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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이야기

노길묻2, 임레 케르케스 [운명] 노벨문학상 수상작 읽기

by 코리안랍비 202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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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임레 케르케스의 [운명] 을 읽으며

"아우슈비츠 가스실 굴뚝 앞에서의 고통스러운 휴식 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다."

예전에 신영복 선생의 글을 읽다가, "아침에 잠시 신문지 반쪽만한 햇빛이 비추는데 그것은 나에게 잠시의 위로와 행복을 주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너무나 울컥했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꾼]이지만, 감옥에서 수많은 고귀서들을 읽은 그이지만 그에게도 행복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야생화편지]를 쓴 황대권 선생은 오랜 투옥생활을 하면서 "민들레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라며 야생화를 통해서 비교하지 않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임을 발견합니다.

서두에 적은 짧은 글은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이라는 책에서 발견한 명문장입니다. 우리는 운명이라는 것을 안고 삽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을 운명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행복]이죠. 너무나 식상한 이 단어가 때로는 사람을 당황하게 합니다.

바로 죽음이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행복을 말한다는 것이 나를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평소 유대인 연구를 하면서 홀로코스트(히브리어로 쇼아)는 가장 불행하고 슬픈 유대인 역사라고 보았는데, 그 잠시의 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나를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열네 살 유대인 소년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은 악명높은 곳이며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는 수용소였습니다.
질병, 굶주림, 가스실, 총살이 일상인 그곳에서 그 소년은 1년간의 포로생활을 합니다. 그가 1945년 간신히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거의 늙고 병든 노인처럼 변해 버렸습니다. 겨우 1년인데 그 1년이 마치 수십년의 세월처럼 병들고 상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혼자 남은 소년에게 이웃은 말합니다.
그간의 힘든 시간들은 빨리 잊으라고...

그러자 소년은 "왜 그래야 하느냐며, 시체들이 나뒹구는 그 끔찍한 상황에서도
행복은 있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 말이 너무나 확 다가와서 내 심장에 달라 붙는 것 같은 기분을 자아냅니다. 그것은 [당황스러움 그 자체]였습니다. 절망과 죽음, 공포와 지옥이란 말 대신에 그 순간에도 '행복' 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튀어 나온 것이 독자들을 당황케 한 것입니다.

임레 케르테스는 [운명]이라는 소설의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거기에 담아 놓은 것 같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는 저렇게 써야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남기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확실히 노벨상 작가는 다른가 봅니다.
노벨 문학상은 반드시 인류애가 표명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인간의 기본적 가치, 인권적 가치, 본질적 가치를 담아내야 한다고 합니다.

나는 이 소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이 생각나자, 신영복 선생도 생각나고, 황대권 선생도 생각나고, 그리고 김대중 전대통령도 생각나고, 나의 아버지도 생각났습니다.
누구나 죽어야 하는 운명,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인간의 운명
그 운명을 거스릴수는 없지만, 그 운명이 어쩌면 나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해줍니다.

우리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속에서도, 수없이 힘들고 지치고 낙망스러운 상황속에서도 한줌 햇살같은 행복 비슷한 것, 한송이 민들레같은 행복 비슷한 것, 한 모금 타는 목마름을 해결하는 행복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은 당황스럽지만 불행의 한복판에서도 의미있는 시간들을 마주하는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라는 책을 쓴 심리학자 - 빅터 프랭클의 말이 생각납니다. 소위 게슈탈트 심리학, 의미심리학으로 통하는 그의 심리학은 사실 아우슈비츠에서 나온 것입니다.

"삶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그리고 잠시 루이제 린저가 쓴 수필집에서 본
[운명]이라는 단상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 [따뜻한 모래]에서 운명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운명은 우리가 그것에 순응한다는 것입니다.
운명은 고정불변의 것도 아니고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체가 바로 운명이며
우리가 그것을 긍정적으로 되고 나면
자기 자신에게도 긍정적으로 변화게 되는 것입니다.
운명은 우리를 둘러싸고 이ㅆ는
옷이나 끊을 수 없는 사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바로 운명인 것입니다.



비극의 한 가운데서도
아침은 싱그러우면서도 좋은 빛과 향기를 보냅니다.
하늘을 해맑으며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의 삶은 모래알처럼 수없는 사람들 중에
단 하나의 삶이고, 그 어떤 것보다도 다른 소중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하여서만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악조건 속에서
유독 힘들게 보내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도 여럿 만났습니다. 사업이 힘들어지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떨어져 나가는 이도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 쏟아지는 보도들은 그리 즐겁지 않습니다. 어느 당이 압승을 해도, 어느 당이 폭망을 해도 그리 즐겁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직 죽음과 운명에 비할바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생의 한가운데 - 루이제 린저 - 독일문학 표지
    네이버출처 이미지 - 루이제 린저


단테의 [신곡 라스 코메디아]를 보면
"인생은 비극이다" 라고 합니다.
그 비극의 한가운데가 바로 루이제 린저가 말한 [생의 한가운데]이지만
이 비극에도 크나큰 슬픔에 가려진 사소한 기쁨들이 모래알처럼 흩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모래알]과 같아요. 그것도 [따뜻한 모래알]과 같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뜰에는 여러 꽃들이 피어 있고
하늘은 새들이 날아다니고
해는 여전히 위에서 비추고 있고
하늘의 달과 별은 밤하늘에 조명을 켜줍니다.

죽음처럼 살고, 삶처럼 죽고 싶습니다.
우리를 작은 모래알에 비유한 루이제 린저의 말처럼
그 작은 모래알들이 햇빛을 받으면 얼마나 아름답게 반짝거리는지 아시는지요...
고통의 순간에도 우리에게는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어서 우리는 살아가나 봅니다. 이 글을 쓰면서 내 눈가에는 눈물이 글썽여집니다.

노벨문학상에서 길을 찾습니다.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과 루이제린저의 [따뜻한 모래]를
꼭 가슴에 품고 읽어보기를 바랍니다.

 

  • 케르케스 - 노벨문학상 - 케리커처 - 멋진 작가
    구글출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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