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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브루타와 코칭 & 멘토링

하브루타, 소크라테스 , 그는 왜 토론을 하였는가?

by 코리안랍비 202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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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 그는 왜 토론을 하였는가?


하브루타 특강을 준비하면서, [다시 대화와 토론의 중요성]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실재 사람들은 대화하고 싶어하고, 얕고도 가벼운 대화도 좋지만, 깊고도 통찰력이 있는 대화를 원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깊고도 통찰력 있는 대화를 나는 [인생대화]라고 부른다. 글쓰고 강의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말들을 잘 조합해서 만드는 능력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철저히 [독서의 바탕]에서 찾는다. 독서의 바탕이 없이는 깊이있고 깨우침이 있는 대화와 토론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한 인물이 소크라테스다. 앞으로 대화와 토론에 능하고, 심도 있는 질문과 그 대답에 대한 접근을 이루려고 했던 인물들을 더 알아보고 연구할 것이다.

서양철학자 중에서 아마도 일반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소크레테스라고 할 수 있다. 세계 4대 성인에도 들어가는데, 정작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 기독교 사상의 핵심인물이며, 서양학문의 양대 중심인물로 굳게 서 있지만, 정작 소크라테스의 정체성을 잡아 내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그는 기원전 469년에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399년에 죽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어떤 글도 저작도 남기지 않았다. 성인이라면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한게 아닌가 쉽지만, 그의 삶과 사상에 대해서는 그의 제자 플라톤과 크세노폰 그리고 아리스토 파네스가 남긴 글에만 남아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명의 사람이 남긴 기록에는, 1사람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각기 다른 소크라테스가 나온다. 서로 일치하지 않는 기록을 남긴 것이다. 이를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부른다.

소크라테스와 관련된 글들을 읽다가,
소크라테스는 [토론하는 철학자] 라고 단정하고 싶었다.
플라톤과의 대화나 변명을 보면 철저히 대화와 토론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의 인류사적인 업적이라면 바로 대화와 토론이다.
많은 사람들은 두문불출하면서, 자기 혼자만의 사색과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광장으로 나와서, 논쟁적인 대화를 즐겼다. 아테네 토론광장이라면 당연 [아고라AGORA]이다. Ἀγορά / Agora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폴리스)에서 자유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론을 벌이던 장소이다. 아고라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는 '집결지'(Gathering Place)이다.

이 아고라 광장에서 그는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억울한 재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사형언도를 받고 독배를 마시고 죽게 된다.

나는 이 부분에서 [토론]을 했다고 소크라테스를 죽이려는 세력이 있었고, 그리고 [악법도 법이다] 라면서 죽어간 소크라테스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문헌을 조사해 보았다. 실재로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은 있지도 않는 표현이다. 그리고 재판을 받은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죽는 것이 옳다" 라는 결론에 따라서 죽음의 길을 갔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플라톤의 [변명, apologia]이라는 기록에 의존을 해야 하지만 그 기록이 과연 옳고 그른지는 플라톤의 판단에 맡겨진 것이다. 우리 같은 독자들은 그냥 의구심만 남는다.

소크라테스가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커다란 자부심이 있었다. 그것은 델포이의 신탁때문이다. 신탁이란 신이 사람을 통해서 신의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질문에 답하는 일이다. 일종의 계시나 현몽에 가깝다. 그 신탁의 내용이 다음과 같다고 한다.
[소포클레스는 현명하다. 에루리피데스는 더욱 현명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만인 가운데서 가장 현명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현명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수많은 현자들을 만난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어느 누구도 현명하지 않았다. 마치 100분 토론에 와서 [지식과 지혜의 대결]을 벌이는 것과 같은 일인데, 현명하다는 사람이 무식이 폭로되는 [토론]은 실로 재미가 있다. 이런 토론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는 아마도 아테네의 시민들 중에서 시기를 당하고, 적을 만들고, 이것이 곧 죽음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는 왜 토론을 즐겼을까? 그는 일반적으로 돈을 받고 엉터리 철학장사나 지혜장사를 하는 소피스트들을 경멸했다고 한다. 그 당시 소피스트들이 수준이 낮은 사들이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고, 현명하지 못함을 폭로하였으니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 사이가 되었을까 그냥 짐작이 간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지행합일]이다. 아레테(arete)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덕 virtue]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덕의 실천을 가장 중시하였다.

그는[플라톤의 변명]에서, "나는 질문을 계속하여 그를 음민하고 논파할 것이며, 만일 그가 덕이 없으면서도 덕을 가졌다고 주장할 뿐이라고 생각되면, 나는 가장 가치있는 것을 과소평가하고 가치가 적은 것을 과대평가한다고 그를 비난할 것입니다. 나는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노인이든, 시민이든, 외국인이든 가리지 않고 나의 말을 되풀이할 것입니다. 특히 시민들에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들은 나의 동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의 명령인 것입니다."

여기서의 덕은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이라는 말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스인들은 어떤 사물이 고유한 목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탁월성(엑설런스)를 아레테 - 덕이라고 했으며, 윤리적인 덕은 의지의 아레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철학은 대세의 자연철학이었다. 탈레스는 자연의 원질을 [물]이라고 하고, 엠페도클레스는 [지수화풍]의 네가지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 소크라테스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을 탐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당시 충만하던 자연철학의 세계 - 피시스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가?"에 대한 인간철학의 세계 - 노모스 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소크라테스의 토론을 [산파술] 이라고 부른다. 산파술이라는 것은 산파는 직접 아기를 낳지 않지만 낳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낳지 않아본 여성은 도와줄 수 없기에 산파가 될 수도 없다.

왜 소크라테스의 토론이나 이러한 논법이 왜 중요한 것인가? 생각을 해 보았는가? 나도 생각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이 [산파술] 이라고 하니까, 그 단어의 뜻만 외우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의문이나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해 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도 21세기의 소피스트처럼 되어간 것이다. 최근에 들어서 이러한 무지를 깨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껏 우리는 토론의 기술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토론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과연 소크라테스는 토론의 기술이 남보다 탁월해서 남들을 이긴 것인가? 현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무지를 드러낸 것이 정말 대단한 것인가? 이것으로부터 소크라테스는 [최고의 철학자]요 [아레테를 가진 사람]으로 여겨진 것인가? 수많은 질문을 나는 만들어 낼 수 있다.

하브루타 선생답게 나는 질문을 많다는 것에 능숙하다. 그 답은 문제속에 있다. 토론이라고 함은 많은 사람들이 참여를 하고 듣는다. 100분 토론에도 반드시 공청단이 있다. 그 공청단도 낮은 수준의 사람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지성이나 철학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소크레테스는 바로 이들에게 [태도변화]를 준 것이다. 기존의 지혜자라고, 권위자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무지를 드러냄으로서 진정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다시하게 만든다. 그들의 믿음을 깨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구하는 것이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소피스트들, ,소위 [철학장사꾼] [지혜장수들]에게 맡긴 것이다. 그러한 잘못된 믿음, 관행, 악습을 그는 끊어주려고 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래서 위대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태도의 변화]이다. 결국 인간이란 가치추구의 대상이며,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판단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답을 내 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지식을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대화 상대자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소나 말의 등에 붙어다니는 등애(Gadfly) 처럼 만족할 답이 나올때까지 질문을 던진 것이다. 상대방 이야기의 논리의 허점을 파고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소크라테스 자신도 답을 정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은 것을 - 아포리아 aporia 라고부른다. 이것은 그리스적 의미로 [통로가 없는 것] 이다.

이러한 아포리즘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은 그의 제자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과 손자뻘 제자인 아리스토 텔레스의 [논리학]에 이르러서 해결이 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진정한 철학의 집을 지은 인물로 위대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토론(엘렌쿠스)은 자신의 무지함을 깨닿게 하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서 성찰하게 만든다.

한국의 경우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의 숫자가 많다고 한다. 대학은 지성의 요람이다. 그런데 이 지성의 요람이 이제는 돈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하지 않고, 가치가 높은 반면에 실용적이지 않은 것에는 외면하는 현장이 되었다. 단순히 먹고 사는 것이 최우선적인 가치를 두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아레테 - 덕을 하지 않는 곳으로 전락한 것이다. 대학이 민주시민을 양성하고, 깨어있는 지성의 힘을 가진 사람들을 양성하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목적을 갈수록 상실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지성인들의 고민이 참으로 많이 있다. 나는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토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는 [무지를 타파하고 지성을 찾는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요즘 우리는 더욱 소크라테스적 토론이 필요하다. 다행인 것은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가 발달하면서 독서의 열기나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독서를 배경으로 토론이 이루어지고, 논술이나 구술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는 [지식정보의 시대]이다. 지식을 갖고 정보를 이용할 줄 아는 시민이 갈수록 많이 요구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양질의 지식과 정보를 갖고 이용한다는 것은 그리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자칫하면 거짓된 정보나 오류에 빠지기도 하고, [전문가의 오류]에 빠져서 집단적인 믿음에 사로잡힐 수 있다. 특히 유투브 같은 것을 마치 정론화된 언론으로 보는 것도 그런 현상의 일부이다.

소크라테스적 토론은 반드시 필요하다.
[토론의 시대]가 왔다.
적극적으로 토론을 즐겨야 한다.

전공공부를 하면서 그 책의 개념이나 용어를 이해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토론을 제대로 해 본적이 있는가?
어려운 고전을 단순히 읽어내는 것, 고전독법도 필요하다. 그러나 토론을 제대로 해본적이 있는가?
기독교인이나 종교인이라면 성경이나 경전을 단순히 읽어내는 것, 의미이해도 필요하다. 그러나 토론을 제대로 해 본적이 있는가?

반드시 토론이 없거나, 논증이 없으면 그 읽어냄이라는 것이 자칫 독선이나 또다른 무지를 낳을 수 있다. 그래서 토론보다는 언쟁이 더 벌어지는 것이다.

나는 독서를 많이 했다는 사람들의 무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도 한편으로 그랬기 때문에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생각이 없는 독서나 성찰이 없는 독서는 어찌보면 [독을 품은 책읽기]이다. 독서는 반드시 많은 사람들을 만나 토론하고, 대화하면서 서로의 무지를 깨우치고, 객관화된 성찰을 도모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산파술이나 엘렌토스라고 불리우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나 토론방식이 그리 환영받지 않을 수 있다.
남을 대화의 기술로 당황하게 하고, 화나게 하고, 심지어 싸움까지 일어나는 언쟁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결국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를 넘어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까지 후대에서 경험한 우리 세대는 이제는 [아포리아를 넘어서는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까...
[태도의 변화]만 생긴다면 이것은 대성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파스칼의 말로 긴 글을 마친다.
"철학은 아포리아의 놀라움에서 시작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인간은 모두 철학함이 가능하다"

 


<나는 경영학 전공자인데, 놀랍게도 경영학을 만든 이들이 고대 그리스 철학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경영학이란 잘먹고 잘사는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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