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의 가치를 추구하는 유대인들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가시 많은 나무에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생각하라.“
- 정호승의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예전에 정호승 시인의 책 [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를 보다가너무 근사해서 메모를 해 놓았던 구절이 이 구절이다.
정 시인의 시나 글을 읽어보면 ‘역설 Paradox' 가 느껴진다.
그는 ‘역설의 시인’이다.
어떤 시인이 그랬다. “시는 역설하는거야”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했더니,
시인들은 ‘거꾸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들은 기존의 것들을 뒤집는 사람들이다.
시인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정신을 뒤집어주는 ‘혁명가’와 비슷하다.오래된 것도 새롭게 하는 능력을 갖춘 ‘혁신가’이기도 하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그래서 병든 사회이다.
시인들이 살아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카르페 디엠>
이러한 역설의 능력은 바로 ‘사색의 힘’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것이 대부분의 삶에서 편하고 좋지만 이는 다른 말로하면 사색하는 삶이 아니라 사색을 안하거나 도리어 사색하는 사람에게 당하는 개념이 된다.
사색의 힘은 곧 고전이나 지혜의 책에서 나온다.
정호승 시인의 글을 보다가 유대인들을 대비하여 생각해보았다.
유대인하면 성서와 탈무드를 떠올려야 한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들여서 탈무드에서 말하는
유대인들의 역설적인 면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물론 포커스를 좁혀서 ‘책과 독서’에 관한 것으로
그 역설을 나타내려 한다.
그런데 역설에 대해서 잠시 말하고 글을 전개해나간다.
‘역설’이라는 말도 사실 정의하기가 어렵다.
개념이해가 부족한 사람은 사색의 힘도 부족해진다.
패러독스(Paradox)는 모순되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옳은 것. 혹은 옳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순된 것.
보통 ‘역설’이라고 풀이된다. 어원은 그리스어 ‘para’와 ‘doxa’이다.
para는 ‘넘어선’, doxa는 ‘견해’를 의미한다.
doxa(독사)는 ‘억견’ 혹은 ‘여론(opinion),
'억측', '믿음(belief)'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에서 doxa(독사)는
사람들이 어떤 현실에 대해 갖는 불확실한 여론으로서
참됨과 대립되는 말이었다.
패러독스는 어원상으로는 ‘일반적 견해를 넘어섰다’는 의미로,
보통 사람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넘어선 것을 말하며,
매우 다양한 문맥에서 사용된다.
어떤 주장이 역설이 될 수 있고, 어떤 상황이 역설이 될 수도 있다.
우리 말에도 역설적인 표현들이 많다.
급할 수록 천천히" , 지는게 이기는 것. 아는 길도 물어가라, 실패가 성공이다. 어리석은 것이 지혜롭다.
역설은 모순과는 다르다. 모순은 말과 행동의 앞뒤가 맞지 않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역설은 앞뒤의 말 자체는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 숨은 의도 속에 진리를 담아내는 일종의 언어표현 방법이다. 예컨대 ‘작은 거인’은 모순된 말이지만, 이를 통해 몸집은 작아도 훌륭한 사람을 나타낼 수 있다. 이것이 역설의 의미이다. 겉으로 보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그 안에 중요한 진리가 숨겨져 있을 때 바로 역설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그래도 이해를 잘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쉽게 설명을 해야 한다. 나는 교수보다 선생이고 싶다.
만해 한용운의 시 ‘복종’을 보면 알 수 있다.
만해 한용운님 만큼 시를 잘 쓰는 이는 드물다.
“스님이 이렇게 시를 잘 쓰면 어떻게 해” 하면서
놀란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이분 또한 역설적으로 시를 쓴다.
그래서 불교인이지만 우주인을 보는 것 같다.
복종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 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은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예수의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도 마찬가지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누구나 천국에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천국은 얻는 개념이다.
천국을 얻는다는 것은 간다는 것과 엄염히 다르다.
나는 장소로서의 천국을 그리 인정하지 않는다.
천국같이 꾸미고 살아도 반대로 지옥같이 사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와서 그럴까, 하여간 역설적이다.
그런데 천국을 얻으려면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는 선행조건이 붙는다.
이 선행조건을 충족시키려면 확실히 ‘가난함’을 보여야 한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공부를 할 때
나는 이 언어들이 가지는 ‘역설’을 너무나 많이 봐왔다.
그리고 능력을 구하는 유대인들이나, 지혜를 구하는 그리스인들이나
이들에게는 ‘역설적인 사고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들에게 너무나 역설적이다.
말도 안되는 일인데, 이 말도 안되는 일이 세상을 구한다.
천국을 얻으려면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
이는 철저히 역설이다.
거기에 예수께서는 점강법적으로 말씀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이 말씀을 읽다가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유대인 랍비인 예수께서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말씀을 역설하듯이
말씀하신 것이다.
구약의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 라고 한다.
그런데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본다고 하니...
이 큰 역설에 그저 탄식이 나왔다. 이 역설을 읽는 재미가 성경읽는 재미이다.
성경을 보면 너무나 많은 역설이 사람들을 바꾼다는 것을 배운다.
나에게 충격으로 이끈 가장 역설적인 사건은 바로 요한복음 11장이다.
요한복음 11장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대목을 보다가 그만 무릎을 꿇었다.
죽은지 4일이나 되었는데 죽은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 하니 살아서 나왔다. 죽음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대목은 역설중의 역설이었다.
그래서 대학시절에 나는 이 랍비 예수를 ‘나사렛 시인’이라고 불렀다.
이 예수의 말씀을 좋아하여 마론파 기독교인이었던 레바논의 ‘칼릴 지브란’도 역설의 시를 써서 전세계인들의 가슴에 눈물과 감동을 안겨 주었다.
역설의 개념을 설명하다가 너무나 멀리 와버렸다.
그래도 멀리 와버렸지만 가까워질 수 있다면 이는
사색의 힘을 발휘한 것일뿐 다른 의도는 없다.
성서와 탈무드에 보면 역설적인 유대인들의
독서나 말하기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경구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10명중에 1명은 작가라고 할 정도로 말과 글에 능통하다. 문해율이 높아서 생긴 일이다. 여기서 열거하려면 한도 끝도 없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를 보자.
유대인들은 “신은 반대되는 것으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믿는 야훼 신은 역설의 신이다’ 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하늘의 반대되는 것이 땅이다. 먼저 야훼께서는 반대되는 소재로 천지를 지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흑암에서 빛을 내었다고 말씀한다. 죽음에서 생명을 만들었다고 말씀한다. 무에서 유를 만들었다고 말씀한다. 어떤 형태를 가진 물질에서 형태가 없는 정신을 만들었다고 말씀한다. 흙에서 사람을 만드는 것도 역설이다. 그러면서 ‘비정상의 정상성’을 말한다. [빛은 여전히 빛이며, 어둠은 여전히 어둠이며, 죽음은 여전히 죽음이며, 늑대는 여전히 늑대다] 라고 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서나 탈무드 읽기는 바로 이러한 역설이 주는 힘을 사색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성서나 탈무드는 그리 어렵고 힘들게 읽을 부분들은 많지 않다. 이들의 독서는 지식을 얻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사실 사색하는 힘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이들에게 독서는 대부분 성서와 탈무드에서 연유된 책들이 많다.
헤브라이즘의 독서는 사실 진리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강한 것이다. 헬레니즘의 독서는 진리를 향하여 가는 길이 많다고 여기는 것이다. 진리에서 출발하려는 것과 진리에 도달하려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를 만든다. 진리에서 출발하려는 것은 진리의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수학도 진리이다. 과학도 진리이다. 법도 진리이다. 수직적인 진리관이 수평적인 진리관을 만든다고 믿는 민족이 유대인들인데, 이러한 진리도 곧 역설에 근거하여 만들어 졌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들은 고정관념은 깨라고 있는 것이라고 어려서부터 배우며, 집단은 집단대로의 가치를 추구하고, 개인은 개인대로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존중한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을 희생하는 것도 나쁘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집단을 무시하는 것도 나쁘다고 말한다. 즉 역설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인정과 포용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볼테라는 말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하나는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하나를 위하여 one for all, all for one' 이 말도 역설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러한 역설을 통해서 돌아간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누군가가 만들어준 것을 곧이 곧대로 믿거나 아니면 크게 반대하거나 한다. 이것은 어찌보면 흑백논리이다.일단 우리는 의심하거나 역설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의심하지 않으면 질문할 수 없다. 역설하지 않으면 뒤집을 수 없다. 더 나은 것이 나오지 않는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은 그저 정해진 법칙과 룰에 대한 순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법칙이나 룰도 그것이 의심과 역설을 통해서 잘못되었다고 판단할 때 바꿀 수 있는 힘에서 나온다. 그것은 곧 영국의 경험주의의 시조 존 로크가 말한대로 ‘사색의 힘’에서 비롯된다.
유대인 경영학자이며 구루였던 피터 드럭커는 ‘세상은 사색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사색하지 않는 사람들이 지배받는다’ 라고 하였다.
마이모니데스라는 스페인의 걸출한 랍비가 있었다.
그는 의사이면서 랍비였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하면 천재라고 보여진다. 그는 낮에는 의료행위를 하고, 밤에는 성서와 탈무드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하루에 잠을 몇시간 밖에 자지 않으면서 이웃을 돌보고, 병자들을 돌보고, 자신의 회당에 오는 성도들을 돌본 사람이다. 그도 또한 역설적인 유대인들의 스승이었다.
그가 말하기를 “육신이 병들면 의사를 찾아오면서 영혼이 병들면 왜 야훼(신)을 찾아오지 않는가?”육신의 병들면 의사를 찾아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영혼이 병들면 야훼 신을 찾아오지 않는 것은 바로 모순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 랍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그저 잃어버린 건강은 찾으려고 하면서 잃어버린 마음을 찾지 않으려고 하는 모순을 말한 것이다. 마이모니데스는 이 인간의 모순을 보면서 신의 역설로 응수한 것이다. 역설할 줄 알면 몸도 건강해지지만 영혼도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모순을 극복해야 역설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영혼을 가진 만물의 영장이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물질로만 지어진 유물론적 존재가 아니라 영혼을 가진 정신학적 존재라는 것도 알아야한다. 물질에서 정신의 반대되는 개념을 가진 존재이면서, 그러나 다시 물질은 물질대로 정신은 정신대로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역설적 존재가 인간이다.
우리가 역설적 존재라는 본질을 발견한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래서 우리가 물질주의자로 전락하는 것은 반대로 불행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가지 기둥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설의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한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있다.ㅡ 로마서의 비전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역설의 가치, 가난함속에서도 부유하고, 낮은데서 높아지고, 약할 때 강함되는 그런 역설의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탈무드의 랍비들은 말한다.
물질은 물질대로 잘 돌보고 감당해야 하고
정신은 정신대로 잘 돌보고 감당해야 한다.
그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
많은 종교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물질적 가치를 정신적 가치에 두려는 것에서 온다. 정신적 가치가 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물질적 가치가 아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되었다. 유대인들은 물질적 가치는 물질적 가치대로 추구하고, 정신적 가치는 정신적 가치대로 추구한다.
사막에서는 목마를 때 물이 더 중요하지 성서의 경구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는 건져주는 생명구조가 중요하지, 기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부유한 사람이 부유함만을 추구한다면 그는 결단코 천국을 얻을 수 없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해야 하기에...
교회생활을 하다가 어둠은 악하고 빛은 선하다 라는 식의 모순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배워왔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어둠은 어둠대로 가치가 있고, 빛은 빛대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서로 제각기 할 일이 있고, 자리와 위치가 있다고 말한다. 이는 서로 다름을 가르치는 것이며 서로 틀리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앞서 정호승 시인이 말한대로,
장미에 가시가 있다고 말하기보다 가시 많은 식물에 장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가시도 인정하고 꽃도 인정하는 자세가 바로 역설이다. 장미는 좋지만 가시는 나쁘다는 것은 잘못이다. 자연의 법칙에 순종하여 나온 장미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모순의 화초처럼 여기는 것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시도 아니고, 감성도 아니다.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이것이 정상적인 태도이다.
앞서 약할 때 강함이라는 역설, 가난할 때 부요하다는 역설
이 역설이 유대인들이 인류에게 준 선물이다. 성서와 탈무드는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과는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역설의 책을 가까이하는 것은 필경 현실을 넘는 이상의 역설을 경험할 것이다. 참으로 역설적으로 글을 쓰려니까 어렵다.
나는 아직도 멀었다. 바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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