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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과 고전 이야기

명길묻58, 파스칼 [생각하는 갈대, 팡세] 철학적 읽기

by 코리안랍비 2022.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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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갈대 - 파스칼의 [팡세]를 다시 읽으며...


초등학교 시절에 아버지의 서재에는 파스칼의 [팡세]가 있었다. 물론 세로로 되어진 글씨이다. 나는 팡세라는 말이 특이해서, 그 책을 그냥 앞부분을 읽은 기억이 난다. 물론 파스칼이라는 사람의 이름과 [팡세]라는 작품의 제목만을 외웠지만, 그 기억 덕분인지, 고등학교 이후에는 팡세를 접하였고, 대학교에서는 몇번이고 읽은 기억이 난다. 신앙생활에 대한 귀한 도움을 주는 책이기도 하고, 자기 누이에 대한 고마움과 연민도 나타난다. 자신의 삶의 갈등과 번민도 담겨 있어서 아주 인간적인 책이다. 나중에 아버지와 대화하녀서, 이 책을 아버지는 젊은 날 읽으시고, 깊은 감동을 받으셨다는 것도 알고 있다.

팡세는 몽테뉴의 [수상록]보다 얇지만 깊은 사색이 들어 있고, 데카르트의 [방법서설]보다는 어렵지 않아서 누구나 손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팡세의 핵심경구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라고 할 수 있다.
갈대의 이미지는 어떤가? 물론 동양에서는 아주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본다. 아니면 태풍이나 강풍에도 자신의 몸을 맡겨서 바람따라 움직이는 유연성있는 존재로 보기도 한다. 서양에서의 갈대는 동양과 전혀 다르다. 파피루스라는 이집트의 갈대는 종이의 원료로 사용된다. 여기서 어원이 발생하여 paper라는 의미가 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책이라는 의미로도 발전한다.


그렇다면 파스칼이 말한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간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르고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지만, 인간은 생각의 기능을 잘 사용하지 않는 모순된 존재이기도 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있는 사색의 능력, 사고력을 사용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아니 극소수의 사람들민이 생각하는 능력, 사색하는 능력을 사용할 뿐이다. 사색하는 사람은 실제 3%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럴까? 파스칼이 살던 시대에도 그런 사색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며, 지금 시대에도 사색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반증이기도 한다. 단순히 먹고 사는 일에 좇겨서 동분서주는 하는 모습의 사람들만 보인다. 그래서 사색하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사색을 중지한 인간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파스칼의 [팡세]속으로 다시 들어가보자. 그리고 거기서 나와보자.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것, 갈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생각하는 갈대다. 그를 으스러뜨리는 데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그를 죽이는 데 한 줌의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만약 우주가 그를 으스러뜨린다 해도, 그는 여전히 그를 살해한 그것보다 고귀하리라. 왜냐하면 그는 그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우주가 그보다 유리한(우월한) 위치에 있다는(have advantage over) 걸 알지만, 우주는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엄성은 전부 사유 안에 있다. 그것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고양해야 한다.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러니 제대로 사유하도록 노력하자. 여기에 도덕의 원리가 있다."

Man is but a reed, the most feeble thing in nature; but he is a thinking reed. The entire universe need not arm itself to crush him. A vapour, a drop of water suffices to kill him. But, if the universe were to crush him, man would still be more noble than that which killed him, because he knows that he dies and the advantage which the universe has over him; the universe knows nothing of this.
All our dignity consists, therefore, in thought. By it we must elevate ourselves, and not by space and time which we cannot fill. Let us endeavour, then, to think well; this is the principle of morality.

영어로도 이렇게 옮겨 놓고 보니 색다르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세계 최초로 계산기를 만들었다는 파스칼은 이 하나의 말로 유명해졌다.
물론 그의 친구는 데카르트다. 데카르트는 수학자면서 의사였다. 당대에는 두사람이 가장 뛰어난 라이벌이면서, 지성교우였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이라는 말을 [방법서설]에서 남겨 유명해졌다.

두 사람의 말중에 어느 말이 더 끌리는가?
오늘은 파스칼의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로 사색하는 인간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다. 나는 위의 말도 대단하지만, 아래의 말에 놀란다. 미리 결론을 짓고 보자.


생각하는 갈대.- 나는 공간을 통해서가 아니라 생각의 다스림을 통해서 나의 존엄성을 추구해야 한다. 나는 토지를 소유하는 것으로는 어떤 이득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공간을 통해서라면 우주는 나를 하나의 원자처럼 포괄하고 집어삼킨다. 생각함으로써 나는 세계를 포괄한다.

A thinking reed.—It is not from space that I must seek my dignity, but from the government of my thought. I shall not have any advantage by possessing land. By space the universe comprehends and swallows me up like an atom; by thought I comprehend the world.

참으로 멋진 말이다. 현실의 우주 공간 안에서는 한 점에 불과한 인간이지만, 생각의 힘으로는 우주를 모두 포괄할 수 있다는 것, 너무나 황홀하지 않은가. 다시금 판타스틱한 순간을 나는 경험한다.


그리고 나의 글도 계속된다.

어떤 철학자가 말하기를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이 지닌 불가피한 운명이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색하는 인간으로서 인간을 설정할 때 이 말자체가 상당한 패러독스다. 과연 사색하는 인간이 맞긴한가?

도리어 사색을 거부하고 사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인간을 부를 때 여러 호칭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말이 [호모 사피엔스]이다.그리고 [호모 파베르]가 있다. 이 말들은 생각이나 인식보다는 존재를 더 드러내는 말들이다. 그렇지만 사피엔스로 살아가는 것, 파베로로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존재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유물론자들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것이다.

그렇다면 사색하는 인간, 사물과 사건을 인식하며,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인간에 대해서는 어떤가?

어찌보면 생각하는 갈대는 생각을 그만두려고 생각하는 갈대이다.
인간 존재를 이해라려는 실존은 그것을 초탈하려는 실존이다. 사색은 인간에 직결되어 있으면서도 인간을 인간에서 매몰려고 하고 있다.

인간존재는 인간 존재로 오늘도 그 삶을 유지하고 있다. 생각은 생각으로 그 인간과 또한 그 자체 내에서 승극을 이루면서도 숙명처럼 오늘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


존재와 생각(사고)는 늘 인간으로서의 두가지 핵심이다.
이 현존재를 바라보고 사고는 두 갈림길로 간다.

사고를 중단한 생각하는 갈대가 걷는 두 가지의 운명적인 길이다.
하나는 사고(생각) 상실의 상태에서 더 이상 생각지 말자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고방식이다. 대다수의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사고(생각)이 인간이 불가피한 운명이기 때문에 이 사고 중단후에도 사고가 나타난다. 인간은 결국 사고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인 것이다. 생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살면서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그러면서 다른 길도 모색한다.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한다. 역사의 의미를 생각한다. 주어진 삶과 이 순간의 경험을 생각한다. 그러면서 절망하기도 하고 희망하기도 한다.

매일 매일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과 현상들은 인간 존재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드는 순간을 만든다. 나는 이를 [인문학적인 순간] 이라고 부른다.

다시 파스칼이 말한 생각하는 갈대에 대해서 말하련다.

"인간이 사고하기를 거부하는 사고포기를 결단하더라도 인간 존재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고포기를 하여도 다시 사고는 나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러한 사고포기를 포기하기로 결단하면 이로 말미암아 둘도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자기를 되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주의 물방울이나 티끌에 불과한 것 같지만 우리는 실상 우주를 품고 우주를 생각하는 놀라운 갈대인 것이다."

어느 천재시인은, "산다는 것은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렇게 살고, 그렇게 생각핟록 결정지워진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기를 피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인간으로 살면서 그렇게 인간으로서 사색해야 한다.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때로는 고독하고, 우울하고, 불안한 존재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사색의 발판이 되어 종국에 가서는 어떤 놀라운 긍정과 깨달음을 발견하고 극적인 환희를 느낄 수 있다.

파스칼의 [팡세]를 재발견한다.
그리고 [팡세]를 다시 읽어보기를 강추한다.

  • 팡세에 대한 홍정길 목사의 소회 - 구글출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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