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
드와 논어를 같이 논하다.
2강. 최고를 향한 최선의 노력 - 먼 곳에서 오는 벗
위대한 성공은 우정에서 비롯된다.
중국의 사상가 진후산이 쓴 담총(談叢) 이라는 책을 보면 “배울 것을 배우고 배워서 안 될 것을 안 배워야 잘 배운 것이다.” 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가끔 스승에 대한 생각을 해보면 제자를 자기와 비슷한 짝퉁으로 만드는 스승은 가짜입니다. 저마다 개성에 따라서 무지개 원리를 따라서 다양한 색깔을 만들어 제 목소리, 제 색깔을 갖게 만드는 스승이 진짜입니다. 시키는 대로 하고 카피(체본)만 하는 것은 헛공부만 한 것입니다.
훌륭한 스승아래 훌륭한 제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베토벤은 “위대한 사람은 위대한 사람으로부터 나온다”고 합니다. 베토벤의 스승은 네페 선생님이었고, 베토벤의 제자는 체르니였습니다. 이들이 강조한 교육은 ‘의욕보다 기본에 충실하라.’ 였습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기본을 가르치고 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기본위에서 자신 만의 위대성을 성취해 나가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배운 사람은 소극적인 사람이 됩니다. 적극적으로 배움을 행한 사람은 적극적인 사람이 됩니다. 역사는 적극적인 사람의 무대입니다.
탈무드는 ‘나와 상대하는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여기라’라고 합니다. 배움에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탈무드와 논어는 스승과 제자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서로 대화하는 존재들이며, 서로 배우는 존재로 규정짓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 존재로 봅니다. 논어는 함께 배우는 친구를 ‘붕우(朋友)’라고 부릅니다. 탈무드는 함께 배우는 친구를 ‘하베르 Haver חבר' 라고 합니다. 탈무드와 논어에서 말하는 친구는 제 2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며, 제 2의 가족이기도 합니다. 붕우는 상호신뢰 속에서 이루어진 동지와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학이편에서 ‘학습’에 대한 것을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붕우유신(朋友有信)’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공자의 주변에는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찾아오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먼 곳에서 오는 벗’이 가까운 친구를 뜻하는 게 아니라 제자. 즉, 가르침을 받으러 오는 사람, 같이 학습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동문수학한 친구였다가, 나중에는 헤어졌는데 다시 때가 되어 돌아온 친구들이라고 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여러 논어주해서를 읽으면서 다양한 해석이 나옵니다. 이래서 논어도 탈무드처럼 다양한 해석과 입장이 나옵니다.
하브루타 선생으로서 이 대목을 보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려서 같이 공부한 친구를 ‘동문수학’ 한 지기로 부릅니다. 한 스승 아래서 같이 공부한 친구는 형제 이상으로 친근하고 좋은 존재입니다. 우리도 어려서 인생의 중요한 인생기초를 여러 선생님들께 배웠습니다. 그리고 함께 어린 시절과 초등 시절을 보냅니다. 그리고 중고 청소년 시기를 보내기도 합니다. 서로 동문수학한 친구들은 평생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공자가 말하는 ‘멀리서 오는 벗’은 누구를 말할까요? 위에서 보면 1차적으로는 ‘자신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온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스승 공자는 이러한 사람을 ‘동지(同志)’로 묘사하였습니다. 동지는 ‘뜻이 같은 사람’입니다. 뜻이 같은 사람이 모이면 엄청난 협력의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석가도 이런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유대 땅의 저명한 랍비들도 수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멀리서 온다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인가?” 라며 기뻐하는 것이 스승의 모습입니다.
스승이 제자를 찾아 나서는 일보다는 제자가 스승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해석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차적인 것은 표면적이고, 액면적인 해석입니다. 2차적인 해석은 바로 ‘해석의 확장’을 말합니다. 여기서 ‘멀리에서 온 벗’은 같이 동문수학하다가 나이가 들어서 헤어진 친구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대학에 진출하거나, 사회에 진출한 친구들을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많은 공부를 하고, 신지식을 익히고, 좋은 정보와 지식을 갖춥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동문수학한 벗이 있는 곳으로 오는 것을 말할 수 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각자 처소에서 배우고 익힌 지식과 지혜를 서로 나누는 즐거움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론]을 보면 ‘심포지움 symposium' 이 나옵니다. 이 말은 [향연(饗宴)]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는 [같이 고기와 술을 먹으면서 토론하고 대화하는 즐거운 시간]을 말합니다. 그리스에서는 이런 향연이 수시로 열렸습니다. 고전의 지혜와 향기에 기초하여서 서로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쏟아냅니다. 그래서 그리스는 가장 대단한 학문의 본고장이 되었고, 유럽문명의 젖줄이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멀리서 온 벗’을 만나 회포를 풀고,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정말로 즐겁고 신나는 일입니다. 설날과 추석에는 이런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공자는 여기서 ‘군자의 즐거움’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멀리서 오는 벗을 만나 즐겁고 기쁘게 지내는 것이 군자의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맹자는 군자삼락(君子三樂)에서 세 번째 즐거움을 ‘천하의 영재를 만나서 교육을 시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의 무고와 더불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즐거움과 더불어서 교육의 즐거움을 크게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즐거움은 교육이나 지혜보다는 다른 즐거움이다. 맛있는 것을 먹거나, 여행을 가거나, 게임을 하거나, 도박이나 술을 하거나, 자신의 취미와 여가를 즐기는 것 등 다양한 즐거움들이 존재합니다. 공자는 이런 즐거움을 말하지 않습니다. 일단 서로 배우는 즐거움, 붕우가 주는 즐거움, 그러면서 군자로서의 기품을 지키는 즐거움 등이 있습니다.
필자는 경영학 박사까지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논어와 탈무드를 경영의 현장에 연결하려는 노력도 기울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피터 센게의 [학습조직]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가 쓴 다른 책 [제 5경영]이 있습니다. 그의 책이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한중일의 전통적 가치관과 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탈무드와 논어를 비즈니스와 연결하는 시간은 그 동안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반드시 고전과 현대의 경영.경제 지식을 같이 연결하는데 탁월합니다. 물론 평소에 탈무드나 논어만 충실하게 읽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탈무드와 논어의 가치를 약화시키는 우(愚)를 범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를 ‘재구성’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온고지신(溫故知新)입니다.
논어의 학이편에 나온 것을 [학습하는 개인과 조직]에 3가지로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이 한 최상의 실천을 배우는 자세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고전을 깊이 배우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리스어로 ‘고전탐독자’를 ‘클라시쿠스’라고 합니다. 이리 우리는 정말로 훌륭한 양질의 교과서들을 익힌 사람들입니다. 또한 인류의 베스트셀러인 성경과 탈무드 그리고 논어를 익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현대사회를 만든 위대한 저작들을 익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직장에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회사를 ‘꼼빠니아’라고 합니다. 이 말은 회사와 동료가 어원이 같습니다. 그리고 먼 곳에서 온 친구는 국내외에서 온 직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강점과 능력을 발휘하면서 서로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이나 현대인들이나 반드시 ‘학습의지’와 더불어서 ‘붕우유신’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벤처의 왕국이요 요람’으로 불리웁니다. 미국 나스닥 시장에 미국, 중국 다음으로 많이 상장을 합니다. 인구 900만 밖에 되지 않는 나라가 그 많은 벤처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이 칼보다 강하다’ 라는 강한 ‘교육의지와 학습의지’와 더불어서 ‘하베르(친구)와의 하브루타 능력(지적 친교)’를 오랫동안 하였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6년을 같은 반에서 지내고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니고, 그리고 군대까지 같이 다니는 과정에서 ‘진한 우정의 무대’를 경험하고, 그 무대를 배경으로 하여서 창조력과 상상력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티쿤 올람’정신과 ‘후츠파’라고 하는 특유의 도전정신으로 무장합니다. 공자의 논어와 랍비들의 탈무드는 같은 방향성과 맥락을 가진 놀라운 책들입니다.
현대는 관리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관리와 우정관리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시대를 주도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나와 너’라는 ‘동학(同學)과 동행(同行)하는 돈독한 우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정은 유대인들의 유대교나 동양의 유교의 가장 중요한 덕목중에 하나입니다. 성공은 위대함의 유산입니다. 유전이 아니고 학습되어져야 하고, 반드시 친한 벗들과 같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혼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붕우유신의 자세는 ‘하베림- 친구들의 자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공동체의 사람들을 ‘하베림’으로 부릅니다. 전 세대가 서로 친밀한 ‘우정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진정한 성공은 각자의 학습과 교육에 대한 의지와 더불어 친밀하고 지성적인 친구들과 같이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 되는데 있습니다. 데이빗 호킨스라는 교육철학자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여기고, 나는 학습자가 되고, 그리고 반드시 위대한 고전과 명작을 중심으로 대화하고 토론하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학습자입니다. 그런데 친구는 스승입니다. 학습자는 배우는 마음으로 ‘학습자의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심판자의 질문이나 공격자의 질문을 던집니다. 학습자의 질문을 던지게 되면 서로 배움으로 ‘동반성장’을 하게 됩니다. 멀리서 온 친구는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더 풍성한 배움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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