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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동식물의 문학사 & 탐험사&세계사

동식물의세계사 6, 인류의 4대 식품, 감자와 고구마의 세계사

by 코리안랍비 2022.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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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4대 식품, 감자와 고구마의 세계사


오늘은 감자와 고구마 1+1 콤보로 동식물의 세계사를 준비해본다.

예전에 읽었던 이해인 수녀의 시집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에 나온 ‘감자의 맛’이라는 시가 먼저 떠오른다.

감자의 맛

통째로 삶은
하얀 감자를
한 개만 먹어도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넉넉해지네

고구마처럼
달지도 않고
호박이나 가지처럼
무르지도 않으면서
싱겁지도 않은
담담하고 차분한
중용의 맛

화가 날 때는
감자를 먹으면서
모난 마음을 달래야겠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해마다 6월이면 하지 감자를 캐러 서산이나 고향 보령에 가곤한다.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감자를 캔다. 감자를 수확하여 1-2박스를 얻으면 그것으로 약 2-3달은 실컷 감자를 먹는다. 일단 나는 감자를 찌거나 삶아서 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을 설탕보다는 하얀 배추속으로 겉절이를 해서 먹으면 세상에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에 사로잡힌다.

물론 겨울이면 고구마를 즐겨먹는다. 가을철이면 고구마 농장에 직접 가서 고구마를 사온다. 물론 시장에서도 살 수 있지만 고구마를 직접 캐는 곳에 가면 가격도 반가격으로 살 수 있고, 캐는 체험도 할 수 있어서 좋다. 이 고구마도 물론 찌거나 삶아서 먹는데 또한 고구마의 성질이 달기 때문에 겉절이랑 같이 먹으면 그 또한 ‘천국의 맛’이다.

감자와 고구마는 맛이 다르지만 탄수화물이 풍부하며 김이 모락모락 날 때 군침을 돌게 하는 대표적인 음식이다. 둘다 나에게는 막강 라이벌이다.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감자와 고구마>

고구마와 감자는 전 세계인들이 즐겨 섭취하는 대표적인 농작물이다. 쌀이나 밀은 주식으로 많이 먹지만, 감자와 고구마도 그에 못지 않게 주식으로 먹는 나라들도 많다. 두 작물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상당히 많은 채소이다.

고구마와 감자는 공통적으로 뿌리채소의 대명사다. 뿌리채소는 땅속에 묻힌 뿌리와 줄기를 먹는 작물로, 땅속에서 자라기에 토양의 질이 수확량과 품질에 영향을 받는다. 고구마와 감자는 모두 중남미 일부에서 서식했으나 이제는 전 세계에서 섭취하는 작물이 되었다. 고구마의 종류만도 2000종이 넘는다. 고구마는 풍부한 영양성분으로 미국항공우주국 - 나사에서도 미래식량으로 인정한 식품이다. 두 농작물의 영양 프로필을 비교해보자.



<몰라봐서 미안해, 감자와 고구마야>

고구마와 감자는 100그람당 칼로리는 고구마가 90칼로리이고, 감자가 92칼로이다. 단백질도 각각 2그람, 탄수화물은 21그람으로 같다. 식이섬유는 고구마가 3.3그람이고 감자는 2.1그람이다. 그래서 장이 좋지 않거나 배변이 불편한 사람은 고구마나 감자를 자주 섭취하며 매우 효과가 있다.

흔히 감자를 ‘땅속의 사과’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프랑스어로는 ‘폼므 드 테레’라고 하는데 줄여서 ‘폼므 - 사과’라고도 한다. 그만큼 비타민 C가 풍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비타민 C 함량은 고구마가 아이러니하게도 더 많다. 또한 고구마와 감자는 식물성 항산화 성분이 풍부하다. 고구마의 껍질에는 포도처럼 안토시아닌이 풍부하다고 한다. 그래서 노화방지에도 좋다고 한다. 음, 그러면 고구마나 감자를 자주 먹어야 하겠다.

일본 도쿄대 의학연구소에 따르면, 고구마가 항암효과가 탁월하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다. 의외로 각종 채소중에서 발암 억제율 1위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고구마다. 우와 우와 우와. 미국 국립암연구소의 연구에서도 고구마에 함유된 베타카로틴과 당지질의 강글리오사이드가 항앙 작용을 도와서 폐암 발생율을 절반으로 낮추었다는 결과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음, 한국인의 사망 1위가 폐암인데 고구마로 폐암을 막아봅시다.

감자의 항산화 성분도 항암효과에 탁월하다는 것도 증명이 되었다. 2017년 미국의 한 주립대학 연구에 의하면, 감자는 대장암을 유발하는 전염증 단백질인, ‘인터루칸 6’을 낮추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팀은 감자를 6주간 먹여보니 다른 식단보다 6배의 항암효과를 높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6주간 감자를 자주 먹어보는 것도 좋겠다. 아마 6월부터 먹어서 7월까지 감자를 자주 섭취하도록 해보자.


<감자와 고구마의 이름과 역사>

감자와 고구마가 처음에 한국에 전래되었을 때 감자는 감저(甘藷)에서 시작되었다. 감(甘)은 ‘달다’라는 뜻이다. 저(藷)는 감자라는 뜻이다. 감저는 즉 단감자, 고구마를 말한다. 사전에서 감저(甘藷)를 찾으면, “감자의 본딧말이고 고구마를 이른다‘ 라고 쓰여 있다.

감자의 본고장은 남미대륙이다. 페루나 칠레의 안데스산맥이다. 페루에서는 감자를 ‘파파 papa' 라고 부른다. 유럽인들은 ’바타타’라고 불렀다. 나중에 potato는 결국 파타와 바타타를 섞고, 이게 파타타를 거치며 정해진 것이다.

처음 유럽 사람들은 이 감자를 관상용의 정원 식물로 키웠으며, 심지어는 최음제로 오인하기도 하였다. 또한 ‘악마의 식물’이라고 하여 심한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심지어 성경속에도 등장하지 않는 식품이다. (LG 사이언스)

 


감자와 고구마 모두 한반도 전래 역사는 200년 정도이다. 남미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다음 중국와 일본을 통해서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고구마가 먼저 들어오고 감자는 나중에 들어왔다. 한반도에 감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20년대이고, 당시에는 청나라에서 들여온 것이다. 흔히 감자는 ‘관북(關北)에서 들여왔다’ 라고 하며 관북음 중국의 접경지대는 의주나 함경도 북쪽을 말한다.

감자는 원래 북저(北渚)또는 북감저(北甘藷)라고 불렀다. 모두 북방감저라는 이름이다. 오주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북저는 일명 토감저라고도 하는데 순조 24-25년에 관북에서 처음 들어온 것이다” 라고 기록되었다. 순조 24년은 1824년이다.


또한 김창한의 [원저보 1862]년 책에 보면,

“북방으로부터 감자가 이 땅에 들어온지 7,8년이 지난 순조 32년에 영국의 상선 로드 암허스트호가 전북 해안에 약 1개월간 머물고 있었는데, 이 배에 타고 있었던 네덜란드 선교사 귀츨라프가 김창한의 아버지에게 씨감자를 주면서 그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기에 감자를 재배하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해사일기>>에 보면 감자 전래전에 고구마가 들어왔는데 감자가 전해지기 수십 년 전 일본 쓰시마를 통해 한반도에 들어왔는데 조엄(1719~1777)은 영조 40년 1764년 6월 18일의 일기에 고구마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한다. “이 섬에 먹을 수 있는 뿌리가 있는데 감저 또는 효자마라 부른다. 효자마는 일본발음으로 고귀(高貴)마라 한다. 생김사는 산약(山藥)같고 무뿌리와도 같으며 오이와 토란과도 같아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진득진득하고 반쯤 구운 밤 맛과도 같다. 날로 혹은 굽고, 삶아서 먹어도 된다. 곡식과 섞어 죽을 쑤어도 좋고, 썰어서 정과(正果)로 먹어도 좋다. 흉년을 지낼 밑천으로 좋을 듯 하다. 이 고구마를 잘 살려 우리나라에 퍼뜨린다면 문익점이 목화씨를 퍼뜨린 것처럼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부산의 동래에서 잘 자라면 제주도 및 그 밖의 여러 섬에도 전파시켰으면 좋겠다.”

<<조엄의 기행문 ‘해사일기’중(中)>>



<고구마에 대한 추가역사>

스페인 탐험가들이 처음 신세계를 찾아 3종의 귀중한 식량자원을 가져왔는데, 바
로 옥수수, 고구마와 감자이다. 그중에서 고구마는 열대작물이다가 보니 서인도제도에서 ‘세계 최초로 대서양을 건넌 버스’인 콜럼버스에 의하여 아일랜드 감자보다 먼저 발견되었다. 고구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카모테 Camote)' 로 불리고, 잉카에서는 바타타 batata라고 불렀는데 이는 포테이토의 유래가 되었다고 앞서서 서술하였다.

유럽으로 흘러 들어간 감자는 처음에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아서 돼지 사료나 전쟁 포로들의 식량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감자는 200년이 지나서 민간에 널리 보급된다.

감자 대중화에 애쓴 사람은 다름 아닌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의 노력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왕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의 재치이다. 프리드리히는 ‘감자대왕’이라고 불리울 정도였다고 한다. 프리드리히는 강제적으로 감자를 재배하도록 명령을 내렸지만 앙투아네트는 궁전 내에서 감자를 키우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는 이 두사람을 기려서 그들의 묘지앞에 ‘감자’를 올려 놓기도 한다.<‘식탁위의 세계사’ 참조>


고구마는 스페인에 전해져서 나중에는 이태리로 전하여진다. 그곳에서 아일랜드 감자가 전하여 지기 전에 오스트리아, 독일, 벨기에와 영국으로 전하여 진다. 지금은 감자와 고구마가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미국과 더불어 아시아 전지역에서 재배된다.



<아일랜드 대기근>

아일랜드 대기근은 1845년부터 1849년까지인데, 이 기간에 대규모의 기근과 역병 그리고 해외이민의 시기였다. 이를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이라고 부르기도한다.
기근은 전쟁, 인플레이션, 흉작, 인구 불균형, 그리고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오판에 의해서 광범위한 식량부족 상황을 말한다. 1800년대초 가난하면서도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하여서 농촌의 농작물에 사람들이 많이 의존하였다. 그들 인구의 절반이 감자에 의존할 정도였다. 아일랜드는 다만 영국의 800년간의 식민지였다.
감자만이 아일랜드 소작농들이 잉글랜드 지주들에게 수탈당하면서도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는 식량이었다고 한다.(이와 관련된 맬 깁슨 주연의 ‘브레이브 하트’ 등 몇 편의 영화가 기억이 난다.) 그런데 감자의 흉작은 아일랜드인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곰팡이에 의한 마름병이 아일랜드 감자생산에 대단한 타격을 입혔다.
각설하고 나중에 100만명 이상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이들중에 상당수가 나중에는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2015년 미국의 어느 인구 서베이에 보면, 현재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인구는 약 3400만명에 다다른다고 한다. 또한 아일랜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살 사는 나라중에 하나가 되었다. 지금도 ‘감자’는 아주 사랑받는 식품이라는 것도 그렇다.


<감자의 중국전파>

중국에서는 고구마가 번서(蕃薯)라고 불리웠는데 전래된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광동에서는 1580년 광주 연안이 동완현 사람이 안남(베트남)에서 가져왔다고 하였고, 복건성에서는 1593년 민강 하구의 장락현의 상인이던 ‘진진룡’이 루손(인도네시아)에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귀국하여 가져왔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이 고구마를 ‘고코이모’라고 한다. 여기에는 전설이 있는데 대마도 사람중에 가난한 효자가 산에서 고코이모를 발견하고 집에 심으로 열매가 주렁 주렁 열려 노부모를 봉양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Wikipidia 참조)




<고구마 전문가 곽상수 박사>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의 곽상수 박사는 ‘고구마 박사’로 통한다. 그는 “고구마는 인류가 당면한 환경.식량.에너지.보건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팔방미인이 산업용 작물”이라고 극찬한다.

그는 첨단 유전체 정보와 생명공학기술을 이용한 분자육종으로 전통 육종기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사막지역, 추운 지역, 공해 지역등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고구마, 전분생합성을 조절해 에탄올 생산에 적합한 고구마, 가축 백신 등 유용성분을 생산하는 고구마등을 개발하고 있다.

그는 고구마의 장점이 ‘북한의 식량문제’ 해결에 1등 공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북한이 열대작물인 고구마는 추위에 취약하다. 그래서 곽상수 박사는 고구마보다는 감자농사를 해보도록 권했다. 그래서 고 김정일도 감자를 “인민의 먹는 문제를 해결할 확고한 전망이 생겼다” 라고 했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The potato eater' 1885>
고흐 작품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기분이 든다.

감자는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라고 풍부한 탄수화물 성분으로 인해서 감자는 곧 유럽의 기근문제를 해결해주는 중요한 작물이 되었다. 특히 18세기와 19세기에 세계적으로 급감한 인구 증가로 인하여서 인구부양문제가 심각해졌을 때 감자나 고구마는 사고 실용적인 농작물로 자리를 잡았다.

고흐의 그림중에 ‘감자 먹는 사람들’이 있다. 그 당시 감자는 가난한 소작인들의 주식이자 생명줄이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서 프랑스에서 미술활동을 한 고흐지만 그도 평소 감자를 즐겨 먹은 화가중에 하나였다.

늦은 저녁 시간, 제대로 된 가구 하나 없는 초라한 집에서 작은 불빛에 의지하여 저녁을 먹는 농부들의 모습이 지극히 소박하다. 그러면서 고된 농사일로 주름 가득한 얼굴들과 거칠어진 손들 그러나 그들의 식탁에는 추수한 감자와 차가 전부인듯 하다. 소박한 농민들의 감자 식탁, 이 식탁은 가난한 고흐에게도 익숙한 식탁이었을 것이다.

등잔에서 나오는 불빛은 겨우 서로의 거무튀튀한 얼굴과 음식을 비추어줄 뿐이지만 앉은 사람 수에 맞춰 차를 따르고 서로에게 감자를 권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소박한 희망이 느껴진다.

고흐는 자신이 만든 이 작품이 가장 훌륭하다고 자평하였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감자를 먹는 농부들을 그린 이 그림이 내가 그린 그림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자화상, ‘해바라기’, ‘씨뿌리는 사람’, '별이 빛나는 밤’등의 세기적 남을 작품을 완성한 고흐가 가장 사랑하는 그림이 바로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고흐는 원래 목사가 되려고 했던 사람이었다.(나도 목사가 되고 싶은 사람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는 사람과 자연의 주는 인상을 그린 인상파 화가가 되었다.
그의 ‘고흐의 편지’ 라는 책을 보면 이 그림에 대한 내용이 있다. 지면이 길어지는 관계로 읽는 이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고흐라는 사람에 대해서 더욱 알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해서 글을 남긴다.

감자와 고구마는 정말 서민의 음식이며, 어찌보면 ‘흙’이라는 것을 통해서 정직하게 얻은 먹거리이기에 농부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작은 등불 아래서 접시에 담긴 감자를 손으로 먹는
이 사람들을 그리며 나는 그들이 마치 땅을 파는 사람들처럼
보이도록, 그런 분위기를 만들려고 애썼어.
이 사람들이 먹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 노동을 통해
정직하게 번 것임을 말하고 싶었어.”

반 고흐에게 아름다움은 그저 화려하게 꾸미거나
차려 입은 귀족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모습, 일상 속에서의 자신의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사물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원해. 숙녀보다는 농부의 딸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
농부의 딸이 입은 헝겊을 댄 흙 묻은 푸른 웃옷과 치마를
햇빛과 바람에 시달리며 색이 바래 섬세한 분위기를 띠지.
그런 시골 처녀가 숙녀의 옷차람을 하면 그녀 안에
진정한 무언가가 상실된다고 생각해.
농부는 밭에서 일하는 면 옷차림일 때가 주일날 정장을 차려 입고 교회를 갈 때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

<반 고흐, 삶을 그리다. 가이드포스트 출판 중(中)>



<김동인의 감자>

[감자]는 고등학교 시절에 교과서에도 잠시 실린 ‘김동인’의 소설이다. 1925년 1월 조선문단에 발표되었다.

그런데 김동인의 감자는 사실 ‘감저’ 라고 하여서 ‘고구마’이다. 줄거리는 대충 기억이난다. 가난하지만 정직한 농사꾼 집안의 딸인 ‘복녀’는 나름대로의 도덕심을 가진 소녀다. 15살 되던 해에 그녀는 80원이라는 돈에 팔려 동네 홀아비에게 시집을 가게 되지만, 부지런히 일하는 복녀와 달리 복녀의 남편은 극도로 게을러서 사람들의 인심을 잃는다. 결국 남편의 게으름으로 전 재산을 탕진하고 평양성 칠성문 밖 빈밀굴로 쫓겨난 부부는 힘든 생활을 하게 된다는 스토리다.

어느날 밤에 중국인 왕서방의 고구마 밭에서 고구마 서리를 하던 복녀는 왕서방에게 들키지만 그의 마음에 들어서 그 뒤로 그와 불륜을 하면서 돈을 받는다. 그 복녀로 인하여서 남편도 돈을 만지면서 복녀의 불륜을 묵인한다. 그리고 복녀는 여차여차하여 낫을 들고 왕서방의 신혼집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사망에 이르게 된다. 그 당시로는 문제작이었다. 나중에 [무진기행]을 쓴 김승옥 감독이 영화화하고,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라는 영화에도 영향을 준다.

김동리의 <감자>는 포테이토가 아니라 스위트 포테이토이다.
그런데 이 감자의 스토리는 그렇게 스위트하지 않는다.
장미꽃 넝쿨 우거진, 홈 스위트 홈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가난하고 처절한 현실과 시련이 이 소설의 씁쓸함과 아쉬움을 적지 않게 남긴다. 이번 기회에 다시 읽어보면서 느낀 심정이다.


<윤이산의 ‘감자를 먹습니다’ 라는 시>

감자를 먹습니다 / 윤이산

또록또록 야무지게도 영근 것을 삶아놓으니
해토解土처럼 팍신해, 촉감으로 먹습니다
서로 관련 있는 것끼리 선으로 연결하듯
내 몸과 맞대어 보고 비교 분석하며 먹습니다
감자는 배꼽이 여럿이구나, 관찰하며 먹습니다
그 배꼽이 눈이기도 하구나, 신기해하며 먹습니다
호미에 쪼일 때마다 눈이 더 많아야겠다고
땅 속에서 캄캄하게 울었을,
길을 찾느라 여럿으로 발달한 눈들을 짚어가며 먹습니다
용불용설도 감자가 낳은 학설일 거라, 억측하며 먹습니다
나 혼자의 생각이니 다 동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옹심이 속에 깡다구가 들었다는 건
반죽해 본 손들은 다 알겠지요
오직 당신을 따르겠다*는 그 일념만으로
안데스 산맥에서 이 식탁까지 달려왔을 감자의
줄기를 당기고 당기고 끝까지 당겨보면
열세 남매의 골병든 바우 엄마, 내 탯줄을 만날 것도 같아
보라 감자꽃이 슬퍼 보인 건 그 때문이었구나,
쓸쓸에 간 맞추느라 타박타박 떨어지는
눈물을 먹습니다

*감자꽃의 꽃말
- 계간『다층』2010년 가을호

시인 윤이산은 감자 하나를 두고 생각과 상상력이 뛰어난 인물이다. 그의 시에서 사물에 대한 시인의 애정이 느껴진다. 그의 애정의 그릇에 담긴 물체는 ‘삶은 감자’이다.어려서부터 ‘삶은 감자’를 먹은 나로서는 여전히 ‘삶은 감자’에 대한 강력한 점액질이 생각의 틀안에 붙어 있다.

이 감자는 ‘우주의 기운이 스며있는 영혼의 작물’이다.
윤시인은 감자를 ‘옹심이 속에 깡다구’라는 기질을 찾아낸다.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 - 감자
그 삶은 감자를 먹다보면 어느새 눈물방울이 떨어지고
가난한 날의 행복에 잠시 젖어들게 된다.
눈물젖은 감자(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행복을 논할 자격이 없다.


여기까지 읽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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