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무엇입니까?
3000여권의 도서를 기증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쓰면서도 가장 많이 무시되는 말이 있다.
바로 꿈(Dream)이다.
대학 1학년 시절에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라는 책을 읽었다.
어두운 자취방에서 읽는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실로 놀라운 책이었다. 사람이 자신이 꾼 꿈을 해석한다는 것은 꿈에 대한 해몽이기도 하다.
그 책에서 인간이 꿈을 꾼다는 것은
거의 [생각하는 힘]의 잠재적 능력이라는 것이다.
[생각하는 힘]을 가진 인간은 실로 놀라운 존재이다.
사람은 심리학적으로 에고와 이드 그리고슈퍼에고로 구성되어 있다.에고는 표면적인 자신을 말하고, 이드는 슈퍼에고로 이어주는 통로가 된다. 슈퍼에고에서 사람들은 꿈을 꾸고는 것이다. 인간은 실로 신묘막측한 존재이다.
꿈을 꾸어야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취욕과 관련된 꿈'이다.
같은 영어단어를 사용하지만, 우리의 꿈은 우리가 진정 되고 싶어 하는 자신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잠을 자면 꿈을 꾸는 것이지만,
그러나 꿈을 꾸면서 자는 것은 다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꿈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일종의 [소원]이라고 불러도 좋고, 미래에 대한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라고 불러도 좋다. 꿈은 가치투자다.
어떤 사람이 며칠전 나에게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은 과거에 꾼 꿈 말고 , 지금 무슨 꿈을 꾸시나요?
이 한마디에 나는 일종의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의 가졌던 꿈이 아닌 새로운 꿈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지금 꿈꾸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매일 매일 주어진 삶에 치여서 지내었습니다.
많은 책을 읽고 공부를 하였지만 남의 인생을 사느라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어떤 철학자가 말하기를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살아주느라 바쁘고 분주하다" 라고 지적하였다.
이 말은 사람들은 자기 꿈은 실종되고 그저 먹고 사는 것에 분주하여서 자신의 삶의 행로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자영업을 하는 소상공인들을 보면 마치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들의 삶도 알고 보면 사회철학적으로 그저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다. 그런데 이런 먹고 살려고 하는 짓도 힘들어진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삶은 자신이 꿈꾸왔던 삶이 아니다. 비단 코로나 19를 탓해서도 안된다. 탓해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의 삶은 가족과 친구, 동료가 함께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평범한 일상도 사라졌다. 아마 2021년에도 이러한 시간이 이어질지도 모른다. 코로나의 새로운 변종들이 등장하면서 더욱 길어진 코로나 19, 코로나 20, 코로나 21을 만날지도 모른다. 청소년들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청년들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초유의 펜데믹 사태를 겪으면서 새해를 맞이한 사람들은 이제 '부자가 되십시오' '꿈을 이루십시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건강하십시오" 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건강에 대한 꿈을 꾸어야 한다.
나에게 다시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건강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건강이 소중하다는 것을 놓치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저 잘 먹고 잘 살자는 생각에서 왕성하게 열심히 달려왔던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 석학 자크 아탈리는 2021년의 화두로 '이타주의'를 말했다. 사회와 공동체가 건강해지려면 '건강한 꿈'을 같이 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그동안 이기적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이기적으로 살았다.
그저 내가 잘되고 성공하는 것 그것을 위해서 살았다.
최근에는 다니던 교회를 잠시 떠나게 되었다.
교회는 사실 내 삶의 중심이라고 보아도 좋다.
교회에 거의 평생을 헌신하고 충성하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코로나 19가 터지면서 내 삶을 돌아보았다.
진정 '내 삶은 어디에 있었던가?'
교회가 좋았고, 교회의 구성원들이 좋았다.
같이 전도와 복음역사를 위해서 수고하고 애쓴 시간들이 많았다.
그런 내가 교회를 등지면서 많은 갈등들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나의 선택을 나는 스스로 존중하게 되었다.
일단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위해서라도 교회는 잠시 떠나 있는 것이 좋은 것이었다. 교회생활에서 나는 사실 '행복'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불행'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교회생활이라는 것은 나에게 박스속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았다. 교회생활하면서 맡겨진 일을 열심히 감당하였지만 결국 내 속에 남은 것은 '갈등과 공허감'이었다.
교회일을 하면서 누구를 위해서 종을 울리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교회일을 하면 물론 천국의 삶이 보장된다는 전제가 있지만, 교회를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사람이 홀가분하게 떠나면서 나의 삶에 일요일이 남게 되었다.
나는 박스를 벗어나서 객관적인 나 자신을 발견하고 싶었다. 교회가 만들어준 꿈을 나는 추구하였지, 내가 진정으로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교회생활이 신앙생활은 아닌 것이다.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은 여러가지있다. 그런데 그 꿈들이 어느새 여러가지로 막혀 있었다. 나는 교회를 잠시 내려 놓으면서 도리어 기도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성경을 보는 시간이 늘어났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고, 이 시대와 사회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이기적으로 살려는 것에서 도리어 이타적으로 살려는 마음도 강해졌다.
오늘은 3000권 정도의 책을 천안의 나사렛 대학에 기증을 하였다. 내가 가졌던 꿈은 다른 이들을 도와준 일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었다.남은 돕는 다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그것은 건강한 꿈이되는 것이다.
'건강한 꿈'은 다른 이들을 이타적으로 돕는 일이다. 공동체를 세워 나가는 것이며,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일이다. 그리하여 책을 기증하면서 잠시 '계산'을 해 보았다. 일단 내가 보낸 책값은 거의 5000만원에 해당하는 것이다.
작년까지 나는 5000여권의 책을 기증하였다.
그리고 오늘 2021년 1월 14일 목요일 다시 3000여권의 책을 기증하였다.
도합 8000여권의 책이다.
돈으로 환산하면 1억이 넘는 돈을 기부한 것과 같다.
그런데 나는 돈보다도 책이라는 것을 기증하였으니 기증의 의미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오늘 말했다. "그것을 돈으로 드리면 정말 뉴스가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뉴스를 바라고 기증을 한 것이 아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거 어쩌랴....이미 나는 다른 이들도 알게 사건이 된 것이다.
그 대신 나의 영광이나 명예를 취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다만 기부하면서 나의 마음이 어느 정도 평안을 찾았고, 그리고 더욱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건강해 졌다는 것이다.
"꿈이 무엇입니까?" 라고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이제는 "남을 돕는 일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리처드 바크는 명저 [갈매기의 꿈]에서
"오늘의 작은 변화가 내일의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꿈을 가질 자유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서 꿈을 꾼다는 것은 무용지물이다.
성공 아닌 삶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기심을 최대한 내려 놓고 이타심을 최대한 올려 놓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나의 개인의 꿈은 그저 꿈을 꾸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건강하고 이타적인 꿈은 나의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인문경영을 공부하면서 성공에 대한 공식을 달리 말하였다.
능력은 20%이지만, 80%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 우리가 일하는 이유?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찾아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 이유가 이기적으로 쓸려고 한다면 '개인의 영광'만 찾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이타적으로 쓸려고 한다면 '공동체의 영광'이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되는 것이다.
건강하고 영광스러운 꿈을 꾸는 자유를 나는 누리고 싶다.
다른 이들을 돕는 일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일이다.
언젠가 [무소유]를 쓰신 법정 스님이 생각난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많이 가지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가난하게 살아도 된다는 '빈이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청렴해지고 청결해지는 마음을 더욱 품으라는 것이다. 무소유는 반드시 소유하고 싶은 마음가짐이다.
유대인들은 가난한 것은 죄라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꿈을 꾸지 않고 10년 이상을 가난하다면 그것은 죄라고 하였다.사람은 꿈을 꾸면서 가난도 탈피해야 하고, 그리고 더욱 성장해야 한다.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꿈을 꾸겠다'고 말해야 한다.
나의 작은 변화가 나중에는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이루고, 작은 씨 하나가 나중에는 큰 숲도 이룬다.
3000여권의 책을 기증하면서 이제는 '주는 정신'으로 살고자 하는 다짐을 하는 귀한 하루가 되었다. 연말이면 수천만의 돈을 놓고 가는 이름 모를 천사들이 있다. 그런 사람을 생각하면 나는 아직 멀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그런 사람의 영광이 있는 것이고, 나는 나대로의 영광이 있는 것이다.
이제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 꿈은 사실상 버리기로 하였다.
다만 다른 이들에게 무엇이 되게 하는 사람이 되기로 하였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글쓰기이며, 강연이며, 지적인 친교와 교제이다. 그리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의 은사와 재주를 잘 활용하는 것이다. 또한 친절과 온유로 사람을 대하고 그리고 주어진 일에 책임감을 다하는 것이다.
'남아수록오거서'라는 두보의 말처럼
나는 정말 5수레의 책을 읽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책이 주는 메세지대로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다.
책 한권을 읽어도 나 자신의 명분이나 지적인 이기심이나 교만을 채우려고 하였던 자신이 확연하게 보였다. 책을 너무나 사랑해서 모으고 모으며, 읽고 읽으며 그동안 쌓아왔던 자아의 두터운 벽을 만났다. 그런데 3년전부터 이를 내려 놓으면서 나 자신이 이제는 내적인 자유를 찾아가고 있다.
'꿈이 있는 자유'를 찾아가고 있다.
마음의 '평안'도 찾아가고 있다.
다른 이들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는다.
다만 나의 부끄러움을 부러움으로 바꾸는 일을 더욱 하고 싶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러운 것도 아니고
높은 지위를 가져서 부러운 것도 아니다.
얼마만큼 나 자신이 바로 서 있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아인슈타인은 '성공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가치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을 했다.
책을 기증하면서도 아인슈타인의 책들은 그대로 남겨 놓았다.
그 이유는 아인슈타인처럼 '꿈이 있는 자유인'으로 남고 싶어서다.
또한 내가 유학했던 학교도 '아인슈타인이 세운 대학'이다.
그 명언을 나는 그 대학에서 발견하였다.
'가치있는 사람' '꿈이 있는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다.
나는 앞으로 자주 물어볼 것이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과거의 꿈도 아니고, 미래의 꿈도 아니고, 지금 현재 꿈꾸고 있는 그 꿈을 말이다.
그리고 지그 지글러처럼 말할 것이다.
"정상에서 만납시다. See you at the top"
이것은 바로 이기성을 최대한 버리고 이타성을 최대한 붙좇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나를 버려야 곧 나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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