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지만 현실, 진실이지만 허구인 세상에 대한 저항
명작 <<잃어버린 것들의 책 - 존 코넬리>>
“모든 어른들의 마음속에는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백설 공주와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빨간모자에 바치는
작가의 찬사를 나는 <잃어버린 것들의 책>에 바친다"
이 작가의 추천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게 되었고
박완서 선생님의 추천 때문에 읽게 되었다.
얼마전에 고 국민여류작가 박완서 선생님의 책을 보다가
이 [잃어버린 것들의 책]에 대한 소개를 잠시 보았다. 한 소년의 성장을 다룬 이 책에 대한 찬사가 잠시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당장 구입하여서 읽기 시작하였다. 책은 ‘그냥 읽는 것이다’ 대가의 권장도서는 반드시 닥치고 읽어야 한다.
이 책은 두껍다. 그런데 유쾌하면서 상쾌하고 그리고 통쾌하게 읽은 책이다.두꺼워봐야 다 읽으면 되는 것이다.
이 책을 나도 이 글을 읽는 이에게 권장하려면
무진장 애를 써야 한다.
그래서 [명작에게 길을 묻다]라는 식으로 해야
조금은 관심을 가질 법하다.
허튼소리라고 생각지 말라.
이 성장소설은 처음부터 이렇게 시작된다.
『옛날 옛적에,모든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옛날 옛적에, 엄마를 잃은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오랜 시간에 걸쳐 엄마를 잃었다, 엄미를 죽음으로 몰고 간 병마는 비겁하게도 살금살금 다가와서 몸속부터 갉아벅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정신까지 파고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의 눈동자는 총기를 잃었고 피부는 창백해졌다, 조금씩 엄마를 빼앗기면서 소년은 엄마를 영원히 잃게 될까봐 두려웠다 .......』
이렇게 시작되는 글에서 예사롭지 않은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사람이 나이가 먹고 기억력이 감퇴하고 이제는 여러 인생의 경험과 체험들마져 가물가물해진다고 해도, 잊지 못하는 옛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있다. 이것은 정말 그 사람만이 가진 ‘소중한 자산’이다.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옛이야기들은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동화를 들려주는 시간은 마치 동화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준다. 그리고 동화속에서는 나쁜 사람들은 벌하고 착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는 해피앤딩으로 이어진다. 무서운 동화도 있고, 잔혹동화도 있지만, 어느 잘못된 길에 들어선 사람도 그 힘든 시절을 거쳐서 개과천선하여 바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또한 동화속에서는 식물과 동물들, 인형들과 여러 사물들과도 대화하면서 교감하는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계이다.
이런 이야기의 세계는 엄마가 읽어주든, 아빠가 읽어주든 언젠가는 벗어나야 할 세계이기도 하다. 동화는 어린이들에게 들려주지만 그 어린이는 언젠가 엄마든, 아빠든 떠나 보내야 하는 잔혹한 현실을 맞기도 한다.
나는 지금 오늘날의 오래 살고 건강한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 부모들은 일찍 단명한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모두 공통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데이빗도 12살 무렵에 엄마가 병들어 죽게 된다. 물론 데이빗은 그 엄마를 살리려 무진 애를 썼지만 결국 엄마는 소년에게 이야기만을 남기고 떠나게 된다.
스릴러 작가로 널리 알려진 존 코널리의 이 독특한 작품은 세상과 담을 쌓고 동화 속 세상으로 빠져든 한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되묻는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면서 세상의 현실과 슬픔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열두 살 소년 데이빗은 엄마를 잃고, 연이은 아빠의 재혼으로 새엄마와 이복동생이라는 가족을 맞이하게 된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서 눈을 돌린 채, 데이빗은 다락방 침실에서 동화책을 읽으며 엄마를 그리워한다. 소년에게는 어머니가 곧 이야기였다. 소년이 잃을까 봐 전전긍긍해 한 건 엄마가 아니라 이야기였다. 이 세상의 의미 있는 것이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누군가가 읽어줄 때 살아나는 특이한 생명체라고, 읽어주지 않으면 이야기 속 세상이 결코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건너 올 수 없다고 그렇게 속삭이고 속삭이던 엄마가 결국은 죽는다. 소년은 엄마와 공유하던 이야기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추운 밤 담요를 뒤집어 쓴채로 홀로 책을 읽는 고독한 독서의 세계로 넘어간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책들이 소곤거린다. 엄마가 사랑했던 신화와 동화 속에 빠져들면서 데이빗의 현실과 상상은 뒤섞이기 시작한다.
“그 책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고 그 오랜 세월을 살아남을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책이 사라진 뒤에도 이야기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오랫동안 이야기로 메아리로 울려 퍼진다. 그 이야기들은 현실도피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현실이기도 하다. 데이빗의 엄마가 말했던 것처럼 오래된 이야기의 세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분리되어 그 나름대로 존재해왔다. 그러나 그 두 개의 세계를 구분하는 벽은 너무나 얇고 약했고 언젠가부터 그 두 세계가 섞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꼬부라진 남자가 데이빗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유럽 전역에 몰아치던 전쟁의 포화는 데이빗이 살던 곳에도 찾아온다. 폭격이 심하던 어느 날, 데이빗은 폭격기를 피해 나무 둥치의 구멍에 숨었다가 낯선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딛게 된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왕이 갖고 있는 모든 비밀을 간직한 책인 '잃어버린 것들의 책'을 봐야 한다는 숲 사람의 조언에 따라 왕을 만나기 위한 여행을 떠나는데…. 그 데이빗의 여행과 함께 우리도 함께 여행을 떠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데이빗과 함께 여행을 가본다.
이 소설은 동화 속 세상이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시절의 이야기를 환상적으로 풀어놓는다. 데이빗은 두려움이 현실이 되는 동화 세계에서 자신이 읽었던 동화 속 주인공들을 만나면서 책임감과 사랑, 슬픔과 인내, 두려움과 용기를 배우게 된다. 굳게 마음을 닫았던 소년은 동화 세계에서 여러 사건들을 겪으면서 조금씩 어른이 되어간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등장하는 싱클레어가 연상되는 데이빗이다. 사람이 성장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해주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 흘러가는 시간이 그리 평탄치 않은 소년에게는 다른 소년들과 달리 성장한다.
이 책에서 데이빗은 인생의 냉정한 리얼리즘(Realism)을 미리 만났다. 소년으로서 겪었을 그 리얼리즘은 그 소년을 상상의 세계 또는 환타지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것은 어찌보면 엄마의 세계에 대한 동경의 또 다른 소년의 일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따뜻한 헤피엔딩을 맞이한다.
이 책은 동화라는 소재를 가지고서 사람들을 옛날 이야기들의 세계로 초대한다. 나이가 든 소년인 우리 기성세대들에게 누구나 가슴 한편에 옛이야기 한 두편 쯤은 저장하고 산다. 그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던 이야기이고, 여러번 읽었던 이야기이다. 데이빗은 동화속에서 아름답고 황홀한 체험을 하며 다시 현실속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현실속에서 당당한 소년이 된다. 엄마를 잃은 후 새롭게 맞이한 의붓엄마, 그리고 의붓동생과의 화해에 이르고 동생에게도 책임감을 느낄 줄도 아는 어른이 되어간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공간이 또한 만들어 준다고 한다. 공간은 현실적 공간과 이상적 공간으로 나누어진다. 일찍 슬픔과 시련을 겪은 사람들에게 현실적 공간은 답답하고 어렵고 힘든 공간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상적이고 판타스틱한 공간이 존재한다. 그 공간속으로 잠시 들어가서 현실적인 공간에서 누려보지 못한 유쾌함과 행복, 기쁨과 심지어 기적도 경험한다. 현실도피적인 쾌감을 거기서 맛보는 것이다.
성서에 보면 에스겔서가 있다. 나는 이 에스겔서가 마치 동화책처럼 다가온다. 처음에는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나온다. ‘여호와 삼마’라는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는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 나오게 된다. ‘여호와 히네’ 성서 에스겔서를 공부하다보면 고난과 아픔속에서도 이상향을 향한 소망으로 자신들의 힘든 처지를 극복한 유대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은 현실은 잠시 잠깐이지만 영원한 복락을 꿈꾸면서 자신들의 힘든 현실을 겨우 겨우 이기면서 살아간다. 이들은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결국 1948년 이스라엘 나라는 에스겔의 환상대로 세워지고, 지금 이스라엘은 신생국가에서 성장한 국가로 발돋움했다.
에스겔서를 보면서 우리가 이 세상을 답답하고 무겁고 힘든 곳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만 발견해도 우리가 살아갈 이유와 힘을 더 얻게 된다. 그러면서 이상향이나 가나안복지에 대한 비전을 보게 한다.
요즘 현실세상을 보면 여전히 답답하고 괴롭기만 하다.
늘 문제와 문제로 이어지면서 사람들을 더욱 낙심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고, 지치고 피곤하게 만든다. 어느 정당을 보면 거대 여당이 되었지만 거대 여당으로 뽑아준 국민들에게 도리어 횡포하고 군림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런 정치인들을 보면서 자신의 현실문제나 답답함을 해결하려고 하는 국민들은 결국 실망하고 낙심케 된다. 그것을 어느 시인은 ‘바보놀음’이라고 하였다. 나는 ‘바보들의 행렬이나 합창’이라고 부른다.
데이빗이 본 세상도 그러하였지만 나이가 들어서 본 세상도 여전히 데이빗이 본 세상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가 들어도 상상의 나래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비전을 상실하고 동화를 상실한 것은 필경 우리 자신의 잘못이다. 우리는 여전히 상상력(imagination)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어도 동화를 들어야 한다. 스토리를 들어야 한다.
나는 이 책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권장하고 싶다.
아직 슬픔도 잘 모르고, 고난도 잘 모르고, 아픔도 잘 모르는 청소년들에게 권장하고 싶다. 이 책속에는 어린 시절에 읽었던 동화책들이 여러 권 들어 있다. 그러면서 이 책을 다 자란 어른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그 이유는 우리가 바쁘게 일하고 달려온 3-40대에 기억은 사실 별로 없고 20살안에 일어난 사건들과 추억과 경험이 오래도록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20대에 갇힌 청춘이다. 그래서 나이가 50이 되고, 늙어가도 여전히 10대와 20대의 성장기에 대한 환타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현실이었으나, 이제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환타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한다.
“김선생은 왜 이리 글을 쓰시오?”
“글쓰는 이유는 답답한 현실을 도피하려는 것이고, 그 글에서 자아성찰을 이루어내고, 그리고 나 자신도 행복하고 다른 이들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입니다.”라고 답하였다.
글쓰기가 현실적이라면 그 글은 읽을 가치가 없다. 현실적인 책이라면 기술서나 자격증 책을 보면 된다. 그런데 그것을 책이라고 인간변화를 위한 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글은 사람을 살리는 글이 아니라 죽이는 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현실은 글을 쓰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아는 재미없는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는 희망적이고 꿈과 이을 담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글이 되어야 한다. 글은 동화처럼 쓰면 된다.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글을 읽으며 우리도 동화속의 주인공처럼, 이야기라는 세계의 무대속에 인물처럼 현실도 극복하고, 바르고 건강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는 지혜와 슬기를 배우게 된다. 나이가 들어도 ‘인간다움’을 향하여 가야 한다. 그래야 사는 재미가 있다. 나는 이러한 사는 재미를 ‘행복’이라고 부른다.
우리 속에도 저자의 말대로 시인 네루다의 말대로
아직 그 옛날의 ‘어린이’가 있다.
그 어린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어린이를 찾습니다.
꿈과 비전이라는 그 어린이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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