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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토라와 탈무드 이야기

심카 Simcha(히, 기쁨)와 에우데모니아 Eudemonia(헬. 선한 정신)

by 코리안랍비 202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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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카 Simcha(히, 행복이나 기쁨)와
에우데모니아 Eudemonia(헬. 선한 정신)



영국의 공리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그의 저서 [자유론]에서 “자신의 행복보다 다른 대상에 집중하는 사람만이 행복하다” 라고 하였다. 철학자의 말은 항시 양면성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자기 행복을 추구하지 타인의 행복에 그리 관심이 많지 않다. 심지어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으로 삼는 사람들도 많다. ‘혼자만 잘 살면 행복할 것’이라는 나름대로 형성된 머릿속의 행복론도 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없이는 나의 행복도 보장되지 않는다는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행복에 대한 정의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필자도 행복과 관련된 서적을 50여권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행복에 대해서 말하라면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몇 해 전에 행복에 대한 케이스 연구를 살펴보았다. 세계 최고의 경영대학원인 와튼 스쿨에서 [성공과 행복]에 대한 어느 저명한 교수의 특강이 있었다.
그 특강에 어느 노인이 참여를 하였다. 오랫동안 육체 노동으로 거친 손을 가진 노인이었는데, ‘수입이 올라가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내 놓았다. “나는 당신의 말한 ‘행복’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혼란스럽습니다. 수입과 행복이 대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건강, 의미있는 일, 사랑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이것을 지니면 행복한 것입니다.”

그 노인의 [행복론]에 교수나 참가자들도 어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노인의 말에 어느 누구도 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수입이 올라가고, 성취를 많이 한 사람이 과연 행복지수도 같이 올라가는지의 여부는 각자마다 다르다.

사람들을 만나보면 “성공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보면 거의 예외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행복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하라고 하면 ‘행복의 뜻’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이라는 저서를 살펴보면, 행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적어도 3가지를 뜻하게 된다.

● 순간적이고 긍정적인 좋은 감정
● 과거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나 미래를 향한 희망
● 기쁨, 관계, 의미에 대한 깊은 인식

  • 아테네 학당 - 라파엘로의 그림
    구글출처 이미지 -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작

 


대니얼 커너만은 이 세 가지를 ‘자아를 경험하는 행복’이라고 불렀다. 이는 자신이 겪는 경험에서 나오는 유쾌한 측면에 사람들은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고, 그리고 미래를 향해 품은 기대를 재구성하는 것에서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몇 해 전에 일본 문학의 거장 하루키가 ‘소확행’을 말하였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말한다. 그가 추구하는 ‘소확행’은 크고 추상적인 행복이 아닌 손에 잡히는 행복에 가깝다. 물론 이 행복이 행복의 전부나 전반적인 것은 아니다. 일상의 행복과 관련된 소소한 행복을 논한 것이다.

가령, ‘베스킨 라빈스에서 부드러운 소프트 아이스크림콘을 먹었다.’ ,
‘햇살이 화창한 날 여자 친구와 손을 잡고 공원벤치에 앉아서 즐겁게 대화를 하였다’,
‘오늘 아침 조깅을 하였는데, 조깅을 하면서 몸이 가벼워지고 하루를 즐겁게 시작할 수 있었다’ ,
‘언니랑 통화를 하였는데 언니의 건강이 좋아져서 자궁암이 다 낳았다’,
‘고3 딸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여서 부모로서 기쁘다’
'오랫만에 친구가 왔는데 같이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등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대니얼 커너만이 주장하는 것이나, 하루키가 주장하는 ‘소확행’은 행복의 범위와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행복이 단순히 성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여러 삶의 형태나 심지어 종교와 신앙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성공을 단순히 행복으로만 정의한다면 삶의 흥미진진함과 더불어서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요소의 대부분을 놓치고 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실패한 사람은 불행하다는 등식이 성립되어야 하는데, 실패가 곧 성공인 사람도 있다. 수많은 실패를 통해서 도리어 행복 여행을 한 사람들도 주변에 많다.

많은 이들이, “나는 행복해야 한다” “너는 행복해야 한다” 라고 하여서 기대를 높여서 말을 한다. 기대가 크면 그만큼 반대 급부도 커진다. 그런데 생일, 결혼식, 졸업식, 입학식 등이 기뻐야 하는데 반대로 ‘심리적인 부담감’을 작용하거나, ‘불행감’으로 작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한 행사가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의식 Rites'이다. 의식은 문화의 산물이다. 행복이라는 것을 문화의 산물로 본다면 그것도 올바른 정의가 아니다.

어떤 글을 읽다가 당황한 적이 있다.
행복에 대한 극단적인 치우침이 돋보이는 글이다.

“지금 현재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지금 하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람들이 행복해야만 의미가 있다고 보아서도 안된다.
행복하지 않은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음도 알아야 한다.
자신의 불행의 이유를 안다면 행복의 이유도 찾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나면서 죽을 때까지 행복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고전이나 현자들이 말하는 행복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고전에서 말하는 행복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보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재구성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행복도 경험하는 것임을 발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틱낫한 명상, 불교 스승 틱낫한>과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하버드대 댄 길버트>, <행복의 가설 : 고대의 지혜에 긍정 심리학이 답하다, 뉴욕대 조나단 헤이트>라는 세 사람의 [행복학] 저서에서 찾았다.

● 삶의 속도를 늦추기
● 기대에 대한 재구성
● 지혜로운 경험(wisdom experience)

이들의 공통적인 주장은 이렇다.

“행복은 성취감과 관계가 있어서 자신에게 적합한 종류의 임무를 맡아 적절하게 노력을 기울인 결과다”

필자는 여기서 두 가지 용어를 사용하여서 행복의 개념을 좁혀 보려고 한다. 대니얼 커너만이나 하루키가 말한 ‘행복의 개념’에 근접한 두 용어가 있다.
하나는 심카 Simcha 라는 히브리어이고, 다른 하나는 에우데모니아 Eudemonia 라는 그리스어이다.

헤브라이즘에서 말하는 행복, 헬레니즘에서 말하는 행복에 대한 정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에 대한 개념에 접근할 것으로 생각된다.

‘심카’는 결혼식이나 출산처럼 축하하는 행사와 관계가 있는 일상적 행복을 가르킨다. 랍비 아키바 타츠는 심카의 뜻을 확장하여서, [스스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영혼이 느끼는 경험]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정의를 보면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온 정의의 개념과 비슷하다. [정의 Justice라는 것이 자신이 주어진 일을 마땅히 책임감 있게 감당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에 정정당당하고 떳떳해야 한다. 즉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행함에서 정의가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도덕적 행복]이라고 붙여도 좋다.

  • 의-평강-희락- 심카 즐거움 기쁨과 행복의 글
    구글출처 이미지


심카는 시간을 내서 몸이 아픈 친구를 위로할 때 느끼는 감정부터, 작업이나 직업에서 고도의 기술을 발휘할 때 느끼는 성취의 기쁨까지도 아우를 수 있다. 가령 스포츠 선수가 시합에서 이기고 올라와서 금메달을 땄을 때의 성취감도 포함된다. 그럴 때 유대인들은 ‘할렐루야’외친다. 긍정 심리학자는 이러한 심카를 다른 말로 ‘몰입 commitment'라고 부르거나, ‘환희(歡喜)’라고 부르기도 한다.

더 구체적으로 심카(happiness in Hebrew)에 대하여 알아본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 저자로 되어 있는 전도서 2장 26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베라이티 키 에인 토브 메아쉐르 이쉬마흐 하 아담 베마아셰브 후 키 후 헬레코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이쉬마흐)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Ecc 3:22)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주어진 일에서 정당한 댓가를 받을 때 기쁘다고(이쉬마흐) 표현한다. 많은 수의 임금생활자들은 매달 매달 들어오는 임금이라는 것에서 일상의 행복을 느낀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세계 어디서나 공통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 자체에서 행복을 추구하기도 한다는 것이며, 그 일의 댓가에 대하여 노동력을 임금으로 받는 것이다.

또 하나의 성경구절을 살펴보자.
신명기 16장 15절이다.
“베하이타 아크 사메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 할지니라”
여기서 한자의 행복(幸福)의 어원을 다시 생각해보면 행복은 [행운(幸運)과 축복(祝福)]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신명기 16장 15절의 히브리어는 한글 성경과는 약간 다르다. “You should have nothing but joy"이다. 이는 너가 가진 것이 없어도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이는 ‘종교적인 행복’이라고 붙여도 좋다.

그런데 심카가 반대의 의미도 쓰여져 있기도 하다.

성서 미가서 7장 8절을 보자.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이 대목에서 보면 심카가 부정적으로 사용된다. 남을 조롱하고 비웃는데서 생기는 기쁨도 있다.

잠언 14장 13절을 보자.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사람이 겉으로 웃지만 마음에 슬픔이 있다. 항상 즐거운 것 같지만 근심도 여전히 함께 간다. 유대인들은 아마도 기쁨도 슬픔도 같이 간다는 개념으로 ‘심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나쓰메 소세키라는 일본의 셰익스피어라 불리우는 작가의 책 [마음]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사람이 겉으로는 밝게 웃지만 마음의 문을 두드려보면 슬픈 소리를 낸다”

그런데 심카에는 정의적인 면도 존재한다. 잠언 17장 5절을 보자.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자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 성서는 재산이 많다고 하여서 반드시 가난한 자를 조롱해서는 안되며, 남의 재앙과 슬픔을 기뻐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세태를 보면 이것이 현실처럼 작용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삼는 멸망의 짐승’같은 사람들이 어디가나 존재한다.

히브리어에서 심카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복’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탈무드의 내용중에 [모에드 카탄]이 나온다.
“에인 메아빈 심카 베심카” 이는 하나의 즐거움이 다른 즐거움과 섞지 말라 라는 뜻이다. 이는 행복의 집중의 원리이다. 즉 결혼을 하면 결혼 그 자체를 기뻐하고 즐기라는 것이다. 생일이 되면 그 생일 그 자체를 기뻐하고 즐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축하의 날은 holiday라고 부르는 것이다. ‘거룩한 날’이라는 것이다. 이는 다른 날과 구별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날을 충분하게 즐겁게 보내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즐기라는 의미는 바로 그 즐거움에 동참하여 그 즐거움 속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이다.

다른 한구절을 소개한다. 탈무드 아보트 4장 1절에 나오는 대목이다.“에이제후 아쉬르? 하사메아흐 베케엘코” 이는 “부유한 자가 누구뇨? 그는 자기 자신의 몫으로 기뻐할 것이라” 이는 사람이 각자 가진 소유에 대한 만족을 말한다. 사람마다 소유의 양이 다 다르다. 어떤 이는 더 가지고 있고, 어떤 이는 부족하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분복을 잘 누리라고 강조한다. 행복은 그 사람의 소유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감사하며 만족하는데 있음도 보여준다.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되지 그 이상의 과도한 욕심을 추구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주장하였지만, 많은 이들은 과소유를 추구한다. 성서는 과소유보다 ‘적정소유’를 말한다.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으면 교만해지며, 자고해진다. 하지만 너무나 적으면 이로 인해서 근심하며 남의 것을 탐하는 도둑질을 일삼을 수 있음도 잠언에서 경고한다.

히브리어에 나온 기쁨에 대한 마지막 말도 여기에 담아 본다.“에인 심카, 에인 베야인” 이는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도 없다’ 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베하임 - 삶에 축배’를 들으라고 말한다.
일상적인 행복과 더불어 특별한 행복을 같이 누리는 것이 우리의 분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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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온 ‘에우데모니아’(선한 정신)에 대해서 말해보자.

이 글을 위해서 나는 다시 <니코마코스 윤리학>서를 다시 보았다. 니코마코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전에 [행복에 관하여] 강의를 많이 하였음을 보여준다. 에우데모니아는 일반적으로 행복이나 복지로 사용된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인간번성’이나 ‘선한 정신이나 선한 영혼’으로 해석을 한다. 나는 ‘선한 정신’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어원적으로 ‘에우’는 ‘좋은, 선한’ 이라는 의미이다
‘다이몬’은 ‘영혼’을 말한다. 이는 덕이나 우수성을 말하는 ‘아레테’ 그리고 실제적이며 윤리적인 지혜를 말하는 ‘프로네시스’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의 중심 개념이다.

그렇다면 에우데모니아는 행복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가는 내부의 자기발견과 자유의 발견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선한 영혼에서 선한 행동을 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행복은 내적인데 있음을 말하지만, 반대로 인간들의 삶은 외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을 채워나가는 것을 행복으로 보려고 한다. 그런데 행복을 ‘번성’이라는 개념으로 보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이 자신의 성장체험을 통해 사람이 더욱 성숙해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도 좋다. 행복이 남이 아닌 자신의 존재 이유인 목적을 실현시키는 핵심과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에우데모니아는 어떤 상태나 취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활동’이라고 보아야 한다. 보통 우리는 행복( happiness)을 어떤 마음의 좋은 상태(well-being)으로 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상태와 더불어서 좋은 활동성’으로 본 것이다.

어떤 학생이 과거에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선생님,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데모니아가 무슨 뜻입니까?”

그 말을 보면서 그 뜻은 행복이라고 말해주어야 하지만, “지금 너가 무엇인가 알려고 노력하며, 지혜를 얻는 과정도 될 수 있고, 이것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확인하면서, 조금 더 나아가 인간답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실천하는 현재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지”

학생들에게 높은 학점을 받는 것이 행복일 수 있다.
그래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라는 책도 있지만 행복은 성적순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높은 학점과 장학생이 되기 위한 공부나 성적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 좋은 것이라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모니아의 원개념은 사실 ‘좋은 영혼, 선한 정신’으로 해석이 되지만 여기에는 인간에 깃든 영혼과 신성을 잘 발휘하여 최상의 좋음으로 나가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삶이라는 것이다.

경제학의 어원이 되는 ‘이코노믹스 ecomomics'도 알고보면
기본적인 경제활동과 더불어서 영혼이나 신성을 잘 발휘하는 윤리적 가치를 함께 이루는 것을 말한다. 더 쉽게 말하면 [가정경제]를 말한다. 그 어원이 [오이코노미아 Oikonomia]에서 왔다. 사람이 경제적인 활동과 더불어서 윤리적인 가치가 어우러져야 말 그대로 ‘좋은 생활’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는 숨은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지금의 경제학이나 경영학은 윤리와 철학적 덕목을 배제하고 오직 경제적이며 물질적 풍요와 안락을 너무나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목적이 있는 최상의 좋음을 추구하기 위해서 나머지 활동들은 수단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우리가 수시로 건강진단을 하는 것은 몸의 좋은 상태를 유지하과 활동력을 높이는 것이지, 건강이 인생 최고의 목표는 아니다.

이를 위해서 [과연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라는 책을 권하고 싶다.

기원전 3세기 철학자인 에피쿠로스가 말했다.
“우리가 행복을 누린다면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있는 것과 같으며, 행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우리가 행복하다면 부족함이 없다는 상태가 되는 것이고, 행복하지 않다면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행복을 위한 행위가 됨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에피쿠로스가 말한데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일들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다른 일들에는 크게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필요가 채워졌다고 하면 자칫 [행복의 모순]에 빠질 수 있다. 모든 욕망이 채워진다면 결국 인간에게는[권태]라는 있게 된다. 여기서 욕망의 순간적 충족은 자칫 권태와 공허로 인간을 몰아가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이를 경제학에서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무엇인가 자신의 욕망을 채웠으면 곧 욕망이 채워진 기쁨은 있지만 잠시후 그 욕망의 분모가 줄어들게 된다. 그렇다면 현대사회는 ‘욕망과 쾌락은 좋은 것이다’ 라는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특징이,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전혀 아니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질적인 욕망과 그것의 충족을 통한 만족이 행복이라고 여긴다. 우리가 원하는 것 돈, 음식, 권력, 명예, 심지어 소소한 즐거움을 어느 정도 소유하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받아들여진다.

글이 길어지니 결론을 짓도록 한다.
앞에서 말한대로, 우리는 성공의 내적인 측면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자신이 주어진 일을 잘 성취하고 더욱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나 추진력을 살펴보아야 한다.

일상적인 삶이 주는 행복(일상이 깨어지면서 발견할 수 있는 행복도 포함), 최상의 좋은 삶을 살아가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확고히 하는 일이 우선이다. 그리하여 행복(심카와 에우데모니아)을 위한 무형(無形)자산을 키우면서 스스로 삶의 방식을 모색(摸索)해야하는 것이 확실한 것 같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으로 나의 글을 마친다.

두 남자는 시간이 멈추고 사람의 발길이 끓어진 시골길에서
고도(Godet)가 도착하기를 무작정 기다린다.
심난하도록 관념적인 단 한가지 목적이 두 남자에게 존재하는 이유이다. 한 시점에서 주인공들이 자기 삶에서 행복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행복의 대화를 보자.
블 : 자네는 어떤지 말해보게, 설사 사실이 아니더라고 말일세
에 :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하지?
블 : ‘나는 행복하다’ 라고 말하게
에 : 나는 행복하네
블 : 나도 그러네.
에 : 나도 그러네.
블 : 우리는 행복하네.
에 : 우리는 행복하네.(말이 없다)
우리는 행복한데 이제 무엇을 기다리지?
블 : 고도를 기다려야지... !

지금 행복하다면 다행이다.
더욱 행복해지는 활동을 하라.
지금 불행하다면 행복한 활동을 추구하라.
행복은 관념이 아니라 행동이다 !!

 

행복한 책 읽기보다 책 읽는 행복을 더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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