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한 이웃인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인간의 비극은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무언가에 죽는다는 것이다.참된 느낌의 죽음, 영감을 받은 반응의 죽음,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영광을 느끼게 해주는 의식의 죽음이 그것이다." - 노르만 코진스 Norman Cousins
최고의 지혜는 친절이다 ㅡ 탈무드
오늘은 다시 성서를 펼쳐 보았습니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이 성서를 왜 읽는가?" "이 성서를 읽는 목적은 무엇인가?"
성서가 단순 독서의 수단이라면 이 성서는 그저 [좋은 말들의 잔치]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잘못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시 성서읽기의 궤도를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과연 성서의 정신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에 고민이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나는 한국과 이스라엘에서 성서공부를 오래 해 보았습니다. 성서신학을 몇해 하였습니다. 여러 언어로도 공부를 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성서는 나의 바른 학문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나는 잘못된 사람입니다.
철저히 그것도 철저히 [성서의 정신]을 외면하고 살아서 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고민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다시 성서를 펼쳐 본 것입니다. 거의 다가 아는 내용이어서 식상할 것 같지만, 성서는 여전히 인류에게 거룩한 메세지는 전달합니다. 결국 나를 향한 거룩한 분의 사랑의 편지입니다.
성서는 크게 나누면 구약(39권) 신약(18권)으로 나눕니다. 물론 정경과 외경도 있지만 외경은 열외로 합니다. 그리고 또 나누면 십계명(출애굽기 20장, 신명기 5장)으로 나눕니다. 또 이를 나누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눕니다.
여기서 또 나누면 루터가 발견한 이신칭의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귀결됩니다.(로마서 1:17, 하박국 2:4; 갈라디아서 3:11)
결국 나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하고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먼저일까요? 신학은 믿음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삶은 사랑이 우선입니다. 오늘은 그 삶의 최우선순위인 사랑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찾고 찾은 성서의 인생구절이 누가복음 10장에 있습니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에게 물어봅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사람이 영생(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율법(여기서 율법은 모세오경, 토라)에는 어떻게 쓰여 있느냐? 그것을 너는 어떻게 해석하느냐?"
"<너희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 말이 맞다. 그렇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심니다.
하지만 율법학자는 질문을 계속하여 예수를 물고 늘어집니다. 예수를 교리논쟁으로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그럼 누가 이웃입니까?"
이때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서 대답합니다.
(당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과 달리 부정하고 더러운 이방인이나 혼혈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한 남자가 있었느니라. 그는 강도를 만나 매를 맞고 옷을 빼앗기고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 한 사제(제사장)이 다친 그 사람을 우연히 발견하였으나 그냥 지나쳤다. 레위 사람(성전에서 봉사는 봉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 사마리아인이 부상당한 그 남자를 발견하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남자의 상처를 닦고 붕대로 감아준 다음, 자신의 당나귀에 태우고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서 그가 그곳에서 쉬며 회복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사마리아인은 여관 주인에게 은화를 두개를 주면서 말했다. ' 이 사람을 잘 돌봐주시오. 내가 돌아오는 길에 이 곳에 들려서 모자라는 돈을 드리겠습니다.' "
이렇게 말씀하신후 율법학자에게 되묻는다.
"이 세 사람중에 누가 선한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율법학자가 대답했다.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이지요"
"그럼 가서 너도 그렇게 해라"
우리가 존경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Strength to Love] 라는 설교에서 [인간의 양심]을 보여준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세가지로 말합니다.
먼저, 그의 이타심은 인류애적인 것이었다. 둘째, 사마리아인의 애타주의는 위험을 감수한 용감한 행동이었다. 셋째, 그의 애타주의는 넘치는 사랑의 결과였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인 제사장과 레위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서를 가지고 있었고, 성서해석에만 급급하여 613조라는 많은 율법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정신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이방인이며, 혼혈인이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성서의 정신을 제대로 실천하였습니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7년을 살았습니다. 거기의 지리와 지형을 잘 압니다.
사마리아인은 해발 850미터가 되는 예루살렘에서 낮은 땅 여리고로 내려갔습니다. 그 길은 약 20마일 정도 걸어가야 되는 길입니다. 그 길에는 도둑들이 넘쳤습니다. 그런 노상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유대인을 위해 제사장과 레위인은 기꺼이 돕지 못하고 위험에 처할까봐 겁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금전적 손실을 입을까봐 지갑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 그 부상당한 사람의 상처를 손수 닦아 주고 붕대로 감았습니다. 그는 중증외상환자를 치료하려고 헬기를 타고 간 이국종 의사와 같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관으로 옮깁니다. 은화 두 개를 여관비로 지불해 줍니다. 이국종 의사도 돈이 없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그런 선한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10억 정도의 빚이 있다고 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두 사람의 행동에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진정한 한국의 선한 사마리아인 장기려 박사님도 떠오릅니다.
당시 은화 2 개는 며칠분의 양식과 한달간 여관에 머물 수 있는 숙박비였습니다. 거기서 그는 다시 돌아와 모자라는 돈을 내겠다고 합니다. 이 모든 일을 하면서
사미라인은 법이나 혹은 일반적인 도덕기준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사랑의 힘을 가지고 있었고, 사랑의 힘에 감동되어 그런 힘든 일을 한 것입니다. 지금도 여리고 노상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기리기 위해서 [선한 사마리안인의 여관]이 남아 있습니다.
위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니 [성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니...] 하며 새로운 감동의 파문이 일어납니다. 이 짧은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여 공감대를 불러 일으킵니다.
나는 과연 좋은 이웃인가? 예수를 믿는 다고 하면서 나는 과연 선한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성서를 배운다고 하면서 헛배운 사람은 아닌가?
그러면서 반대로 나는 사람들을 인종, 사회적 지위, 종교적 배경에 상관없이 모든사람들을 창조주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인간으로 보고 있는가? 옳은 일을 하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있는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서 20마일도 기꺼이 더 갈 용의가 있는가? 스스로 자문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래서 잘못된 사람입니다. 신의 기준, 성서의 기준에 철저히 낙제생입니다.
베푼다는 것은 이 땅에서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설명해주고, 심지어 부유하게 해 줍니다. 주는 것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삶에 참여하고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선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오늘은 마치 내가 설교자의 자리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중에도 여리고로 가는 길에 부상당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기쁨과 평화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늘 높이 날아올라 영원한 존재인 하나님과 만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가끔씩 나는 내 속을 들여다 봅니다.
내 속이 깨끗한지, 내 속의 감각들이 선한 곳을 향하고 있는지, 나는 바른 생각과 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불의를 보면 의를 행하려고 하는지, 진정 믿는 자로 살아가려고 는지 등을 살펴 봅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추하고 더럽습니다. 불의하고 부정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분은 나를 사랑하시고 인내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사랑과 용기가 심금을 울립니다.
저도 이제는 선한 사마리안의 지갑을 열렵니다.
더욱 친절해지고, 더욱 용감해지고, 더욱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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