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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과 고전 이야기

나를 안다는 것과 인류의 고전과의 거리좁히기

by 코리안랍비 2022.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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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안다는 것과 인류의 고전과의 거리좁히기

여전히 사회적 거리두기는 하면서
책과의 거리좁히기는 잘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참으로 읽어야 할 책이 왜이리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신에게 맞는 책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시인이 말한대로,
책이라는 것을 읽어야 책입니다.
읽지 않으면 그저 종이로 된 블록이나 벽돌일 뿐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책과의 거리좁히기가 쉽지 않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말을 몸소 모릅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현대의 문맹자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그저 펼치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지만 그 책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무 책이나 읽는 것도 이제는 시간낭비가 됩니다.

그래서 읽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워도
고전을 중심으로 읽어야 합니다.

기술서적이나 경제경영서적, 심리나 처세를 다룬 책들도 물론 읽어야 하겠지만 인문학 서적읽기를 통해서 자신의 삶 전체로 말하고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전은 가장 오래 오래 살아남은 책이고,
도리어 읽는 이들을 살려내는 책이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읽어야 할 책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할 책이 적어져야 정상입니다.

읽어야 할 책이 많다는 것은 아직도 독서의 폭과 깊이가 적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갈수록 읽어야 할 책이 적어져야 하고,
그리고 가치있는 책 위주로 읽어야 합니다.

가치있는 책, 즉 가치서는 몇번이고 읽어도 좋은 책입니다.
가치서를 읽어야만 그 사람의 가치를 높이는 길이 됩니다.
가치서를 통해서 가치있는 말과 행동이 나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피로감이나 피곤감이 높다고 합니다.
산다는 것이 정말 힘들고 부정적인 것들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피로감이나 피곤감은 역사상 어느때든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돌고 도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입에서 늘 상투적으로 나오는 말은
"힘들어" "힘들어 죽겠어" 입니다.

삶이 그만큼 녹녹치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인가 싶으면 아닌 것들이 나타나고
저것인가 싶으면 여전히 제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그저 사는 것은 뭔지 모르는게 답인가봅니다.
사람들은 여러가지 주어진 많은 외적인 일을 하고
바쁘고 분주하게 생활을 하여도 여전히 내 속에는
뭔가 모를 불안감과 갈등이 존재합니다.

버틀란트 러셀이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것은
과로가 아니라 불안과 갈등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이 책읽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말하는데
분명히 상관이 있습니다. 바로 인류의 고전속에는 바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나는 누구인지, 너는 누구인지, 그리고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진정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디서에 사람으로서의 신의를 지켰는지 못지켰는지를 찾아주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고전읽기의 중요성은 바로
'나는 누구인지'를 삶의 흔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전읽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산도르 마라이라는 작가가 쓴 [열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중요한 인생의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그 동안에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원칙이나 말을 내세워 변명하고,
그런 것들이 과연 중요할까?
결국 모든 것의 끝에 가면, 세상이 끝질기게 던지는 질문에
전 생애로 대답해야 하는 법이네.
너는 누구냐? 너는 진정 무엇을 원했느냐?
너는 진정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 너는 어디에서 신의를 지켰고,
어디에서 신의를 지키지 않았느냐?
너는 어디에서 용감했고, 어디에서 비겁했느냐?
세상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지,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누구나 대답을 하려고 한다네. 솔직하고 안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결국 전 생애로 대답한다는 것일세"

그런데 살아가면서 불안과 갈등을 연속해야 할 존재라면
그것을 차라리 인정해버리는 것이 속이 더 편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과 갈등이 지속되지만 그것은 우리 삶의
일부요 부분이라는 것이지 전체가 아닐 것입니다.
삶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내용도 바로 인문학서나 고전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서의 중요성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고 행동하는 것은 사실 부분적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힘들고 여러운 상황도 부분적이라는 것입니다.
삶은 우리가 살아낸 삶, 인생 그 자체일 것입니다.
우리가 삶속에서 여러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좋은 글을 쓰고,
좋은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 위대해 보이지만, 그러나 삶 앞에서 말은 무력하고 작아보입니다.

진실은 말이 아니라 삶에 있다는 것이지요
(최인아 전 제일기획 부사장의 말 인용)

삶으로 살아낸 기록이 바로 고전입니다.
그 고전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새롭게 합니다.

나를 안다는 것
정말 알듯 말듯한 주제이지만
그 답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나가 누구인지 물어보는 것도 어찌보면 어리석은 질문(우문)이라고 할 수 있고
너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도 어찌보면 현명한 대답(현답)이라고도 할 수 업습니다. 살면서 느낀 것은 "나 스스로가 나를 알지 못하는데, 남에게 물어보아도 나를 알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살면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사는 것도 모르고, 죽는 것도 모릅니다. 그저 살아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에게서 답을 구하는 것은 무용지물입니다.
사람들은 사실 자신외에 사람들에게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남들에게 물어보아야 돌아오는 대답은 "모른다"라는 것입니다.
잘 아는 멀쩡한? 사람들인 박사나 교수에게 물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훈수를 두고, 조언을 해주고, 코칭을 해줄지 모르지만
나의 삶은 오로지 나의 삶으로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식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무식해서도 아닙니다.
피차 지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높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답을 구하는 것에는 그리 자신이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저 자신을 알려는 태도나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고전에서 그 답을 찾든지
아니면 위대한 시인의 시를 통해서 찾아 보아야 합니다.
<유선경 작가의 글중에서 얻은 생각>


인류의 고전중에 고전인 성경을 오래동안 보고,
탈무드를 오랫동안 보았지만 여전히 자기발견이나 가치발견을 이룬다는 것이 쉽지 않음도 발견합니다.
그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구상의 시에서 마치 [죽비소리] 처럼 다가오는 무엇인가 뭉클한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네 마음에다> 라는 시입니다.


네 마음에다


요즘 멀쩡한 사람들 헛소리에
너나없이 놀아날까 두렵다.

길은 장님에게 물어라.
해답은 벙어리에게 들으라.
시비는 귀머거리에게서 밝히라.
진실은 바보에게서 구하라.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길은 네 마음에다 물어라.
해답은 네 마음에서 들으라.
시비는 네 마음에서 밝히라.
진실은 네 마음에다 구하라.


뭐가 뭔지 몰라서 무엇인가 물어보고 싶을 때,
답변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여러가지로 혼란하고 혼돈한 마음의 카오스에서
질서와 창조의 힘을 기르는 것은 고전읽기와 더불어서
자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낸 흔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잠시후 맛있는 커피를 하나 사서
못읽은 책을 더 읽으렵니다.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남는 말 한마디를 던지는
유선경 작가의 [꽃이 없어서 이것으로 대신합니다.]

  • 구글 출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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