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질문, 인간의 질문>>
1편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장 9절)
김재훈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 유학
성지 이스라엘 교육연구소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질문들을 주고 받으며 삽니다.
어떤 질문은 답변하기 쉬운데, 어떤 질문은 답변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질문은 평생 씨름해야 하는 질문도 있습니다. 답이 없는 늘 평행선인 질문도 심지어 있습니다.
質問(질문)의 한자적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로 품질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품질의 질문이 없다면 이것은 질문으로서의 가치가 없습니다. 바로 생각하는 질문이라야 합니다. 어찌보면 쉽게 답변하기 힘든 벅찬 질문이어야 합니다.
또한 질문은 히브리어로 [쉐알로트] 라고 합니다.
이 의미는 [궁금증이나 호기심]과 유사한 의미를 가집니다.
사람들은 궁금한 것은 못참는 성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알아내고,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구도자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질문을 통해서 이를 알아내려고 합니다. 우리가 평생 호기심이 죽지 않는다면, 질문하는 습관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최상의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유대인들입니다.
<질문의 힘>
질문은 반드시 힘을 가집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몇가지로 정리해서 올려봅니다. 도로시 리즈의 책을 주로 참고하여 보기를 바랍니다. 여러 질문에 대한 문헌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7-8가지의 특징들이 나타납니다.
질문을 하면 답이 나옵니다.
여기서의 질문은 폐쇄형이 아닌 개방형 질문이 좋다고 합니다.
바로 무엇을 what 보다는 어떻게 how가 들어가는 단어가 좋습니다.
상대방에게 무엇이냐 라고 묻는 것은 지식적인 면이고,
어떻게 라고 묻는 것은 학습적인 것입니다.
질문을 하면 생각을 하게 됩니다.
논리적인 질문을 하면 논리적인 대답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이 누군지를 알려면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생각을 알려면 그 사람의 생각과 의도를 파악할 만한 질문을 가지고 상대해야 합니다.
질문을 하면 그 질문의 이유에 대한 합당한 정보를 얻게 됩니다.
질문을 하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하거나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언급했듯이, 질문을 하면 잠시 바보가 되지만, 질문을 하지 않으면 영원한 바보가 됩니다. 세상은 사실 세대전승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질문하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필요로 하는 살아가는 기술과 정보를 얻는 것입니다. 이를 소프트 스킬 soft skill 이라고 합니다.
질문을 하면 통제(control)가 됩니다.
질문을 함으로써 스스로가 변화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하게 되면 감정조절이 이루어지고, 상황을 잘 통제하게 됩니다. 그래서 통제력이나 절제력(control power)을 갖추게 됩니다.
질문을 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열어줍니다.
질문을 함으로써 상대방의 빗장을 허물어 버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폐쇄적인 사람들의 특징은 질문을 자신속에 허용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것에서 국한됩니다. 질문은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attention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질문을 받는 사람은 사실 자신이 [관심을 받고 있는 존재] 라는 인식을 하게 되어서 나중에는 질문들을 기다리게 됩니다.
유대인의 랍비들이 바로 그런 존재들입니다.
수많은 질문에 답변하려는 지성적 노력들의 산물이 랍비문학이나 탈무드전통으로 남은 것입니다. 질문을 서로 주고 받으면 서로 현명해지고 서로 정교해집니다.
질문은 또한 경청(lean hearing)하게 합니다.
경청의 경은 ‘기울일’ 경입니다. 청은 ‘들을’ 청입니다.
즉 쉐마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쉐마는 신명기 6장에서 나온 말인데, 이 말은 ‘들으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3명의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합니다.
첫째는 부모님의 말씀, 둘째는 선생님들의 말씀, 셋째는 지도자들의 말씀 입니다. 그런데 이 세명의 사람들도 사실 한 분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듣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경청은 곧 상대방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서로 교감의 자리로 이끕니다.
질문은 어느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하기 위한 징검다리입니다.
심지어 미지의 세계로도 진입하게 해주는 가이드 역할도 수행합니다. 질문에는 힘이 있습니다. 또한 질문에는 숨은 힘과 더불어서 변화를 시키는 감동이 있습니다. 질문의 중요성과 가치를 발견해야 합니다.
질문을 주고 받다보면 서로의 교감이나 동감의 기회가 생깁니다. 우리는 사실 귀로 듣습니다. 그러면서 눈으로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로도 듣고, 마음으로도 듣는 것입니다. 듣기의 영역은 사실 보는 것 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탈무드는 인간에게는 4개의 귀가 있다고 합니다. 육신의 귀, 마음의 귀, 어둠(사단)의 소리를 듣는 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또한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다보면 설득력이 생깁니다.
자신의 행동을 바꾸거나,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게 하고 싶다면, 무엇인가를 깨닫고 인식하며, 크게 기억하게 하고 싶다면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설득하는 - 자기 설득의 과정이 정말 필요합니다. (self-persuasion) 이 말은 비교적 최근에 나온 말인데, 자신이 자신을 설득한다는 것은 사실 남을 설득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합니다. 남을 가르치기 앞서서 자신을 가르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self-teaching이 없이 남을 가르치려는 것은 신뢰를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질문도 일종의 문door입니다. 어느 집을 가든 도어가 있습니다. 그 집을 제대로 알고 싶으면 여러 개의 문을 열어보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서의 세계를 알고 싶다면, 탈무드의 세계를 알고 싶다면, 심지어 높고 고상한 학문의 세계를 알고 싶다면 반드시 핵심이 되는 질문을 가지고 그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열리지 않습니다. 질문이 없다면 일반적인 지식이나 사실에만 머물게 됩니다. 그 이면의 깊고 큰 보물을 찾아앨 수 없습니다.
그 핵심이 되는 질문을 키워드 key-word 라고 해도 좋고, 키퀘스천 key-question 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신의 첫 번째 질문>
신의 첫 번째 말씀은 창세기 베레시트(‘태초에, in the beginning)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이 말씀은 첫 말씀이기에 가장 중요하면서 가장 놀라운 계시(revelation)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시며, 각기 종류대로 창조물을 만드셨습니니다. 그리고 인간이 거처할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 동산에 남자와 여자를 두셨습니다. 그러면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인 선악과 영생을 얻게 만드는 생명나무]를 두셨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하나님께서 첫 명령을 내립니다. 질문이 아닌 계명입니다. 이 계명의 의미라는 것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방적인 계명이라고 함은 지키면 살고, 지키지 않으면 죽는 것 같은 일입니다.
바로 동산의 각종 나무는 다 먹을 수 있지만 동산 중앙에 선악과는 반드시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반드시 먹지 말아야 할 그 선악과를 돌려 먹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데, 이들은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다만 인간의 불순종의 범죄가 나타났습니다.
히브리 원문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많은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금지되지 않은 자유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먹을 것에 대한 금지계명을 통해서 자기 절제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나중에 금지계명은 유대인들의 식단에 대한 율법의 절대적인 기초(패러다임)가 되었습니다.
둘다 선악과를 먹고서 둘은 서로가 벌거 벗은 것을 알고 부끄러워하였습니다. 히브리어로 벌거벗은 것은 ‘아룸 arum'이라는 원어를 쓰는데, 이는 나중에 뱀의 [간교함]과 동의어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둘의 벗었음을 인하여 최초로 무화과 나뭇잎 옷을 가지고 몸을 가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신으로부터 자신들의 벌거벗었음을 완전히 가리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곧 숨어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어 버립니다. 죄인의 속성은 곧 숨기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감춥니다. 죄의 속성은 곧 멀어집니다. 교제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관계로부터 멀어집니다.
인간은 기억과 감정의 동물입니다. 현대 뇌과학에서는 인간의 기억과 감정을 주관하는 부분을 [편도체와 해마]라는 부분인데, 바로 그 부분이 동시에 감정과 기억을 관장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바로 그 신의 계명을 거역했다는 기억이 강하게 생겨났고, 그 기억이 곧 죄책의 감정으로 자리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이들의 행동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들은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는 마치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 눈을 떴다는 것입니다. 또한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morality)을 말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반대로 부도덕성(immorality)를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신과 단절된 모든 인간들의 이야기로 재연됩니다. 진정한 생명의 비밀은 신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우리가 너무나 자주 놓치는 질문입니다.
일종의 신과 인간의 숨바꼭질(hide and seek)을 보는 것 같습니다.
창세기 2장 9절로 갑니다.
“바이크라 엘로힘 엘하아담 바이오멜 로 아예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신으로부터 멀어진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 어느 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다가옵니다. 단순하게 자신이 창조한 인간에게 질문을 합니다.
“아예카 Ayyeka?”
우리는 지금 창세기 토라의 문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성경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문입니다.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질문을 통과해야 합니다.어려서부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 identity을 중요한 핵심질문에서 찾습니다.
어떤 어린이가 부모님의 집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부모는 그 어린이를 찾아서 이리 저리 찾도록 찾으러 다닙니다. 바로 그 아이의 소재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육신의 부모도 자식이 어디에 있는지 늘 알고 싶어하여 자주 물어봅니다.
“너 지금 어디에 있니 Where are you, 에이포 아타?”
이 질문은 단순하지만 말문을 여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설교를 보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에 아담의 숨은 장소 location 를 물어보는게 아니라, 아담의 현 상태 state를 물어본다고 말합니다.이 글을 쓰고 밝히는 나 자신도 그렇게 수없이 들었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이나 의문을 가하는 것을 차단한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신은 전지전능해서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가 무엇을 하든 다 아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저는 많은 목회자들이 정답을 말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정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유하거나 통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책에서 읽은데로, 교수가 강의한데로, 목회자가 설교한데로 수동적으로 듣고 마치 그것이 사실이나 진리로 인식해버리는 결과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아예카? 너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질문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탈무드는 “질문속에 답이 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사실 히브리어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제에 대해서 불분명합니다. 과거속에도 미래가 있고, 미래속에도 과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질문에 대한 반응이 나와야 합니다.
“너 어디에 있었니? 너 어디에 있니? 너 어디에 있을 거니?” 라는 질문도 나와야 합니다.
이 질문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인간 부모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자신이 낳은 사랑하는 아들과 딸에게 어떻게 대응하겠습니까?
여기서 위대한 신의 질문 앞에 우리는 감화되어야 합니다.
신이신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담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무서운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너 왜 내 말을 듣지 않았니, 너 왜 죄를 지었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위에서 질문은 곧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상대방을 자신의 아래로 끌어 내리려는 질문은 파괴적이고 비관계적인 말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필경 죄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로 인하여 신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더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자신이 창조한 피조인생을 멸하는 하나님은 정녕 어떤 하나님입니까? 자식이 잘못을 했더라도 그 잘못이 자식의 전부를 파멸로 이끈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심판주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자신이 심판하는 신을 나는 믿지 않겠다” 라고 하였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은 사실 아담, 즉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질문입니다. 그러면서 대화의 말문을 열려고 하는 애정어린 질문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은
사실 오늘날 아담에 속한 인류에게 해당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또한 두 가지를 살펴봅니다.
하나는, 부르시며 라는 동사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말씀하시는 동사입니다. 이 두 동사를 보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의 중요성과 더불어서, 인격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말씀하시는 신의 모습이 보여집니다.
인간이 창세기의 신을 회피할 때, 신은 인간을 찾습니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이는 인간이 어디 있는가에 대한 정보를 묻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인 의도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성서를 잘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도다 라고 시편에 선언을 합니다. 아담은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지금껏 선하시고 인자하신 아버지와 갖은 교제에서 기쁨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를 떠나 동산 구석의 나무들 사이에 숨었다는 것에서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고 신은 다가온 것입니다.
신과 아담은 서로 영혼의 언어를 사용한 하브루타 였습니다.
그러나 이 하브루타가 깨질 수 있는 상황이 왔습니다. 인간편에서 이 하브루타를 깨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신은 도리어 아담을 더욱 교훈합니다. 하브루타는 상호작용 interaction이며 교제 fellowship입니다.
이 하브루타가 깨어지는 것을 전 [에덴동산의 위기]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에덴 동산에 대해서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은 아담의 갈비뼈(늑골뼈라는 해석도 있음)로 하와를 만듭니다. 그리고 둘의 가정을 세웁니다. 바로 에덴동산에 최초의 가정을 세웁니다.
그리하여 그 가정이 에덴동산에서 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금단의 열매를 먹고 순간 타락의 길로 돌아섭니다. 그리고 관리하고 돌보던 에덴동산의 나무 뒤에 숨습니다. 그 나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무화과 나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유대인의 비전인 카발라에 아담과 하와에 대한 대목이 나옵니다.
아담은 동물을 돌보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이브는 반대로 식물들의 특성을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였다고 봅니다. 에덴동산의 식물들을 연구하던 하와는 마침내 지식나무를 발견합니다. 그러면서 이 나무의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힘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하와는 천상의 흐름을 상징하는 생명나무(세필로트)와 교류하지 않고 타락한 천사장인 뱀, 사마엘과 교류합니다. 그리하여 나중에 그 나무에 매혹되었고, 그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또한 그 나무에 다가오는 아담에게도 줍니다. 이것이 바로 소위 원죄라는 것을 저지르는 배경입니다.
카발라는 성경에 적힌 모든 것은 상징으로 봅니다.
아담은 남성원리이고 하와는 여성원리입니다. 이브는 예소드(기초) 즉 달에 거한다면 아담은 티페레트 즉 태양에 거주합니다. 이것은 하와가 지구의 영역인 말쿠트(왕국)에 더 가깝고 결과적으로 말쿠트 아래의 세계인 혼돈의 지하영역인 클리포트(지하)의 영역에 더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클리포트는 역전된 생명나무로 세피로트의 어두운 측면입니다. 뱀은 이 클리포트에서 올라와서 나무위로 기어 올라 하와를 유혹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와 즉 예소드는 생명나무의 균형과 안정을 유지하고 그 전체 체계를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뱀에 의해 유혹을 당함으로써 하와의 관심은 아래로 향하게 되었고, 신(케테르)과 연결된 아담의 관심까지 동일한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고 전체 체계가 붕괴되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이 둘은 하계인 클리포트의 어두운 영역으로 던져졌다는 것입니다. 카발라의 이 이야기는 상징주의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그런데 이 깨어진 아담에게 신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서의 메시지의 집중해야 합니다.
신이 다가오시고, 부르시고, 그리고 일으키십니다.
여기서 행동하는 신의 모습을 봅니다.
유대인들에게 토라 창세기는 정말 중요한 성서입니다.
이들은 찾아와서 부르시고 이르시는 신의 토라를 가장 신성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도 신을 찾는 자들로 살아갑니다.
신이시여,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나는 어디에 있으며,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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