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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브루타와 코칭 & 멘토링

하브루타, 질문의 기술, 질문의 힘

by 코리안랍비 202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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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기술

어려서부터 ‘궁금하면 못 참아’ 스타일이었던 나로서는 자주 질문하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모르는 것은 알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자주 들었던 나로서는 ‘질문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등식이 몸에 베어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학을 가고, 대학원 과정을 밟으면서 [조용한 교실]이 이어지면서 질문을 하는 수업은 오랫동안 ‘방치’가 되었고, 도리어 대답을 하는데 에만 ‘급급’한 잘못된 교육 시스템의 노예가 되어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대한민국은 ‘공부는 잘하지만 질문을 잘 못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궁금한 것은 그저 책을 찾아보거나, 인터넷에 들어가서 ‘지식검색’이나 아니면 ‘위키백과’를 찾아보면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굳이 질문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평소 대화를 하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자주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 ‘질문하기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대화의 기법으로 삼아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강화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어려운 질문을 하여도 정말 거침없이 대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때는 그 사람이 대단하기도 하고, 평소 ‘대답할 말을 준비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은 말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질문하는 힘이나 답변능력’이 뛰어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문제들과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대비해야 할 미래가 늘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결정적으로 힘든 시간이 오기도 하고, 위기 상황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그럴때 필요한 것은 ‘돈’이라고 하는 재화도 필요하지만, ‘정신’적으로 버틸 수 있는 자원도 필요합니다.

창의적인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위기 상황이 올 것을 알고 최선의 경우를 생각하기도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할 질문을 미리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럴 때 ‘명답’은 그 명답이 나오기까지의 ‘질문’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신문을 읽다가 어느 작가의 ‘질문에 대한 글’을 잠시 읽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에 잠시 나온 것이 ‘질문의 기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 질문만들기보다 질문바꾸기로 가야 한다. - 나의 주장
    다음 출처 이미지



‘질문하는 연구소’의 설립자 ‘마릴리 애덤스’는 ‘질문의 기술’에서 질문을 [심판자의 질문]과 [학습자의 질문]으로 나누었습니다.

“이 문제가 누구의 탓이지?”
“어쩌다가 이렇게 패배했지?”
“이런 문제의 발단은 어디에서 생겼지?”

등등의 심판자의 질문은 사람들을 불안과 패배감에 젖어들게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학습자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론 이를 [긍정 심리학]의 도움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 상황을 바라보는 눈-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일종의 [관점의 변화]입니다. [학습자의 질문]은 위의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일까?”
“지금 당장 가능한 일은,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가?”

하면서 긍정적으로 심리적 안정감과 새로운 도전 의식을 준다는 것이 그 책의 골자(骨子)입니다.

살면서 잘 배우는 사람을 만나보면 ‘질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라는 것을 봅니다. 물론 나 자신은 충청도 중소도시에 와서 살지만 여기서 나에게 물어보는 사람은 참으로 적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 자신도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적어지거나 없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충청도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질문을 하고 주고 받을 수 있는 친구들은 어디서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친구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세월이 이렇케 빨리 지나가는데 너는 앞으로 뭐하고 지낼거야?”
그러자 그 친구가 말하기를 “세월을 이해하려고 해”
그 말에 “그게 무슨 의미야?”

그러자 “세월과 함께 살고 죽는거야, 가령 나이가 들면 흰머리가 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그리고 체력이 떨어져 병들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병들면 건강회복을 위해서 병원을 간다거나, 그리고 주어진 일을 젊은 사람처럼 하지 않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해 나가는 것 등이지”

그 말에 깊은 공감을 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세월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세월과 함께 ‘지혜’를 기르는 것은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예전 어느 노래 가사가 “세월이 나를 철들게 해” 라는 말이 맞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자기 한계]나 [분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極大化)한다든지, 노력을 더 한다든지 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힘’은 절대 늙거나 병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긍정의 힘이나 지혜’입니다. 생각하는 힘은 나이가 들수록 더 필요한 것입니다. 몸의 강도나 체력이 떨어지는 나이에는 ‘자신의 한계나 분수’를 파악하면서 다른 이들과 교감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더욱 요구됩니다. 그럴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고’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효과적인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질문하는 능력이나 힘은 나이가 들어서는 필경 좋은 ‘지혜’임에 틀림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학습자의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다른 이들에게 ‘배려하고 존중하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배우는 사람이라는 것은 바로 ‘윤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나는 ‘인문윤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가 50대 중반이 되어서 ‘섹소폰’을 배우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지금 그 연세에 섹소폰을 배워서 뭐하실려구요?” 그러자 그분이 말하기를, “섹소폰을 잘 하는 것은 나에게 관심이 없고, 도리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합니다.”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늘 공부만 하고 책만 보던 분 중에 하나인데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데 그저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 지독한 [자격지심]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 [의사소통 -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으로 자신의 배움을 ‘미학적으로 묘사’하는 것에서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도 미술학원에 가서 [스케치]를 배워서 여행할 때 반드시 [스케치]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진]도 배워서 여기 저기 사진도 찍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지 자격이나 능력을 키우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즐거이 ‘소통하고 대화하는 순간들’을 더 만들기 위한 것으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우리에게 [질문하는 기술]은 직접 [질문을 해 봄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며, 누군가를 탓하고 원망하는 투의 질문은 절대 지양(止揚)하고 누군가를 돕고, 나 자신을 유익하게 하는 질문을 절대 지향(志向)해야 함을 배웁니다.


[질문의 기술]에서 배운 것은 타고난 [질문의 고수]는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질문도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질문은 좋은 대답을 만듭니다. 질문하는 습관은 좋은 인간관계를 위한 배려이면서 지혜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질문의 고수는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말했습니다. “교육의 본질은 호기심을 죽이지 않고 평생 호기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호기심이 죽지 않으려면 우리는 알고 싶어 하는 지적 욕구와 더불어서, 모르면 물어보는 1-2%의 용기,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이끌어내는 ‘교육적인 노력’이 어울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수시로 ‘하브루타 - 일대일 토론학습법’을 더욱 체화(embodyment)시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우리는 말하고, 글을 읽습니다. 설사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수많은 말들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말들 중에 말 같은 말이 있지만, 말 같지 않은 말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옥석(玉石)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말은 옥이나 진주처럼 빛나지만 어떤 말은 아무리 들어도 사람을 돌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는 갈수록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가서는 안됩니다. 갈수록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현명한 질문을 통해서 현명해지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질문조차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어지는 것입니다. 질문의 세계에도 [심고 거둠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사실 ‘심은 데로 거두는 법’은 없습니다. 어디에 씨가 심겼느냐가 중요합니다. 기름진 옥토에 심겨졌으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씨 자체는 놀라운 생산력과 잠재력을 그 속에 갖추고 있습니다. 말을 잘하면 그것을 ‘말씨’라고 하고, 글을 잘하면 그것을 ‘글씨’라고 합니다. 결국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마음씨’라고 합니다.

마음씨를 잘 뿌려서 큰 인생의 수확을 거두려면 우리의 삶의 태도와 방향을 잘 정해야 합니다. 마음을 확정하고 확정한 사람이 큰 수확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질문하는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내 속에 있는 그 궁금하면 못참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질문은 기술이 아니라 예술입니다. !!
피카소의 말대로 우리는 예술가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술가로 생을 마칩니다.
그 중심에는 ‘질문하는 힘’이 있습니다.

  • 질문은 기술이 아니라 예술이다. - 질문의 힘을 기르자
    구글출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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