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Genealogy)의 연대기
영국에서 오랫동안 한국사를 가르쳤던 도르티나 도이힐러 라는 여성노학자가 있다. 그는 특이한 연구를 하였다. 한국의 [족보]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이 족보가 가지는 연대기성에 주목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조상의 눈 아래서> 라는 저서를 출간하였다.
“신라 골품제가 만들어진 4-5세기부터 조선 후기의 19세기까지 한국을 지배한 것은 정치체제가 아닌 친족 이데올로기이다” <저서(著書) 중에서>
그 책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지배층은 삼국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고, 친족 질서야말로 한국사를 관통하는 근간이며 그것은 바로 ‘유교’와 관련이 깊다고 기술하였다. 이 책을 2020년 여름에 구입하여 보았는데, 확실히 제 3자의 눈으로 본 한국의 맥을 제대로 집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유교가 들어왔는데, 유교는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물론 공자 자신이 유교를 만든 것도 아니다. 다만 유교는 국가의 기틀이나 질서와 관련된 운영원리를 상당수 담고 있다. 그래서 유교는 부유하고 높은 지체 높은 사람들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부와 권력의 되물림과 승계가 역사적으로 계속 이어졌다. 유교 이데올로기가 단지 통치수단만이 아니라, 신분상승과 가문의 영광을 위한 초석이라는 것이다. 전자보다 후자가 더 강하게 뿌리 내린 민족이 한민족이라는 것이다.
한번 양반은 영원한 양반이고, 한번 노비는 영원한 노비처럼 인식되던 시절이 불과 오래전이 아니다. 그래서 조선에서 현대에 이르는 동안에 양반처럼 족보를 만들기도 하고, 양반처럼 보이기 위해서 제사도 지내야 했다. 그래서 대한조선에 너도 나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게 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신분상승에 대한 욕망은 과거의 유물이 전혀 아니다.
그런데 성경이나 탈무드를 들어가 보면 족보와 관련된 스토리들이 담겨 있다. 어찌 보면 성경책도 족보책인가 싶을 정도로 무엇인가 관통하는 사상이 있다.
약소민족인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비록 낮고 천한 곳에 있었지만 그래도 [신분상승의 욕망]만은 여타 민족보다 강하고 우월하였다. 그 증거가 바로 문해율이다. 어려운 히브리어와 아람어, 그리고 헬라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민족은 아마도 히브리 민족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다른 학문에서도 두각을 보이면서 이들은 서서히 세계사의 우수 민족으로 올라선다.
성경 역대기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정통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담에서부터 조상들, 그리고 그 후손들인 사울과 다윗까지의 계보를 다룬 기록이 담겨 있다. 거기에 등장하는 850면의 인물중에 25명의 여인들도 등장한다.
그리고 신약으로 오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자신들의 믿음의 조상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통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족보를 등장시킨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로 이어지는 대목을 보면 유대인들도 상당히 [족보]에 공을 들이고 있고, [가문과 근본]을 중시여기는 민족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마태복음 1장은 아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라고 시작된다.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14대, 그리고 다윗에서 다시 예수 그리스도까지 14대로 이어지는 [족보의 연대기]를 통해서 메시야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다른 연구에 의하면 ‘성경계보’ 속에 나와있는 인물은 2197명이며 그중 이름이 2∼4개인 인물을 모두 포함하면 2618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이 족보를 활용하여서 자신들의 민족의 우수성이나 근본성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유학중에 학업을 하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 것이 있는데, 바로 족보에 대한 것이었다. 지도교수에게 혹시 족보나 집안 내력이 있는지를 궁금하여 물었다.
“나는 포로기 이후 느헤미야의 직계 자손이네” 라고 하였다. 집안 대대로 랍비를 양성하였던 집안이었고, 그도 또한 명문대학에서 성서학을 지도하는 교수로서 자신의 근본성이나 연대기성을 밝혔다. 그렇다면 [명문가의 비밀은 상당히 족보와도 관련이 깊다] 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질문은 “예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의 후손들이 지금도 존재하느냐?” 라는 질문이었다. 지도교수는 “그렇다. 특히 바리새인의 후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 후손들중에는 주석가들도 있고, 랍비들도 있고, 그리고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지도급 인물들이 많았다” 라고 하였다.
한국의 경우에도 혈연,학연 그리고 지연을 중시여기는 문화이다. 그런데 이 문화에서도 가문대대로 내려오는 역사성이나 연대기성이 강한 가문들이 있다. 그것이 ‘유교’적 가풍과 관련이 깊다고 한다.
그렇다면 족보와
유교를 연결하여 생각해보는 연구가 필요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더 건드리기가 힘들다. 이 방면으로 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풍월수준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고전을 공부할 때 그래도 노자와 장자의 사상, 한비자나 묵자의 사상도 좋지만, 유가의 사상을 면밀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아니면 성서나 탈무드를 볼 때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이제 족보의 중요성과 가치는 많이 하락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중요한 것은 [전통(傳統)과 가풍(家風)]이다.
집안의 전통과 가풍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의 족보를 들이밀면서 자식들에게 [정통성과 자부심 교육]을 많이 시켜왔다. 성서의 조상들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정말로 대단하고, 성서와 탈무드를 배우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고, 자신들의 학문과 비즈니스에서 이루어 놓은 업적과 성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렇다면 유학풍의 나라에서 21세기에 한국의 자녀들에게 심어주어야 할 것도 [정통성과 자부심 교육]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가문의 영광이 부족하다면, 명문가를 만들기 위한 기초도 부족하다면 나로부터 시작하여 [자부심]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매사(每事)에 진선(進善)할 일이다.
족보에 대한 생각이 이렇게 이어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독서하는 즐거움은 또 다른 독서의 즐거음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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