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疏通)하는 인성(人性) 그 철학함에 대하여 - 리더쉽 그리고 하브루타
랍비 0건 24회 21-12-08 23:17
소통(疏通)하는 인성(人性) 그 철학함에 대하여
오늘 글은 난해할 수도 있고,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나의 사색의 힘을 발휘하여 기술하려고 합니다. 급하고 날렵한 글은 사색부재의 글입니다. 생각하면서 말하고, 생각하면서 글쓰기를 하면 스스로가 공감되고 감동되어서 다른 이들에게 [파급효과]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리더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리더쉽을 오래 공부한 나로서도 내 나름의 제대로된 정의가 없었는데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소통(疏通)]이었습니다. 소통을 COMMUNICATION 커뮤니케이션으로 말하지만 사실상 [커뮤니케이션]보다 더 위에 있는 상위개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통(疏通)]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소통의 한자를 보니, 소(疏)는 트일 소이며, 통은 통할 통(通)입니다. 그런데 이 소통은 반드시 인성(人性)과 같이 만나서 조합을 이루어야 [소통하는 인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리더라는 정의를 내리게 됩니다.
물론 리더란,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끌고 가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지만 사실 너무나 추상적으로 심적(心的)으로도 먼 정의입니다. 리더는 끌고 가기도 하지만 본인도 따라가는 존재 - 팔로워 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소통이 되지 않으면 반드시 싸움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현실적인 세상은 늘 ‘싸움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사람의 인성은 [함께, 더불어]를 말하지만, 현실의 방향은 [따로, 나만]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현실적으로 우리는 남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능력’이 있고, ‘성공’한 삶이 보장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 철학서들이나 윤리서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현실은 자꾸만 ‘인성이 중요해’ 라고 말하면서도 ‘인성을 도외시(度外視)’ 한다는 것입니다.
인성(人性)은 사람의 됨됨이나 바탕을 평가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정신의 크기’를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물질의 크기’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사회문제에서는 늘 인성(人性)을 강조하다가도 개인 문제로 가면 늘 물질(物質)이 앞섭니다.
물론 나 자신은 크리스찬입니다. 하지만 앞에 형용사적으로 다시 말하면 ‘현실적 크리스찬’입니다. 하이데거는 말했습니다. “존재(Sein)가 의식(Bewusst-sein)을 결정한다”지만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이나 현실은 ‘의식이 존재를 결정한다’라는 것입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생활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른 개념을 가진 사람이 바른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나 자신도 바른 개념을 정립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싸움도 크게는 [남과의 싸움과 나와의 싸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싸움의 발생은 [소통문제]에서 크게 일어납니다. 남과의 싸움은 더불어 함께 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이요, 나와의 싸움은 자신과의 대화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간은 만남과 소통 속에서 함께 일하고, 놀고, 싸우고, 사랑하고, 말하며 살아갑니다. 자연을 잘 보면 나름의 ‘길’을 갖고 있습니다.
물의 속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보면 물은 무엇인가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가거나 넘어갑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길을 꾸준히 갑니다.
바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돌아가거나 빈 공간을 통해서 지나갑니다. 새들도 새의 길들이 있습니다. 공중의 많은 새들을 보면서도 서로 부딪치지 않고 날개짓을 하면서 자유로이 [자연법칙]을 따라서 날아다닙니다. 자연은 이미 [함께 하는 법과 소통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도 인도(人道)- 인간의 길이 있습니다.
논어(論語)나 맹자(孟子)를 보면 인간의 길에 대한 이해를 명시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인간의 길도 서로 막힘이 없거나, 서로가 사통팔달 통하게 되면 진정 ‘사람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통이 된다는 것은 곧 인성이 좋다]라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이 땅의 만남과 소통을 잘 보면 피상성이 너무나 강합니다. 유학시절에 마르틴 부버의 [대화사상]을 공부한 적이 있는데 그는 대화의 철학자로 불리웁니다.
그는 “대화는 나와 너의 대화가 진정한 대화이지, 나와 그것, 나와 그것들의 대화는 진정한 대화가 아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와 환자의 대화는 기술적인 대화이지, 사랑과 영혼의 대화가 아닙니다. 의사는 환자를 대화의 상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치료의 대상이거나 돈벌이의 대상입니다.
또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대화도 기술적인 대화입니다. 상담자는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피상담자를 상대합니다. 피상담자는 상담기법과 기술을 가진 이의 코치와 카운슬링을 받습니다. 물론 거기에서 ‘효과 effect' 라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진정한 대화의 측면은 아닌 것입니다. 마치 연극을 보는 듯한 설정을 우리 삶에서 자주 보는데 그것이 바로 ‘피상성’입니다.
이 피상성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피상성은 바쁜 세상에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일종의 ‘겉치레’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피상성을 그렇다면 벗는 길이 있을까요? 바로 피상성을 벗는 길은 그 사람의 인성과 관련이 깊습니다.
탈무드를 보면 그 사람의 인성이나 인격을 판단하는 랍비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를 미워하는지를 알면 그 사람의 인성을 알 수 있다” 라고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마 싸움이나 다툼이 수시로 일어났거나, 자신의 성격이나 기질과 안맞거나, 대화에 있어서 일방적이거나 아니면 무시하거나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싸우는 것도 소통이며, 만남도 소통의 양태(樣態)입니다.
싸우는 것은 [함께]하지 못할 때 일어납니다. 반대로 만남은 [함께] 할 수 있을 때 일어납니다. 하지만 싸움도 불합리하거나 부조리한 것, 부당하고 잘못된 것과 싸우는 것은 언제나 [정당방위(正當防衛)]가 성립됩니다. 하지만 그런 싸움이 아니라 밥그릇을 놓고 싸우거나, 자리와 명예를 놓고 싸우거나, 쓰잘떼기 없는 것으로 싸운다면 이 싸움은 소통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오늘 글은 난해할 수도 있고,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나의 사색의 힘을 발휘하여 기술하려고 합니다. 급하고 날렵한 글은 사색부재의 글입니다. 생각하면서 말하고, 생각하면서 글쓰기를 하면 스스로가 공감되고 감동되어서 다른 이들에게 [파급효과]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리더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리더쉽을 오래 공부한 나로서도 내 나름의 제대로된 정의가 없었는데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소통(疏通)]이었습니다. 소통을 COMMUNICATION 커뮤니케이션으로 말하지만 사실상 [커뮤니케이션]보다 더 위에 있는 상위개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통(疏通)]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소통의 한자를 보니, 소(疏)는 트일 소이며, 통은 통할 통(通)입니다. 그런데 이 소통은 반드시 인성(人性)과 같이 만나서 조합을 이루어야 [소통하는 인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리더라는 정의를 내리게 됩니다.
물론 리더란,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끌고 가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지만 사실 너무나 추상적으로 심적(心的)으로도 먼 정의입니다. 리더는 끌고 가기도 하지만 본인도 따라가는 존재 - 팔로워 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소통이 되지 않으면 반드시 싸움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현실적인 세상은 늘 ‘싸움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사람의 인성은 [함께, 더불어]를 말하지만, 현실의 방향은 [따로, 나만]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현실적으로 우리는 남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능력’이 있고, ‘성공’한 삶이 보장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 철학서들이나 윤리서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현실은 자꾸만 ‘인성이 중요해’ 라고 말하면서도 ‘인성을 도외시(度外視)’ 한다는 것입니다.
인성(人性)은 사람의 됨됨이나 바탕을 평가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정신의 크기’를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물질의 크기’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사회문제에서는 늘 인성(人性)을 강조하다가도 개인 문제로 가면 늘 물질(物質)이 앞섭니다.
물론 나 자신은 크리스찬입니다. 하지만 앞에 형용사적으로 다시 말하면 ‘현실적 크리스찬’입니다. 하이데거는 말했습니다. “존재(Sein)가 의식(Bewusst-sein)을 결정한다”지만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이나 현실은 ‘의식이 존재를 결정한다’라는 것입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생활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른 개념을 가진 사람이 바른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나 자신도 바른 개념을 정립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싸움도 크게는 [남과의 싸움과 나와의 싸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싸움의 발생은 [소통문제]에서 크게 일어납니다. 남과의 싸움은 더불어 함께 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이요, 나와의 싸움은 자신과의 대화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간은 만남과 소통 속에서 함께 일하고, 놀고, 싸우고, 사랑하고, 말하며 살아갑니다. 자연을 잘 보면 나름의 ‘길’을 갖고 있습니다.
물의 속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보면 물은 무엇인가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가거나 넘어갑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길을 꾸준히 갑니다.
바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돌아가거나 빈 공간을 통해서 지나갑니다. 새들도 새의 길들이 있습니다. 공중의 많은 새들을 보면서도 서로 부딪치지 않고 날개짓을 하면서 자유로이 [자연법칙]을 따라서 날아다닙니다. 자연은 이미 [함께 하는 법과 소통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도 인도(人道)- 인간의 길이 있습니다.
논어(論語)나 맹자(孟子)를 보면 인간의 길에 대한 이해를 명시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인간의 길도 서로 막힘이 없거나, 서로가 사통팔달 통하게 되면 진정 ‘사람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통이 된다는 것은 곧 인성이 좋다]라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이 땅의 만남과 소통을 잘 보면 피상성이 너무나 강합니다. 유학시절에 마르틴 부버의 [대화사상]을 공부한 적이 있는데 그는 대화의 철학자로 불리웁니다.
그는 “대화는 나와 너의 대화가 진정한 대화이지, 나와 그것, 나와 그것들의 대화는 진정한 대화가 아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와 환자의 대화는 기술적인 대화이지, 사랑과 영혼의 대화가 아닙니다. 의사는 환자를 대화의 상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치료의 대상이거나 돈벌이의 대상입니다.
또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대화도 기술적인 대화입니다. 상담자는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피상담자를 상대합니다. 피상담자는 상담기법과 기술을 가진 이의 코치와 카운슬링을 받습니다. 물론 거기에서 ‘효과 effect' 라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진정한 대화의 측면은 아닌 것입니다. 마치 연극을 보는 듯한 설정을 우리 삶에서 자주 보는데 그것이 바로 ‘피상성’입니다.
이 피상성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피상성은 바쁜 세상에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일종의 ‘겉치레’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피상성을 그렇다면 벗는 길이 있을까요? 바로 피상성을 벗는 길은 그 사람의 인성과 관련이 깊습니다.
탈무드를 보면 그 사람의 인성이나 인격을 판단하는 랍비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를 미워하는지를 알면 그 사람의 인성을 알 수 있다” 라고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마 싸움이나 다툼이 수시로 일어났거나, 자신의 성격이나 기질과 안맞거나, 대화에 있어서 일방적이거나 아니면 무시하거나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싸우는 것도 소통이며, 만남도 소통의 양태(樣態)입니다.
싸우는 것은 [함께]하지 못할 때 일어납니다. 반대로 만남은 [함께] 할 수 있을 때 일어납니다. 하지만 싸움도 불합리하거나 부조리한 것, 부당하고 잘못된 것과 싸우는 것은 언제나 [정당방위(正當防衛)]가 성립됩니다. 하지만 그런 싸움이 아니라 밥그릇을 놓고 싸우거나, 자리와 명예를 놓고 싸우거나, 쓰잘떼기 없는 것으로 싸운다면 이 싸움은 소통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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