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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이야기

노길묻1, 카네티 [머리없는 세상] [현혹과 바벨탑]

by 코리안랍비 202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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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스 카네티, [머리없는 세상]
1935 출판 1981년 노벨상수상
부제 <현혹과 바벨탑>


카네티는 철학박사이면서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그런데 이 책은 1935년에 출판되어서, 1981년에 노벨상을 수여받았다. 무려 46년이 흘러서야 노벨상을 받은 것이다. 노벨상 역사상 단 1권의 소설로 수상한 사람은 엘리아스 카네티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는 스페인 계통의 유태인으로서 불가리아에서 태어나 나중에 독일과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서 공부를 하고, 위기를 피해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독일에 정착한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몇 해 전에 이 책을 구입해 놓고 이제야 펼쳐 보았다. 책도 읽어야 책이다. 책꽂이에 꽂아 놓고 이제서야 읽었다. 이 책에 대한 비평이나 서평은 많다. 원제목은 [머리없는 세상]이지만 부제목은 [현혹 또는 바벨탑]이다. 그동안 나는 무슨 책을 읽었는가? 헛 읽었단 말인가 하며 감탄하게 만든 책이 바로 오늘의 책이다. 휴가기간에 읽고, 찻간에서도 읽고, 빠르게도 읽고, 느리게도 읽은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의 놀라운 점은 그의 첫 소설 작품이지만 유일한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로 노벨상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번역서로 800쪽이 넘는다. 유태인 작가답게 길게 쓰면서 구조적으로 이끌어가는 특징을 갖는다. 유태인 작가들의 특징이 [백과사전적 글쓰기]에 있다.
일단 그 두께가 사전크기여서 처음에는 압도된다.그래서 나는 정독보다는 속독을 해야 하지만,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포기도 자주 하면 습관이 된다.

#이 책은 3부로 나누어진다.

제 1부는 세계 없는 두뇌
제 2부는 두뇌 없는 세상
제 3부는 두뇌 속의 세상

# 카네티는 이 소설에서 ‘책 인간 Buchermenshe 부커멘쉬’ 라는 말을 만든다. 그 책 인간의 이름은‘킨’이다. 킨은 동양학 교수로서 자신의 인생의 꿈이 바로 자신의 ‘도서관’을 갖는 것이다. 킨은 2만 5천권의 책으로 둘러싸인 자신의 서재를 세계와 격리될 수 없는 장벽으로 삼는다. 그리고 자신의 상아탑에서 세속적인 인간들과의 교류를 일체 거부하는 수도사적 인물이 된다. 그는 고작 40살의 나이로 십여 개가 넘는 동양어들을 완벽하게 습득한 그의 시대 최초의 중국학 학자이다. 무엇보다도 경이로운 기억력의 소유자로서 실제 도서관만큼이나 풍부하고 신뢰할만한 제 2의 도서관을 머릿속에 두고 사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책 인간으로서 그는 자신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것이 책들과의 결합이었고, 바로 그러한 인간으로서 책 인간은 정말 그렇게 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가 책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당시에는 그의 유일한 특성이었다.”

“군중은 위험합니다. 그들은 교양 즉 이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책의 종국에는 서재의 책들과 함께 자신을 불태우는 파괴적인 종말을 맞게 된다. 구원의 세계와 지옥의 장이 펼쳐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려면 ‘책 인간과 불길’이라는 두 단어를 잘 기억해야 한다.

책속의 주인공 킨은 자신을 마치 칸트처럼 미화한다. 칸트가 아마도 오랫동안 자신의 고장을 떠나지 않고 평생을 거기서 교수로 지냈는데, 칸트도 아마 2만권이 넘는 서재를 거느렸던 철학자로 보인다. 그런데 이 칸트도 결국 소설속에서 책과 함께 불을 지르면서 산화한다. 그래서 킨은 자신을 칸트처럼 여기고 산 것이며, 그 칸트를 책과 함께 불태운 것이다.

주인공 킨은 “사람들로부터 멀어질수록 인간은 진실에 더 가까워진다” 라고 말한다.그리고 이렇게 귀결짓는다.

“학문과 진실은 그에게 있어서 동일한 개념이었다.”

구원을 줄 줄 알았던 책이 그러나 결국은 킨과 함께 불태워지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 이 소설은 결말은 허무하다. 책 인간의 종말은 정말 허무하다.

이 글을 띄엄 띄엄 쓰다가 나의 서재를 둘러본다. 이 서재와 함께 내가 불타는 아주 잠시 잠시의 상상에 젖어 보았다. ‘나도 킨 처럼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묘한 불안감을 갖는다.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줄거리는 인터넷을 뒤져서 검색해보면 알 것이지만 , ‘책 인간’으로 규정된 킨의 특성에서도 나타나듯이, 킨은 책 속에서 자신을 온전히 잃어가는 혹은 온전히 잃어버리고 싶은 욕망에 집착하는 인물에 해당한다.

어쩌면 킨은 자신속에 매몰되어서 바깥 세계와는 고립된 개인으로 살아가는 오늘날의 소위 문명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노벨상이 늦어진 것이 그 이유인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의 미래를 보고서 쓴 것이다. 거의 조지 오웰식 글쓰기였던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조지 오웰의 [1984]보다 카네티의 이 책이 더 [인간의 미래, 책의 미래]를 밝힌 섬뜩한 책으로 보여진다.

이 책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인 테레제와 피셜레, 그리고 파프 또한 킨과 같은 그러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책보다는 돈에 대한 탐욕이 바로 그 모습을 보여준다. 책에 대한 욕망도 욕망이고,돈에 대한 욕망도 욕망이다. 어느 욕망이 더 우월하고 열등한지에 대해서는 중요하지 않다. 욕망이라는 인생분모가 얼마만큼 사람을 쥐고 흔드는지를 봐야 한다.

이 소설의 제목이 ‘현혹 혹은 바벨탑’이라고 한 것을 보면 저자의 신학이나 철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볼 수 있고, 인간이 현실세계의 외면과 왜곡, 그리고 부정은 곧 인간 자신의 고립과 소외 그리고 한층 나아가서는 폭력과 자기파괴라는 광기적 현상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문학비평가인 슈Schuh라는 사람은 이 작품을 두고서,
“아직까지도 오늘날까지 현혹이 우리의 삶의 형식이다”라는 말을 했다.

이는 킨의 세계가 아직도 21세기가 되어도 끝나지 않은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책은 아직도 우리를 현혹하고 있는 것이다.

카네티가 자신의 소설을 출간하기 전에 했던 말이 있다고 한다. 1931년 9월이다.

“내 칸트의 비극은 그의 목표들의 붕괴에 기인한다.군중,사랑, 그리고 권력이 그의 한 점인 도서관을 맴돈다. 그 어떤 목표도 한데 어우려져 밀려오는 군중, 사랑, 그리고 권력이라는 이 세 가지 욕망에 대적하지 못한다”

세계가 없는 머리, 머리가 없는 세계, 머리에 들어 있는 세계 라는 킨의 본질을 ‘변증법’적으로 구도해 나가는 표제들을 보면, 카네티라는 작가의 철학적 아이디어가 다분히 보여진다. 아울러 이 책의 주인공처럼 ‘내 머릿속에 도서관’을 짓고 사는 자신이 투영된다. 그저 내려놓아야 할 일이다. 종국에 이르기전에 내려놓아야 할 일이다. 이것도 지나친 욕망이다.

저명한 법륜 스님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스님이 된 것은 다른 이들보다 더 큰 욕망을 가지고 있어서이다”

그러고보면 카네티는 칸트도 좋아했겠지만 유태철학자인 ‘스피노자’를 더 좋아한 것 같다. 스피노자는 사실 [욕망의 철학자]이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욕망을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으로본다. 스피노자는 인간을 ‘욕망 그 자체’라고 비약하였다. (Ethica 에티카) 인간의 욕망의 결정판은 성서 ‘바벨론’이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가 바로 ‘현혹과 바벨론’이라고 지었던 모양이다.

약 3주간에 걸쳐서 읽었는데, 심지어 어제 서울서 내려오는 버스간에서 읽기도 하였다. 읽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은 명저이다. 왜 노벨상을 받을만한지 알게 되는 책이기도 한다.

아울러 그의 다른 명저가 있다. [군중과 권력]이 그 책이다. 같이 읽어도 좋다. 그가 거의 20여년간 썼던 책이라고 한다. 자주 대학교 수능 논술시험으로 등장한다. 이 책도 조만간에 구입하여 보려고 한다. 중앙도서관에 문의를 하니 '그런 책은 없습니다' 라고 한다. 안보는 책을 왜 나는 보려고 하는지 나도 '책 인간 부커멘쉬' 인가 보다. 부커멘쉬가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와는 다르다. 책 읽는 인간이 초월적 인간보다는 인간적이다. 이 책은 어렵지만 꼭 읽어보면 약 20권 이상의 책을 읽은 기분을 느끼게 할 것이다. 명작은 명작이다. 노벨상에게 길을 물어야 할 이유가 분명한 것을 더욱 깨닫는 하루다.

  • 카네티 - 현혹 - 노벨문학상 수상작 표지
    구글출처 이미지 지식의 숲 출판
  • 군중과 권력 - 카네티의 다른 명저 - 유대인 작가 - 책표지
    구글출처 이미지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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