤라고 부르며, 먼저 이쉬라는 남자에게서 취했다는 질서를 부여하고 있다. 영어의 “여자”(woman은 앵글로-색슨어로 wife-man이라는 뜻임)와 “남자”(man)라는 말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다른 여러 언어들에서도 마찬가지다.

  • 결혼 참 어렵다 - 사랑도 어렵다 - 이 어려운 것을 같이 한다.
    구글출처 이미지



생물학적으로도 한 인격 속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갖추어져 있다. 따라서 인격의 분열을 초래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인격 속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이 서로 조화롭게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자신 속에 여성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남자는 여자를 경멸하거나 학대한다. 지나친 가부장적인 의식도 결국 여자를 하대하게 하고 멸시한다. 반면에 자신 속에 남성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여자도 남자를 이해하거나 남자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갖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남성성은 이성적이고 능동적이며 지배적인 정신능력이다. 이에반해 여성성은 직관적이고 수동적이며 수용적인 정신능력이다. 이러한 상이한 성격을 갖고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이라고 하는 인간의식의 두 차원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모든 인간에게 구비되어져 있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여성성이 약한 남자는 직관보다는 이성이 강하다. 그리고 예술보다는 과학이 강하다. 그러면서도 자연보다는 인간이, 그리고 풍부한 직관적인 감각과 상상력을 가진 사람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성이 발달한 사람이 우수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결혼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성적인 부분과 직관적인 부분이 서로 만나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서는 착한 여자를 얻고, 철학자가 되려거든 악처를 얻어라” 라는 말을 하였다. 이 말속에서 보면 여성적인 직관과 남성적인 이성이 서로 잘 만나 ‘결혼’하여야 제대로 된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여기서 직관과 이성의 만남은 이성적인 과학정신이 그 가치를 잃어서도 안되고, 그리고 직관적이고 폭넓은 이해와 통찰력이 한 몸을 이루어 조화와 균형상태가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직관적인 상상력과 과학적인 이성이 하나로 결합하면 이성은 풍부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직관적인 이성이 되고, 직관은 체계와 방향성을 가진 이성적인 직관이 된다.


결국 결혼이라는 것은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이다.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살아있는 지식’을 말하였다. 지식을 히브리어로는 ‘아다’라고 하는데, 이는 부부관계를 통해서 생겨난 경험적인 앎을 말한다. 서로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이 부부이기에 부부는 서로 촌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윌리엄 워즈워드의 싯구를 살펴본다.
[틴턴 수도원 위쪽에서] 라는 시인데 무척 인상적이다.
피에서 느껴지고
피에서 느낀 파문이 가슴으로 번져간다
그리하여 본래의 고요함을 간직한 채
순수한 정신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이 싯구를 보면 직관적인 앎이 형성되는 전체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직관적인 앎은 인간 전체를 포괄하는 전인격적인 지식이다. 이 지식은 육체를 상징하는 ‘피 blood'에서 출발하여, 감정의 센터인 ‘가슴 heart’을 지나서, 마지막으로 순수한 정신 곧 이성이 아니라 수동적인 지성이라고 하는 직관적인 정신에 도달하는 것이다.

직관이라는 것은 과학과 철학의 지식처럼 실험이나 관찰 또는 개념이나 이성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직관은 인간정신이 스스로의 정신에 스스로를 반영함으로써 얻어지는 일종의 깨달음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바로 자기 자신을 반영하여 스스로를 깨닫는 직관력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은 항상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다.

자아의식은 인간은 무엇인가를 알거나 경험하고 있는 주체인 [나]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여기에 직관은 육체차원에서 맨 먼저 생겨난다. 그리고 육체차원에는 당연히 성(Sex)도 포함된다. 성 그 자체는 앎의 수단이다. 이런 의미에서 남편과 아내의 성적인 결합을 ‘안다’라고 말하는 히브리인들의 표현은 의미심장하다. 창세기에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였다’ 라는 대목이 바로 바로 남자와 여자가 서로 결합할 때 자식을 잉태한다는 개념이다.

단순하게 인간에게 있어서 성적인 결합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과정만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앞서서 말했듯이 성적인 결합에는 육체와 감정과 애정이 모두 참여한다.

결혼이라는 단어가 갖는 것은 상당히 신비롭고 신기한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만나서 하나가 되고, 가정을 이루고, 그리고 연합하여 사는 것’ 이상이 그 단어 속에 담겨져 있다. 하나님은 교회나 어느 종교보다 가정을 먼저 세웠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인간의 행복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성적인 결합은 더 깊은 차원이 있다. 인간은 감정 차원의 결합을 통하여 남자는 여자를 알게 되고, 여자는 남자를 알게 된다. 그 결과 남자는 자신 속에 있는 여성성을 깨닫게 되고, 여자는 자신 속에 있는 남성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일종의 자아에 대한 깨달음인 것이다. 성적인 결합에도 자아에 대한 깨달음이 크게 열려 있는 것이다.

깊은 사랑의 결합은 황홀한 상태를 가져다 분다. 이 상태에서 자아를 넘어서서 자아를 초월한 존재의 근거에 대한 깨달음의 문이 일어난다. 결혼을 통해서 우리는 부모를 이해하게 되고, 결혼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혼의 문을 통해서는 남자와 여자라고 하는 이원(二元性)은 사라지게 되고, 사랑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둘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됨’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은 완전한 사랑을 통하여서 자기가 독립된 개체가 아니고 사랑의 나눔을 통하여 온 세상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며 또 그러한 상태를 이루기 위해서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성과 직관은 둘 다 하나만으로 불완전하다. 완전해지기 위해서 서로가 만나서 연합하고 한 몸이 되어야 한다. 직관 그 자체는 방향성이 없는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맹목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래서 직관은 감정에 쉽게 압도당한다. 이것은 여성이 가진 부정적인 측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직관이 강하고 이성이 약하면 미신적인 믿음이나 종교적인 열광주의에 자주 빠지게 된다. 그것은 바로 불안정한 직관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직관에 능동적인 지성의 빛이 비치게 되면 인간은 주변 세계에 대한 감정과 상상력에 근거한 경험이 발달하게 된다. 상상력과 이성, 즉 수동적인 지성과 능동적인 지성이 하나가 되어간다. 이렇게 되면 직관적인 이성, 또는 이성적인 직관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마태복음 9장을 살펴보자.
9: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19: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19: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19: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원래 ‘연합한다’ ‘합한다’는 두 장의 종이를 서로 ‘붙이다’라는 어원을 갖는다. 두 장의 종이를 아교로 붙이게 되면 한 장이 된다. ‘두터운 한 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한 장이 된 종이를 나누게 되면 반으로 찢어야 한다. 반으로 찢게 되면 그로 인하여 받는 인간적, 사회적 고통과 상처가 크게 된다. 예수의 말씀을 보면 결혼은 결국 둘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인 둘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인 둘’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결혼이 ‘인격성과 연합성’을 둘다 갖는 신비적이고 특징적인 결합(combination)이라는 것이다.

결혼은 세계가 다른 두명의 사람,
하나는 화성에서 왔고, 하나는 금성에서 온 사람이
서로의 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수용과 포용이며,
그리고 플러스 극과 마이너스 극이 서로 있어야 전기가 통하듯이 서로 음과 양의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며,서로의 육체와 정신이 결합하여 육체와 정신을 가진 인간으로서 살아가면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의식의 깊은 곳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의 영원한 근거와 관련을 맺게 되는 일이다.
그리하여 결혼생활을 통하여 실재적인 변화를 체험하고 궁극적인 실재의 초월적인 신비를 밝히게 되며, 그에 이르는 길을 배우게 된다.

결혼은 그리하여 감각적인 차원에서 신학적이고 영적인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결혼은 저 하늘의 천사가 이 땅의 대지위에 하얀 꽃잎 하나 떨구는 것이다. 결혼하기 전에 사람들의 행복한 결혼생활의 80%가 이미 정해진다. 결혼은 둘이 하나가 되는 팀웍이다. 그리고 결혼은 책임이다. 결혼은 인간이 만든 제도중에서 가장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결혼을 '키두신 - 거룩한 행위'라고 부르는 것이다. 결혼을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 결혼의 행복 - 잘 맞추는 것이 중요 - 서로 극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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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문현답을 하느라 고생한 보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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