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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강연 이야기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과 코로나 19, 이태리(2020년 글)

by 코리안랍비 2022.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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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그리고 코로나19

늘 인문학 서적을 달고 다니는 사람중에 하나인데, 최근에는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하면서, 반대로 인문학이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처방약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름하여 [위기인문학]이 이제는 필요하다.

에릭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현대사회를 묘사한다.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큰 가치관은 바로 자유와 풍요를 통한 행복의 성취이다] 하지만 이는 노스텔지어적 발상이다. 사실 현대 한국의 모습은 자유와 풍요로부터 가까워진 것 같지만 행복에서는 멀어져있다. 우리는 자유와 풍요를 누리면서도 다만 ‘인간다움’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는 바로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말한 ‘돼지들의 나라’와 다름이 없다. 바로 이 점이 위기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로 경제적 풍요와 민주주의의 자유를 누리지만, 사실 우리 삶에 수많은 인간적인 제약요소들이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4차 혁명이 와도 우리는 그저 즐겁지 않다. 급속도로 변해가는 도시의 삶에서 여유와 만족을 느끼는 것은 이제 사치가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진일보하지 않고 있으며 수많은 제약요소에 늘 노출되어 있다. 스스로 자각하는 정신이 없다면 우리는 계속 후퇴할 것이다.


최근 우리는 그 행복을 앉아가는
제약요소중에 가장 강력한 것을 만났다.
최근 코로나19는 전세계를 공포 분위기로 몰고 있다.
연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확진자로 나오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에 다다르고 있다. 이럴 때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어 보인다. 안전지대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사람들과의 접촉을 멀리하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는 절대 가지 않는 것이 상책처럼 보인다. 즐거운 곳이 아니라 즐거운 우리집에 있는 것이 상책이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쓴
[세상을 사는 지혜]라는 책을 보면,
그가 짤막하게 쓴 지혜로운 문구들이 있다. 그중에 240번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자연스레 가라앉기를 기다려라” 이 말은 마치 비틀즈의 ‘렛 잇 비’를 보는 것 같다. 쇼펜하우어가 말하기를 “바다가 사나워졌을 때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배가 폭풍우를 만났을 때는 안전한 항구로 몸을 피해 파도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다. 사태를 가라앉히려고 서투르게 개입했다가는 오히려 험한 재난을 당하기 십상이다. 일이 진행되는 대로 맡겨두고 사람들 마음이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기를 기다려라. 시간이 흐름에 맡겨두면 마침내 소란도 가라앉게 된다. 흐르는 물을 흐려놓는 것은 쉽다. 그러나 다시 맑은 물로 되돌려놓는 일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대로 내버려두고 자연스레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우리가 코로나19에 너무나 어설프게 대처한 나머지 도리어 된통 당하고 있다. 이제는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사태가 진정되고 있다. 우리가 지나치게 두려워해서도 안되고, 지나치게 겁을 먹은 것도 있다. 그저 사태를 관망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상책인 것이다. 지금도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면서 코로나19와 싸우는 많은 전사들이 있다. 의료진들이 있고, 시민영웅들이 있다. 이들을 그저 위로하고 격려하며 어서 하루바삐 코로나 19가 진정되어 자유와 해방을 맛보는 순간이 왔으면 좋겠다.


얼마전에는 카뮈의 ‘페스트’와 관련하여 장문의 글을 썼는데, 오늘은 또다른 페스트 이야기를 가지고 왔다. 그 이유는 바로 ‘이탈리가’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위기사태 때문이다. 중국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는 이탈리아가 새로운 코로나의 진원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전유럽이 코로나19로 고통받고 있으며, 이제 코로나19가 전세계적인 범유행병 pandemic 판데믹이 되었다.


고통받는 이탈리아가 어서 빠른 시일내에 선진국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하고, 건강을 되찼으면 하는 바램에서 데카메론을 살펴보았다. 이탈리아는 저력이 있는 나라이다. 그동안 수많은 위기를 극복한 나라이다. 이태리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다.



이태리 르네상스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의 <신곡>,휴머니즘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74)의 칸조니에레>에 이어, 오늘은 르네상스를 완성한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75)의 <데카메론> (Decameron)을 소개한다. 보카치오는 근대 소설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이 데카메론은 원본으로 하면, 약 800페이지나 되는 거작이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함부로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자신도 그저 ‘제목’만 읽은 것 같다. 사실 요약본이나 문고판만 보아서 그런지 전체적인 글의 흐름이나 대략은 알지만, 디테일하지 않다.

보카치오의 이 위작 [데카메론]을 디테일하게 읽지 않았지만, 한가지 흥미로운 점이 눈에 뛴다. 바로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기에 14일간 젊은이들이 별장에 피신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코로나 19도 잠복기간이 14일이어서 감염병 의심자는 자가격리를 14일간 한다는 것인데 우연의 일치인지 재미있게 다가온다. 자 데카메론 속으로 들어가보자.

서기 1346년에 시작된 흑사병(Black Death)은 전 유럽을 휩쓸어 7년 동안에 전 인구를 반으로 줄였다. 정확한 통계는 어렵지만 유럽 인구가 1억정도 였는데, 약 2500만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나온다. 원래의 인구로 늘어나는데 150년이 걸렸다. 나쁜 것은 모두 동양에서 라고 생각하는 유럽인들에 의하면, 흑사병이 중앙 아시아에서 시작, 비단 길(Silk Road)을 통해 크리미아에 도착, 검은 쥐들이 바톤을 이어 받아 병균을 보유하고 있는 이(Oriental rat flea)를 사방에 퍼트렸다고 한다. 이 페스트라는 이름은 원래 라틴어로 [Pestis]에서 유래했다. 바로 인간의 피부가 괴사하여 까맣게 변하면서 죽어가는 괴질이다.


당대의 페스트는 성서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에 이어 두 번째 종말론적인 장기 역병이었다.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의 주도가 피렌체이다. 피렌체의 다른 이름이 플로렌스이다. 플로렌스를 원래 ‘꽃의 도시’로 불리웠다. 로마군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피렌체의 아르노 강가에 핀 수많은 꽃들을 보면서 ‘플로렌스’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플로렌스에서도 페스트 피해가 막심하여 인구의 3/4이 죽었다. 이 질병을 피하려고 젊은이들 10명이 도시에서 좀 떨어진 마을로 피신한다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다.


페스트가 퍼지자 도시의 수많은 관원들은 도시의 산더미같은 오물들을 치우고, 사람들이 시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봉쇄하였다. 기독교 국가인 이태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회를 열고 기도문을 열심히 외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정적일 때 기독교의 힘은 피상적이고 거짓스러웠다.


이 젊은이들은 10일을 머무는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저녁마다 모여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데카메론>이란 10이라는 뜻의 데카(deca)와 날이라는 뜻의 메론(meron)이 합쳐진 단어로 ‘10일’ 이라는 뜻이다.


매일 10사람이 차례로 이야기를 하나씩 해서 10일 동안에 100편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10명 중에 7명은 여성인데 그 중 4명은 4대 미덕(분별, 공정, 온화, 인내)을, 나머지 3명은 3대 종교적 미덕(믿음, 소망, 사랑)을 대표하고, 3명의 남성은 고대 희랍에서 주장한, 영혼을 이루고 있는 세 요소(이성, 정신, 욕망)를 나타낸다고도 한다.


<천일야화>에서와 같이 ‘이야기 속의 이야기’ (frame story) 구조로 되어있고 페트라르카의 <칸조니에레>에서와 같이 민간에서 사용되는 이태리의 구어체로 쓰여졌다.
단테가 [신곡 神曲]이라는 명작을 남겼지만,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Mama Commeda'라는 칭호를 얻는다. 이는 바로 신곡에 대비되는 [인곡 人曲]이라는 뜻이다.


이 데카메론에 나오는 이야기 몇 편을 소개한다.
이슬람교를 믿는 무즐럼 나라의 어느 군주(Sultan)가 사회 사업을 많이 하다가 국고가 바닥이 난다. 고리대금 업을 하고 있는 돈 많은 어느 유태인한테서 돈을 빌리기는 해야 할텐데 이 유태인은 욕심이 많아서 공정한 거래를 하기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권력으로 강요하기도 싫다. 궁리 끝에 유태인을 불러서 어려운 질문을 한다. 유태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 중에 어느 것이 하느님을 바르게 믿는 종교냐고 묻는다. 대답에서 꼬투리를 잡아 처단을 하고 대신 돈을 쉽게 빌리려는 뜻이다. 군주의 속을 짐작 못할 유태인이 아니다. 유태인은 생각 끝에 우선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군주한테 들려준다.

어느 나라에 대대로 전해 내려 오는 귀중한 반지가 있다. 이 반지를 물려 받는 자가 나라를 물려 받게 되어 있다. 현 군주는 죽기 전에 세 아들 중 누구에게 주어야 할지 고민에 쌓인다. 드디어 훌륭한 보석 세공인을 불러 반지 두개를 똑 같게 만들게 한다. 세 아들을 각각 따로 불러 반지 하나씩 주면서 나라를 잘 다스리라고 한다. 군주가 죽은 후 세 아들이 모여 보니 모두 다 가지고 있어서 혼란에 빠진다.

이야기를 마친 유태인은, 세 반지 중에 어느 것이 진짜인지 모르는 것처럼, 세 종교도 어느 것이 진짜인지 모르게 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현명한 대답에 감복한 군주는 실토를 하고, 솔직하게 나오는 군주의 태도에 감명 받은 유태인은 좋은 조건으로 돈을 빌려 준다.

이렇게 유머와 위트로 된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음담 패설도 많이 있다.
이 글을 올릴까 말까 하다가 용기를 내어 올려본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바로
이러한 부분 때문에 오랫동안 [금서목록]에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책을 읽으려고 혈안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금서를 이렇게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다음의 이야기는 올려 놓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얼굴을 약간 붉히면서 읽어볼 부분이다.

수녀원에서 일하던 정원사가 까다로운 수녀들의 잔소리에 실증이 나서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정원사의 여러가지 이야기를 듣던 젊은 농부가 여성들만 살고 있다는 수녀원에 매우 흥미를 느낀다. 도끼 한 자루를 들고 그 수녀원을 찾아간다.
농부는 수녀원에서 귀머거리 벙어리 행세를 하면서 구걸해서 배를 채운 후 보답으로 땔감을 만들어 준다. 이것 저것 힘든 일들을 도와 주다가 드디어 수녀원장의 마음에 들어 정원사 겸 막일꾼이 된다.
두 수녀가 음심을 품는다.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니 비밀이 보장될 터, 한 수녀는 망을 보고 딴 수녀는 그를 유혹한다. 마다할 농부가 아니다. 딴 수녀들도 일을 벌린다. 결국 수녀원의 모든 수녀가 다 즐기게 된다.

마지막에는 수녀원장까지 합세를 한다. 그런데 수녀원장은 수녀들에 비해 더 많이 요구한다. 그러지 않아도 힘에 겨운 차라 농부는 입을 연다. “원장님, 수닭 한 마리가 암닭 10마리를 해 낼 수는 있어도 남자 10명이 여자 한 명을 만족하게 해 줄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몸 하나로 여기 9명에게 봉사하자니 이제는 더 못하겠습니다. 저를 해고시던지 ...” 수녀원장은, “아니, 벙어리라드니 ... “ 농부가 대답하기를, “정말 벙어리였어요. 날 때부터는 아니고 병 때문이었는데 어제 말문이 터져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지요.”

이 농부를 해고하자니 아깝기 끝이 없고 또 소문이 항간에 퍼질 터이라, 수녀원장은 좋은 말과 좋은 보수로 붙잡아 두고 수녀들에게 순서를 짜 준다. 모두가 행복한 날들이 지나가고, 수녀원장이 죽은 후 농부는 그동안 번 돈을 짊어지고 고향에 돌아가 여생을 잘 보낸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사뭇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타락한 인간사회의 단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거룩하고 신성한 곳으로 불리우는 수녀원에서도 이러한 불륜이 행해지는 것을 보면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지독한지도 발견하게 된다.

데카메론에 등장하는 적나라한 성적 묘사, 수도사들의 추문, 위선에 대한 폭로, 정치적 풍자,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빈익빈 부익부에 대한 경제의 불평등성, 인간이 추구하는 말초적 쾌락, 사랑의 시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데카메론을 보면서 여러가지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데카메론 하브루타를 해보자.

페스트가 유럽대륙을 휩쓸고 잘나고 허울뿐인 종교가 인간을 제대로 구원하지 못하는 때에,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취했는가? 그 당시의 살아가는 시대의 기쁨은 무엇이고, 행복은 무엇이었는가?

보카치오는 페스트 이상으로 무서운 허상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던 인간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절망의 시대에 유쾌한 희망을 선사함과 동시에 나약한 시대정신을 풍자했던 것이다. 그는 야만과 어둠의 시대를 해학과 웃음으로 넘어서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데카메론에서 보여주었다.


지금 시대 코로나19가 드러낸 인간본성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 안에 가득찬 편견과 인종주의 또는 민족주의의 모습, 나아가 국가주의의 모습도 페스트처럼 세계 곳곳에서 창궐하고 있다. 우리는 정말 호모 사피엔스라는 인간으로서 제대로 진보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인류가 4차 혁명이 왔다고 큰소리치지만, 보이지 않는 강렬하고 집오한 코로나19에 픽픽 쓰러지는 것을 보면 우리는 너무나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Life goes on ~~는 진리와 희망을 나는 찾는다.
페스트를 피해서 14일간 별장에 숨어든 불타는 청춘의 젊은이들이 나눈 100개의 이야기...는 오늘날 많은 젊은 연인들의 모습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3월 중순 봄 날에 여러 공원과 길거리에서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의 모습에서 행복과 미소를 발견한다. 가까이 사는 이웃들의 오고가는 인사말과 다정한 눈웃음에서 우리의 삶은 여전히 아름답게 빛날 것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봄은 또 오고 있다.
코로나는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희망도 오고 있다.
절망은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우리는 다시 소중하고 소중한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살아있음을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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