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창세기에 나온 에덴동산 그리고 이브의 호기심
성서 창세기에 나온 에덴동산 그리고 이브의 호기심
“백권의 책에 쓰인 일보다
성실한 마음이 사람을 더 크게 움직인다”
- 벤자민 프랭클린
성경 최초의 부동산은 ‘에덴동산’이라는 패러디가 있다. 그 에덴동산의 뜻은 파라다이스이다. 즉 낙원이라는 의미이다. 태초에 우리 인간은 에덴동산에 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 낙원에는 ‘아담이라는 남자와 그 갈비뼈로 만든 이브라는 여자가 존재’하였다고 기록한다. 창세기의 인간창조신화이다. 여기서 신화는 MYTH라고도 하고, God's History 신의 이야기인 신화(神話)이다.
필자는 어려서부터 창세기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공부하였다. 아마 100회 이상은 공부하고 익혔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도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수정하고 변경해본 일이 없다. 어느새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어느새 고정된 전래동화나 신화처럼 전락해 버렸다. 생명의 말씀이라고 불리우는 성서의 이야기가 어느새 고정관념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때부터 성서의 이야기는 재미가 없고, 그저 타성에 젖은 이야기로 내 관념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스라엘에 유학을 가면서 경영학을 버리고 성서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성서에 대해서 솔직하게 접근하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다른 각도에서 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성경의 민족인 유대인들은 과연 어떻게 해석을 할까? 이슬람에서는 어떻게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해석할까? 심지어 철학자들이나 생물학자들은 어떻게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해석할까? 아담과 하와는 호모 사피엔스일까 아니면 호모 에렉투스 일까 등 다양한 고민과 접근을 해 보았다.
그러면서 가장 경계한 것은 가장 형편없는 조직인 ‘이단’의 거짓 해석을 경계하였다.이들은 순전히 엉터리이며 환타지로 성서를 보고, 교주나 창시자를 신격화한다.
아담과 이브는 왜 이리도 중요한 소재가 되고 인구에 화자가 될까?그것은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라는 믿음의 조상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담과 이브에 비하면 여전히 그 그레이드가 되지 않는다. 설교에서도 끝도 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담과 이브이다 .결혼하는 가정들은 아담과 이브의 창세기 말씀을 꼭 접하게 된다. 서로 돕는 베필(히브리어, 에제르 케네게도)이라고 불리우는 부부의 탄생이 이들로부터 먼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어떤 식물학자는 에덴동산에 대해서 재미있는 해석을 하였다.
그녀는 식물원을 가꾸면서 성경에 나온 에덴동산을 재미있게 해석한 글에 흥미를 가졌다.그녀의 해석에 기초하여 나의 인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본다.
에덴동산에서 사단의 사주를 받은 뱀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다. 선악과를 먹으면 신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교만과 허영심을 심어 놓았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면 여자가 먼저 뱀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먹는다. 그리고 아담에게도 주어 아담도 먹게 된다. 교부였던 크리스소톰이 말한 창세기의 원죄 ORIGINAL SIN은 하와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들은 먹지 말라던 금단의 열매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퇴출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에덴동산의 동쪽에 기거하게 되었다. 에덴동산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게 되었는데 아마도 농경과 목축을 겸하여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저절로 자라고,무엇이든 원하는데로 구하고 가질 수 있었던 에덴동산과 현실의 삶을 무척이나 달랐다. 이들은 살기 위해 노동을 해야 했다. 이들은 영생의 삶이 보장되지 않았고 평생 땀흘리며 수고하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여자는 해산의 수고를 하면서 남편에게 속한 존재가 되었다. 결국 흙에서 지어진 인생이 흙으로 가는 인생이 된 것이다.
아담의 원래의 뜻은‘흙이나 먼지’라는 뜻이고, 이브는 ‘어미나 엄마’라는 의미가 있다.성서를 잘 보면 다른 모든 창조물들은 신의 말씀과 기운으로 지어졌으나, 아담은 흙으로 지어졌다. 말씀으로 지은 창조물들과는 달리 사람은 신의 정성스런 손길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신의 형상 IMAGO DEI (히브리어로는 쩰렘 엘로힘)를 부여하였다. 일정 신성한 기운이 인간에게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성으로 지어진 인간들이 이제는 힘들고 고된 노동을 해야 했다. 바로 살아가는데 정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결국 인간의 힘든 노동은 아담과 이브에서 시작되어서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 일하는 존재’이다.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저주이고, 불행일까?
창세기는 저주라고 말하지만 이 저주속에도 신의 뜻과 축복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이를 발견하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탈무드에 보면 저주와 축복은 마치 서로 얽힌 줄과 같다.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간다는 것이다.
철학자 로버트 헤리슨이 말한 것이 있다.
“그는 우리의 삶이 고통이라고 여기지 말고 이브의 호기심에 감사해야 한다” 고 역설하였다. ‘이브의 호기심’은 먼저 동산 중앙의 먹지 말라는 금단의 열매를 먹었고, 그로 인하여서 아담과 하와가 낙원을 상실한 결과를 갖게 되었는데, 이것이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들은 모든 것이 약속된 에덴동산이 아니라 척박하고 고단한 삶의 현장에 던져지게 되었다. 이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일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노동하며 땀을 흘리고 수고해야 미래가 있다는 교훈을 준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을 떠난 것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전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원래 영생하도록 지어진 존재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에덴동산을 나가야 했고 그 아담과 하와의 원죄가 모든 인류에게 미쳤다고 말한다. 자칫 아담과 하와는 ‘나쁜 인간’의 전형이며 대명사로 여기게 만든다. 그렇게 세뇌가 되었는데, 과연 아담과 하와가 ‘나쁜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가? 성서는 기실 이들로부터 믿음의 조상들도 나왔고, 수많은 민족이 나왔다고 한다.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이다.
가든을 꾸미는 사람은 이 창세기의 교훈을 너무나 잘 몸소 배우게 된다.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정말 힘들고 수고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만드는 정원은 에덴동산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자연에게서 얻은 식물과 자원을 가지고 만드는 인간의 정원이다. 인간의 정원은 심은대로 거두지도 않는다. 잘 심었어도 소출이 나오지 않거나, 꽃을 못 피우기도 하고, 애쓰고 돌본만큼 돌아오지 않기도 하다.
인간의 정원은 실패를 거듭하기도 하는 정원이기도 하고,
인간의 정원은 에덴동산이 아니기에 안개속을 걷는 것 같은 정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은 더 많이 대비하고 준비하고 꿈꾼다. 올해가 작년보다 좋아지기를, 내년은 올해보다 풍성하기를 바라고 바란다.
약 10년전에 주말농장에서 정해서 일을 해 보았다. 삽질을 하고, 풀을 제거하고, 땅을 잘 고르는 작업을 하고, 씨를 뿌려 보았다. 약 100평의 주말농장일은 정말 쉽지 않았다. 봄부터 가을까지 풀을 제거하는 일만 하여도 쉽지 않았다. 풀과의 전쟁에서 인간은 그리 이기기가 어렵다. 아무리 기름진 밭이라도 제때에 풀을 제거하지 않으면 무성한 풀밭이 된다. 그리고 원하는 작물을 얻지 못한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농사를 지어보지 못한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농사를 지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목축을 하였을까? 아마 지혜롭고 영리한 신석기인의 대표라고 볼 수 있다. 그로부터 농사와 목축의 기술이 가르쳐졌을 것이다. 신이 주신 지정의를 가지고서 이들은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고난에 맞서서 싸우며, 자녀를 낳고 신의 뜻을 행하기에 힘썼을 것이다.
이들이 땀을 흘리며 수고하면서 이들에게는 그 보람이라는 열매와 소출을 얻을 수 있다는 감사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살아간다는 것은 감사의 연속이다. 물론 때로는 불안하고 걱정되며, 흔들릴 때가 많다. 그러나 그 불안과 걱정에 젖지 않으려면 노동하고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해보면 어느새 불안과 걱정에 젖지 않는다. 그리고 감사가 찾아오고 삶이 용기를 갖게 된다.
이브의 호기심에 우리는 결국 감사해야 한다.
성서의 근본과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성서가 가르쳐주는 솔직함이다. 성서는 결코 솔직함을 잊지 않는다. 다른 경전?이라는 것들을 보면 가르치는 스승이나 지도자의 허물은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 하지만 성서는 인간은 근본 잘못을 저질렀으며, 범죄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범죄에도 불구하고 용서와 회개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저주속에서도 축복이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나는 가장 솔직하고 정직한 책을 성경으로 본다. 그래서 지금도 성서연구의 즐거움이 크다. 인간을 향한 신의 뜻을 찾고 발견하는 즐거움이 크다.
아담과 이브라는 인류의 조상도 허물과 실수를 저지르는데 우리도 인간이기에 그런 허물과 실수를 남기는 것이다. 또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도 별로 잘한게 없다. 그저 신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모습을 보인다. 허점과 약점이 있어서 나는 도리어 이들이 인간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간을 위한 공부가 바로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무늬를 다루는 학문이다. 성서에도 이런 인문학적인 요소가 창세기부터 시작된다. 우리 안에 인간으로의 인간적인 모습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 거기에 축복과 감사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가정은 하나의 정원과 같다. 그래서 이 정원을 잘 가꾸고 지켜내려면 땀을 흘리고 수고해야한다. 그리고 좋은 열매와 소출을 얻기 위해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하며 의지하며 짐을 지어 나가야 한다. 때론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올지라도 여기에 신의 뜻이 있음을 생각하면서 하루하루가 불안이 아니라 감사라는 것도 발견하는 사랑의 정원을 만들어가야 한다. 행복의 정원을 만드는 일은 손의 수고와 정성에서 비롯된다. 땀을 흘리고 수고하는 정성이 바로 가정을 잘 유지하는 길이다. 정성을 다하여 주어진 사명과 생활을 감당하는 것이 축복이고 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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