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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토라와 탈무드 이야기

십계명 두 돌판을 던진 모세

by 코리안랍비 2022.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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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돌판을 던지는 모세 - 구스타프 도레 성경삽화 중에서

출애굽기 31장 ~ 34장 

 

출애굽기에 보면 참으로 특이한 부분이 나온다. 

평소에는 이 부분에 대해서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영적인 분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세는 온유한 지도자로서의 품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온유함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서 40일동안 금식하면서 야훼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 두 돌판을 받게 된다. 두 돌판을 받기 31장에 보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통해서 회막을 짓게 된다. 

십계명 돌판은 이 회막에 들어갈 중요한 물품이었다. 다른 물품은 사람들이 손길을 통해서 만들어지지만 

십계명 돌판은 하나님이 직접 돌에 당신의 계명을 새겨 주신 것이다. 이 두 돌판은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 있다. 

 

두 돌판은 다른 이름으로 '증거판'이라고 부른다. 즉 언약의 증거라는 것이다. 이를 잘 보면 하나님은 언약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주심으로 시청각 교육을 하기 위함이고, 그 언약을 보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잘 지켜야 하는 순종의 표시로 주신 것이다. 

 

금송아지(신명기 9장 6절~29절 참조)

 

32장에 가보면 모세가 산에서 늦자, 이스라엘 백성중에 과격분자들은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론에게 자신들을 위해서 우상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한다. 아마도 모세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의식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얼마후 아론은 그들에게 금 귀고리를 가져오게 하고,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그 위에 금을 부어서 금 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라고 강변한다.(출애굽기 32장 4절)

 

 

어찌하여 아론의 입에서 저런 괴상망칙한 말이 나올 수 있었을까? 참으로 아이러니한 순간이다. 

그리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다음날 흥청망청 제사를 지내며 우상숭배 놀음, 영적 간음에 빠진 것이다. 

이들의 출애굽후 첫 번째 불순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시편 106편 19-20절 

"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경배하여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의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나니"

 

모세의  부재속에서 이들은 송아지를 야훼신으로 변모시킨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출애굽기 32장 7-8절)

 

'부패하였도다'라는 말은 썩을 대로 썩은 것이며, 이는 멸망직전의 상태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새로운 큰 민족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때 모세는 특유의 온유함을 보인다. 즉 하나님과 논쟁(디베이트)를 하거나 협상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기 위해서 이렇게 된 것이 자신의 책임임을 분명하게 말한다.  이것이 나는 모세의 후츠파라고 생각한다. 이는 하나님께 대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기억함으로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아론이 방자하자 백성들도 방자해진다. - 구글출처 이미지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게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출애굽기 32장 13절)

 

그러자 하나님은 그 뜻을 돌이켜 이스라엘 백성을 멸절하지 않기로 약속하신다. 

생전의 찰톤 헤스톤 배우 -  모세의 두 돌판 구글출처 이미지

두 돌판을 던지는 모세

 

얼마 후 모세는 하산하여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리고 산에서 그 돌판을 그 아래로 던진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어 숭배한 사람들에게 마시게 만든다. 모세의 분노는 합당한 것이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하나님이 직접 쓰시고 제작하신 두 돌판을 던졌을까? 어떤 목회자는 설교중에 화가 나서 성경책을 던졌다고 한다. 나도 강사시절에 학생들에게 '강의교재'를 던진적이 있다. 다른 돌을 던지지 않고 모세는 두 돌판을 과감하게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린다. 이 모습을 보면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졌음을 표시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언약은 깨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그 언약을 저버린 것이다.  다만 두 돌판을 깨뜨린 동작에서 모세의 영적 분노가 심히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두 돌판을 깨는 한이 있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다시 돌이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아론의 리더쉽과 모세의 리더쉽이 확연이 다름을 보게 된다. 

그래서 32장 25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잠언 29장 18절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이 잠언 구절을 아마도 아론이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방자하게 한 사건을 빗댄 구절이라고 보아도 좋다. 

지도자 한 사람의 부패가 전 백성을 부패하게 만드는 것이다. 잘못된 리더쉽의 사용은 처음에 타협부터 시작된다. 

정의롭지 못한 하나의 행동이 다른 수 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방자하게 만든다. 

 

시내산을 떠나라고 명하시다.

백성들이 이제 시내산을 떠나도록 명하신다. 

아직 이들은 가나안 땅에도 입성하지 못했다.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하는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서 아직도 노예근성과 우상숭배의 원심력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아직 시나이 반도인지 미디안 광야인지 모르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노예근성과 우상숭배의 물을 단단히 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이한 말씀을 하신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나라 하셨음이라."(출애굽기 33장 5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애굽인들이 출애굽하면 받은 것을 여전히 몸에 두르고 살았다. 그것은 바로 우상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표시이기도 하고,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시기이므로 애도의 표시로 아무 것도 몸에 걸치지 말도록 하시는 뜻이 있다. 

 

 

다시 두 돌판을 받는 모세

 

34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떠나고, 다시 모세는 시내산에 오른다. 

두 돌판을 그대로 만들고 다시 모세는 40일 주야로 금식을 하게 된다. 다시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돌판에 계명을 새겨주신다. 이는 다시 언약을 세우신다는 의미이다. 이는 이전에 맺은 언약(19장에서 24장)에 대한 갱신의 의미이다. 

모세는 다시 시내 산에서 내려온다. 이때는 분노의 얼굴이 아니라 휘황찬란한 신적인 모습으로 내려오게 된다. 

출애굽기 34장 29~30절을 본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젊은 시절에 큐티-경건의 시간을 오래동안 가져본 적이 있다. 

한참을 경건에 사로잡혀 지낼 때 후배가 한 말이 기억이 난다. 

"선배님, 얼굴에서 광채가 납니다."

나는 그 때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자 "선배님, 얼굴에서 영적인 기운이 넘칩니다." 

그것을 보는 후배의 말에서 한편으로 경계를 삼은 것이 바로 '겸손의 모양'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을 많이 갖게 되면 반드시 얼굴의 피부에서 광채가 나게 되어 있다. 

본인은 정작 알지를 못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영적 분노와 더불어서 영적으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 나오는 것이다. 

 

출애굽기 33장 11절을 본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되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추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의사소통을 하였다. 물론 하나님의 얼굴을 시각적으로 본 것이 아니다. 다만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은 모세의 독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할 정도로 친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한 '대제사장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두 돌판을 깨뜨리고, 다시 새로운 돌판을 받은 모세의 모습에서 

 

언약을 깨뜨리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며

언약을 다시 세우는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이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온유함을 보게 한다. 

 

온유함이라는 것은 그저 유익하고 착한 것만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말이다. 

물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온유의 가치'가 빛을 발하는 것이다. 

영적 분노와 온유함은 믿음의 지도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며 윤리이다. 

우리는 이런 모세의 리더쉽을 존중하고 우리도 그런 리더쉽을 펼쳐야 한다. 모세는 실로 위대한 리더중에 리더였다.

 

국민일보 출처 이미지  - 어디를 가나 우리는 주의 십자가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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