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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토라와 탈무드 이야기

자신을 성경화하라. - Biblify yourself - 야베스의 기도

by 코리안랍비 2022.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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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기도속 깊은 기도의 원리 축복의 원리 응답이 원리 - 갓피플 출처 이미지 감사해요

성경대로 살아간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성경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마치 율법대로 살아간다고 여깁니다.

성경은 일단 '솔직한 책'입니다. 

십계명에는 '거짓말하지 말라' 라고 하는데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이 책은 경전에서 멀어집니다. 

그런데 성경을 경전이라고 여기고 읽으면 성경의 근본정신에서 도리어 멀어집니다.

 

 

얼마전 교회설교에 [야베스의 기도]가 나왔습니다.

브루슨 윌킨슨의 [야베스의 기도]가 2000년에 나왔습니다. 

그의 책은 약 2000만부 정도 팔렸다고 합니다. 미국의 호황기에 나온 책이며

한국은 IMF를 겪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갓피플 출처 이미지 - 야베스의 기도 일러스트

 

윌킨슨은 구약성경의 구석지에서 야베스의 기도를 만나고 

이 짧고도 강렬한 구절을 풀고 풀어서 사람들에게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풀어쓴 야베스의 기도에 무척이나 매료되었습니다. 

2000년에 나 자신도 그 책을 읽고 읽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역대상의 족보에 일부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유대역사상 나온 인물들의 족보중에 그의 기도가 반짝하고 등장합니다.

일러스트로 역대상 4장 10절을 봅니다. 

 

야베스의 기도 본문 일러스트

야베스의 기도를 우리는 그냥 주기도문 외우듯이 읽곤합니다. 이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저 좋은 구절이라는 인상만 받습니다. 윌킨슨의 발견은 성경 번역자들의 공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성경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도 나 자신을 '성경화' 하는 것입니다. 

베르너 퀴스텐마허 목사는 [성경대로 살아라]에서 '나 자신을 성경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밝혔습니다. 

성경화한다는 것은 성경대로 살아가기 또는 성경대로 살아내기입니다. 

그렇지만 살아내기에는 반드시 생각하기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다른 저명한 저자의 발견은 우리에게 마치 성경화의 플레폼과 같습니다. 

 

 

고통이라는 이름의 남자의 매우 이기적인? 기도

 

야베스의 원 뜻은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Mr. Pain입니다. 

그가 왜 형제들과 달리 역대기와 등장하게 되었을까요?

그의 탄생이 남다르고, 기도가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는그를 수고로이 낳았습니다. 아마도 막내일지도 모릅니다. 

어머니가 아마도 죽을 뻔?한 순간을 맞이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고통'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삶의 다른 모습이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죽음을 미리 만난 것 같은 느낌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야베스는 그의 기도를 잘 보십시오.

매우 이기적인 기도입니다. 이 말은 그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듯한 인상입니다.

유대인들의 기도의 전형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너무나 이타적이고, 도덕적입니다. 

또한 영적이고 신학적입니다. 하지만 야베스의 기도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이기적인 기도입니다.

 

그런데 역대기상에 실릴 정도의 기도라면 그의 기도에 어떤 뜻이 강하게 있다는 것입니다.

야베스는 스스로 자신을 성경화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성경화가 필요합니다. 그가 밝힌 4가지의 기도를 살펴봅니다. 

 

첫번째 소원 - 갑절의 축복 -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여기서 우리는 그의 이기심?이 보이는가요?

이상하게도 나는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를 보면 누가복음에 나타난 [과부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한 도시에 억울하게 고통받는 과부가 나옵니다. 그녀는 그 도시의 판사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라며 수시로 와서 간청하고, 강청합니다. 그녀의 간청은 하나님도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는 무정한 판사의 마음도 움직입니다. 그에게는 아마도 '귀차니즘'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과부의 거듭되는 간청에 못이기고 들어줍니다. 이 과부의 기도를 보십시오. 기도로 보입니까? 우리는 기도하면 마치 경건하게 눈을 감고, 예의와 바른 마음가짐으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야베스 - 고통 이라는 남자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저 복에 복을 더해 달라고 합니다. 자신의 받은 복에 더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가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복'에 '복'을 더하라는 것입니다. 

 

과부의 간청도 들어주는 판사인데 '고통'이라는 남자의 복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안들어 주실리가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받은 복이 있습니다. 이 복에 복을 더해달라는 '축복'의 기도는 전혀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는 표시입니다. 왜 이 기도를 하면 안되나요. 이렇게 자신을 성경화하십시오. 

 

 

두번째 소원 -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 - 나의 지경(역)을 넓히시고

 

이제는 그의 기도가 마치 욕심을 부리는 것 같은 인상도 듭니다. 이제는 지역(지경)을 넓혀 달라고 합니다. 

이는 아마도 '물질적인 축복'과 관련이 깊습니다. 아니면 '인간관계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통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드리는 기도는 유대민족의 라이프스타일과 관련이 깊다고 봅니다. 

유대민들은 상당수가 유목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야베스의 기도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지역]을 넓혀달라는 것은 아마도 그가 독립적인 삶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걸어온 좁은 지역,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지역, 넓은 길로 나아가려는 욕망을 담고 있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너무나 '영적'으로만 하려다보니 진실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질적인 축복을 구하는 기도는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축복을 구하는 것은 여기서 보면 매우 정당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야베스가 그렇게 기도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유학중에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러가지로 고통스럽고 쉽지 않은 순간이 있을 때 저의 기도는 '나를 축복해 주십시오'로 바뀌었습니다. '부족함 가운데 넉넉함을 달라는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기도들이 수시로 응답이 되었습니다. 채우시고 채우시되 넘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세번째 소원 - 주님의 손길 -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여기서 점강법을 사용하는 유대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마도 복을 구하고, 지경을 넓혀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여기에 한술을 더뜹니다. '주의 손길'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합니다.

그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지치고 힘든 상황이 왔을 수도 있습니다. 살면서 크리스찬들은 고통의 순간이 별로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는 일마다 사업마다 잘되고, 다니는 직장마다 형통하고, 벌리는 일마다 갑절의 축복이 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야베스의 기도속에서는 하나님의 손길을 구합니다. 자신의 힘과 역량으로 되지 않는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깊이 인정하는 데서 기도는 출발합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라는 찬송가가 절로 나온 것입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는 '나 혼자서는 도저히 안됩니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이런 축복, 이런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양속담에 '부모없이 살아도 이웃없이 못산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도 주변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과 이웃의 손의 도움을 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끄럽다고 염치스럽다고  구하지 않으면 계속 빈궁이 강도처럼 오게 됩니다. 가난이 파도처럼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게 되고, 그리고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일이 됩니다. 고통이 도리어 환희가 되고, 가난이 도리어 풍요가 되는 역설이 여기에 있습니다. 

 

네번째 소원 - 고통 아웃 -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기독교는 누군가가 축제의 종교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우울한 인상을 가져다 줍니다. 그 이유는 고통, 환난, 시험, 인생풍파를 겪는 것을 상당히 미적으로 표현합니다. 그게 기독교의 진짜 인상인 것처럼 말을 합니다. 과연 그것이 예수의 뜻이었을까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물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신 예수,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신 예수의 모습만 연상시키려는 노력은 어찌보면 기독교가 고통의 종교로서의 이미지를 경건의 모양으로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나를 시험에 들게 마옵소서' 라면 시험에 들지 않고 도리어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합니다. 이 주기도문을 보면 '나를 고통과 고난중에 단련하시고 더 강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라는 말은 없습니다. 고통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우리는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야베스는 환난도 벗어나고, 근심도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거의 불가능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이 기도를 그는 드립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기도가 가능한 응답으로 나타납니다. 

 

 

응답받는 너무나 짧은 기도

하나님께서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참 신기한 노릇입니다. 기도에는 예언적인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짧은 기도이지만 마음의 소원이 담긴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허락하셨더라] 라는 말 속에 담긴 뜻은 강렬합니다.

이는 그는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야베스는 기도를 드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네 가지 소원을 드리면서 그의 기도가 다 허락된다는 것을 보면

그 기도는 이미 판명된 기도요. 결론부터 시작하는 기도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유학중에 

수중에 먹을 것을 사 먹을 돈도 없었습니다. 체중은 약 25킬로가 빠졌습니다. 

그럴때 머리속에 야베스의 기도가 떠올라 정말 짧고 강렬하게 기도하였습니다. 

또한 한 맺힌 과부의 기도가 떠올랐고 한 줄 짜리 기도를 강렬하게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 금주 안식일 6시 전까지 닭 2마리를 내려 주십시오." 

이 기도를 약 300여 차례나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저녁 5시에 지금은 캐나다에서 

선교사역하는 장 목사 후배가 옵니다. 검은 봉지에는 무엇인가 들고옵니다. 

 

"형제님, 그거 닭이지?" 그러자 "형님, 어찌아셨어요?"

그리고 "그거 두 마리지?" 그러자 "형님, 어찌하셨어요?"

 

나는 그렇게 야베스처럼, 한 맺힌 과부처럼 기도한 것에 대해서 말해주었고,

그 후배친구는 나에게 기도를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짧지만 간절한 호소의 기도를 하나님은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그렇게 이기적?으로 되어갔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은 이상하게도 

역사하셨습니다. 수많은 간증거리와 기도의 응답을 받고 이스라엘의 머문 것은 나의 다큐멘터리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집 사방에 붙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은 그저 한가지로 족하니 

짧고, 강렬하고, 반복적으로,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주님이 축복이 허락하실 
때까지...

 

구글 출처 이미지 - 야베스의 기도를 허락하신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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