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아인슈타인의 세계관으로 본 세계 1부
나는 아인슈타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일단 한국의 과학자가 아닌 외국의 과학자란 이유도 있고, 그리고 나의 전문분야나 관심분야가 인문학이었고, 과학은 등한시하였던 스타일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세운 이스라엘의 H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그의 진면목을 보고서 나는 그의 위대성(Greatness)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의 저작들과 관련서들을 사서 모으기 시작했고, 심지어 그의 상대성 이론도 직접 강의로 만나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지금도 지구상의 어린이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최고의 과학자이다. 그런데 그는 단순한 과학자가 아니라, 인문학자, 철학자, 시인, 음악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고, 또한 광범위한 독서가라고 해도 좋다. 그는 또한 수많은 편지를 쓴 장본인으로서도 유명하다.
오늘의 글을 필두로 하여 [아인슈타인의 눈으로 본 세계관]에 대한 글을 3편을 준비하고자 한다.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그의 전기, 서적, 논문, 비평, 기사, 어록들을 나누어 생각해보고자 한다.
아직도 그의 이론은 일반인들에게는 완전히 수수께끼이다. 그는 일반인들의 사고를 훌쩍 뛰어넘은 사고의 소유자였다.“머리는 쓰면 쓸수록 발전된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의 책과 저작들을 만나면서 나 자신도 내게 주신 ‘내 머리’를 최대한 사용하기로 하였다.그래서 선택한 것이 풍부한 독서요, 그리고 풍부한 만남이었다. 풍부하다는 것은 곧 나의 삶을 리치(rich)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는 법정 스님이 말한데로 [녹슬어서 죽느나 닳아서 죽겠다]라는 각오와 같다.
아인슈타인의 세계관을 살펴보면 나 자신의 세계관을 점검하게 된다.그리고 나의 세계를 더욱 확장해 나갈 수 있다. 나의 의식과 사고의 세계를 넓혀 가는 것은 가장 의미있는 일중에 하나이면서 그것을 평생 해 나가는 것은 위대한 습관이며, 더 높은 인격과 덕성을 추구해 가는 일이다.결국 가치이며 가치관이다. 아인슈타인은 비록 죽었으나 여저히 나에게 말하고 있다.
그가 한 때 했던 말중에 “인생은 자전거 타기랑 비슷하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계속 패달을 밟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인간의 도- 인간의 길을 말하면서, 너무나 느린 것보다는 조금은 빠른 삶의 패턴을 갖는 것이 그 사람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 좋다는 것도 말해 준 것이다. 우리는 부지런히 유리 자신을 살피고 우리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확실하게 잡아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삶의 속도를 너무 늦추다보면 어느새 주어진 방향성도 흐려지게 된다.
지금 시대 우리는 [속보보다 방향]이라는 말보다는 [방향보다 속도]라는 말이 사실 필요하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주어진 삶에 있어서 ‘꾸준하고, 일정한 속도’를 강조하였다. 속도가 나면 곧 방향도 확실해진다. 그는 자신이 주어진 삶가운데서 속도와 방향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앞으로 나아간 인물이다.
우리는 지금 정치적인 격변, 경제적인 격변, 인류사적인 격변의 시대에 처해있고,그 소용돌이 속에 갇혀 살고 있다.그래서 우리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인생의 나침반을 가져야 한다. 나침반이 있으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우리는 처신하게 되고, 그리고 바로잡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고쳐가면서, 수정해 가면서 살아간다” 라는 말을 경험하게 된다. 나 자신도 수도 없이 나를 성찰하고 고쳐가면서 가고 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은 것은 사실이다. 철이 든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아인슈타인의 [생각]속으로 들어가본다. 나는 그의 편지글속에서 그가 세상을 보는 눈을 살펴 보았다. 물론 그가 쓴 편지글, 기고문, 연설면을 두루 두루 살펴 보면서 새로운 사실도 발견하고, 아인슈타인이 가진 [위대성]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특별하고 대단한 존재라고 여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 자체는 “나는 언제나 소박한 삶에 강렬히 끌린다” 라고 하였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말중에 “인간은 욕망을 따라서 행동할 수 있지만 욕망을 의지로 결정할 수 없다”라는 명구를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쇼펜하우어 같은 자유로운 지성을 추구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가 가장 사랑하는 자유로운 지성이 바로 [유머]였다. [아인슈타인의 유머]는 정말 놀랍고 신기하기만 하다.
그는 “민주주의는 나의 정치적 이상이다” 라고 말하였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개인으로 인격으로 존중받아야 하며, 그리고 어느 누구도 우상화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개신교가 어느 특정한 목회자나 지도자를 우상화하는 놀음에 자주 빠진다] 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존경심과 우상화는 엄연히 다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권위는 좋아하여도 권위적인 것을 경계하였다.
그는 “인간의 삶에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창의적이고 지각 있는 개성, 즉 개성을 가진 인간이다” 라고 말했다. 그는 군중의 사고,집단의 사고보다는 개인의 사고를 중시여겼다.
그러면서 그는 ‘신비의 영역’도 중시여겼다.
“신비는우리의 경험이 허락하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생명의 신비나, 우주의 신비, 자연의 신비를 충분히 누리고 만끽하면서 우리는 예술과 과학이 진정한 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자연주의자이면서 그리고 시인다운 면모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면서도 종교적인 태도에서도 매우 분명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자신의 피조물에게 상을 주거나 벌을 내리는 신을, 혹은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의지를 가진 신을 상상할 수 없다” 라고 말하였다. 그는 불가지론자나 종교적 회의론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과학적 업적이 바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신비의 영역, 영원의 영역,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실재하고 있는 이 세계의 놀라운 구조와 신비에 대한 어렴풋한 이해를 가지고, 자연의 한부분이나 인간의 한부분의 이치라도 이해하려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떻게 해 나갈지에 대해서 분명한 자세와 확고한 노력이 있었다. 그것도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
아인슈타인은 철학자로서 인생의 깊은 관조를 하였다. 그리고 두루두루 세상을 살펴보고 여행하면서 자신의 인생의 깊이를 더해갔다. 그는 말하기를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자아(自我)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는 통찰(通察)을 그는 가졌는가, 그 해방감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자신의 자아로부터 해방시켜 줄 통찰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그의 인생의 가치를 상향조정 한다는 것이다. [상향조정]한다는 것은 가치를 아래에 두지 않고, 가치를 위에 둔다는 것이다. 땅에 대한 가치보다 하늘에 대한 가치를 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땅은 현실의 대명사요, 하늘은 이상의 대명사이다. 우리는 현실지향적인 땅의 가치에 매료되어 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인슈타인은 말하고 있다. 이상지향적인 하늘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이 땅을 밟고 다니기를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아의 해방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가치를 보이는 것보다 더 추구한다는 반증이다.
해방되고 싶다면 우리는 우리의 현실에 얽매이던 자아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해야 한다. 자유의 반대는 억압이나 구속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억압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러한 경우는 사실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민주사회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다만 제도나 시스템이 자신을 묶어 놓는다고 하여도 사실 그러한 것은 겉에 보이는 제어장치이지 그 사람의 자아를 묶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아를 묶고 있는 것을 풀려면 통찰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아의 해방에 집중할 수 있는 의지력이 필요하다.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으로서 어려서부터 [성서와 탈무드]를 공부하였다. 그는 “죽어서도 만일 환생한다면 ‘탈무드’를 배우고 싶다.” 고 하였다. 자신의 자아를 해방해주는 것은 물리학이 아니라 성서나 탈무드에 있었다는 것에서 그는 자아의 탈출구를 찾은 것이다.
나 자신도 나 자신의 사고방식을 [상향조정]하려는 노력을 새롭게 기울이고 싶다. 사실 보여지는 현실이나 현상에 매여 본질과 근본을 잃어버린 면이 많다. 다시 삶을 관조하면서 통찰하면서 주어진 사물과 사건, 현상과 현실속에 담겨 있는 이상과 가치를 찾아가는 노력을 더욱 기울일 것이다.
[선과 악]
위에서 탈무드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는데, 유학시절에 2년간 탈무드를 수강하면서 느낀 것은 “탈무드의 가치를 내용 자체로만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의 가치를 사람의 있는 모습 그대로만 보면 안된다. 한 인간을 향상시키는 것은 그 사람 자체로서도 있지만 그 사람이 어떤 기여를 하고 영향을 미쳤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다.
사람을 평가하는 방법은 그가 선한 영향력을 미쳤는지, 아니면 악한 영향력을 미쳤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선과 악이라는 것은 공존하는 개념이지 절대 따로따로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아니면 피해를 주었는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위대한 지도자나 영향력자는 어떤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예술가일수도 있고, 과학자일수도 있다. 아니면 적극적인 생활방식을 가졌거나, 수동적인 생활방식을 가졌거나, 창조적이나 과괴적이거나, 우리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용만으로 그 사람들을 판다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전체상을 그리고 그 기준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
성서나 탈무드,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체로 가장 큰 오류는 판단력의 부재에서 온다. 정확하고 분명한 판단력, 그 판단력을 갖추지 못하는 부재는 정말로 크다.
법원에 가보면 최종 판결은 판사가 한다. 판사는 반드시 정의의 판단으로 해야 한다. 정의와 판단은 서로 공통어원을 갖고 있다. 최종 판결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법전이나 법적인 바르고 분명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며, 그리고 선한 입장과 악한 입장의 좌우를 살피면서 법의 판단을 잘 내려야 한다.
공정은 쉬운 일이 아니다.
회사에 가보면 어떤 일을 할 때 최종 판결은 대표 CEO가 한다. 그의 판단은 독단적으로 내리면 회사의 방향이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래서 의견을 수렴하고, 최적의 아이디어를 모으고, 그리고 여러 사람의 전문적인 조언과 충고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그리고 스스로 기도하기도 하고, 또한 가족에게 묻기도 한다. 서로 질문을 주고 받으면서 문제를 향한 해결점을 찾으려고 한다. 집단과 조직에서의 판단은 자기 판단에서 머물지 않는다. 하지만 최종 판단은 본인의 몫이기에 회사의 운명과 방향도 그에 의해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전문가와 비전문가]
아인슈타인은 어느 편지에서 “모든 지식영역에서 전문화가 이루어지면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편차나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시대에서는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격차가 점차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전문가의 전문성이 상식화되어가는 시대이다100년전 아인슈타인은 그런 소리를 하였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그러한 소리는 이제 먹히지 않는다. 다만 여전히 전문가는 존재한다. 어느 특정분야를 막론하지 않아도 전문가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비전문가도 여전히 존재한다. 전문가는 자신의 전문성을 업그레이드하고, 계속적 노력으로 향상시키고 발전해 나간다. 하지만 여전히 예술과 과학에서의 전문성은 쉽게 얻어내기 힘든 분야이다.
인공지능시대에 와서도 여전히 예술과 과학에서의 전문성은 더욱 인정받는 시대에 와 있다. 하지만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측면에서 보면 인간 자체에 대한 이해나 통찰도 아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지금 인류는 진보하고 있는가? 아니면 퇴보하고 있는가? 내가 보는 측면은 [퇴보하고 있다]이다. 경제나 정치의 퇴보가 인류사회의 퇴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보에 대한 관심, 성장과 발전을 위한 관심의 부족과 결핍이 결국 퇴보를 만들어 가고 있다. 창조의 정신과 개척의 정신을 잃어버리는 세대는 결국 퇴보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정신은 소중하다.
정신을 고양하고 드높이는 인문학적인 노력이 부재는 곧 인류와 사회에 정신적 풍요성을 빼앗아 갈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인류사회는 낙원에서 실낙원으로 가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전문가들과 과학자들의 역할을 강조하였다.“이 물질만능의 시대에 심오한 종교적 품성을 지닌 사람은 진지한 과학자들뿐이다”
그는 “인간에게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우주적 종교 감정이다” 라고 하였다. 자신의 목표에 충실하게 만드는 것은 곧 우주에 대한 경외감을 갖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우주에 대한 경외감]은 무엇인가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과 배움의 의지이다.그것을 그는 ‘우주적 종교 감정’이라고 불렀다.
아직 내가 비전문가라면 전문가처럼 배우고, 말하고, 행동하라. 아직 내가 비창의적이라면 창의가처럼 배우고, 말하고, 행동하라. 우리는 우리가 기울인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우리는 누군가게 우리 자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노력할 때 우주의 기운이 우리 속에 스며들어가는 것이다.
1921년 12월에 어느 편지에서는
“우리는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의 의지와 재능이 시들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 그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모두에게 큰 손실로 다가올 것이다.”
얼마전 신문기사를 보았다.
물론 서울시장과 부산시장을 뽑는 재보궐선거에 대한 기사였다.이 기사에서 2-30대 청년들의 상당수가 야당(野黨) 후보에게 손과 표를 들어준 것을 보았다. 2-30대 청년들은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들이다. 내 나이 50대가 되어서 이들을 바라보면 한편으로 안쓰럽고, 한편으로 걱정되기도 한다. 정치인에게 기대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일종의 기대심리이다. 이들이 만드는 정책과 국민과 시민에 대한 배려적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살아가면서 자주 발견한다.
아인슈타인은 젊은이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기성세대가 되고, 지배적이고 주류적인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열린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지배적이고 주류적인 사람은 이 나라의 경제와 정치, 문화와 사회를 선도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득권과 능력을 쥐기만 하고,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것을 충분하게 나누어주지 않는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어둡고 암울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저 위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전 세계는 젊은이들의 앞길을 트여주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정부가 그래야 하고, 정당이 그래야 하고, 기업이 그래야 하고, 어른들이 그래야 한다.그렇지 않고 쥐어 틀로 놓아주지 않으면 [병들고 상한 나라]로 전락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지혜가 어느 때보다 소중한 시점이 되어가고 있다. 과거의 공부가 현대의 공부다. 젊어서의 공부는 직업이요 현실적인 과업이었다면 나이 들어서의 공부는 즐거움이요 평생의 좋은 취미이다. 전문적인 수준까지 나의 관심영역을 더 높이려고 한다. 다시 다음편을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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