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가격 - 마르셀 에니프>>
진리라는 것을 사고 팔 수 있는가? 에 대한 의문을 어느 정도 해결해 줄 수 있는 귀한 책이 나왔다. 출판은 작년도에 이루어졌지만, 1년이 지나서야 지성인들과 독자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는 책이 되었다. 제목부터가 역설적이고 은유적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란 무엇인가보다는 진리라는 것은 공유되어지는 영원한 가치임을 알게 해준다.
이 서평이 자칫 재미가 없을 듯 싶다.
하지만 흥미는 진진하다.
이 책의 시작은 진정한 철인의 시작 - 소크라테스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난 학생들에게 소쿠리장수>로 소개한다.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부패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은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주는 가장 명백한 근거로 자신의 행동이 돈과 무관하다는 점을 들었다. 애초 철학을 어떤 ‘기술’로 만들고, 돈을 받고 가짜 진리를 파는 소피스트들을 비판해왔던 그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한편의 글도 쓰지 않았지만, 그의 제자인 플라톤과 크세노폰과의 대화와 변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자들 책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왜 인류의 스승인지 발견한다.]
서구 정신사의 출발점에 선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드러낸 거대한 문제가 바로 철학과 돈 사이의 양립불가능한 관계였던 셈이다. 물론 돈이라는 것을 세계사의 흐름을 주도하는 물질이다. 그러면서 철학하는 사람은 이 돈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돈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칫 물질주의자나 물질숭배자로 전락하기 쉬운 우리들에게 생각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을 통해서 정신적 각성을 일으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진리는 돈으로 사고팔 성격의 것이 아니다”라며 돈벌이에 급급한 소피스트들을 맹비난했다. 진리를 다루는 철학자는 진리를 돈으로 팔 수 없고 단지 선물할 뿐이라는 이유를 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선물에 선물로 존경을 표시하는 것으로 보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돈으로 지식을 살 수는 있지만, 그러나 지성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지식은 얻는 수단이지만, 지성은 바르게 살아갈 인간의 목적이기도 하다.
책은 소크라테스의 항변으로 시작된다. 저자는 지난 6월 타계한 프랑스 태생의 인류학자 겸 철학자 마르셀 에나프. 그는 저자는 고대 그리스 사회로부터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사회에서 ‘증여’가 어땠는지를 탐색해 계약관계만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관계 이면을 분석했다.
책의 제목이자 다분히 은유적인 ‘진리의 가격’에 대해 저자는 “진리를 주장하거나 발견하거나 고백하는 데 필요한 노력이나 포기가 그에 해당한다”면서 “거짓을 거부하는데 필요한 정직과 용기이며, 한마디로 정신의 가격이자 상징의 가격”이라고 얘기한다.
다시, 소크라테스를 돌아보자. 소피스트가 많은 수업료를 받고 강연 활동을 한 반면 소크라테스는 공공장소에서 보수 없이 지식을 설파했다. 책은 “이윤에 대한 전적인 거부, 이것이야말로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말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였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진리를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선물’에서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즉 계약 관계는 시장의 질서를 따르는 것과 달리 사회의 통합과 상호 인정은 선물 관계를 기초로 시작되며 선물 관계에서 비로소 인간 그 자체를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가 던진 화두로부터 출발해 철학과 인류학, 사회학 등 서구 지성사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증여의 계보학’을 써내려간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해진 ‘거래’ 행위에 바탕을 둔 ‘계약 관계’와는 다른, 전통 사회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증여’ 행위에 바탕을 둔 ‘선물 관계’는 수많은 철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등을 매혹했던 연구 주제였다. 특히 마르셀 모스는 ‘의례적’ 성격의 선물 교환이 전통 사회에 보편적인 것이며, 증여는 필연적으로 답례, 곧 ‘대갚음’(reciprocity)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지적해 증여 연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바 있다.
“의례적 선물 교환의 목적은 일정량의 부를 전달하거나 재물을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명예롭게 하는 데 있다.···주는 물건의 주된 가치는 상징적이고, 주는 쪽에서 볼 때 선물은 자신의 징표이자 자아 자체이다.”
이처럼 모든 인간관계가 돈으로 가치 매겨질 수 없다는 관점은 이방인을 대할 때 이익을 따지기보다는 환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 대부분이 계약 형태지만 여전히 명예와 기부, 호의와 봉사, 연대 같은 비자본주의적 가치가 사라지기는커녕 더 존중받고 있다는 점을 되새기게 한다
루소나 볼테르의 [사회계약론]이 위대한 저작이기는 하지만, 이들이 미쳐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해준다. 루소나 볼테르의 저작을 같이 보면 이 책은 더 쉽게 읽힐 수 있다.
이 책은 무척 두껍고 지루할 수 있다. 하지만 구도자적인 자세를 가지고 읽어나간다면 커다란 지적 도움이나 혜안을 얻을 수 있는 책임에 분명하다.
이 책과 관련된 다른 글이 있어서 여기에 소개한다.
진리를 찾기 위해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고 있는 구도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어떤 도시의 낯선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한 상점에 이상한 간판이 붙어 있었다. ‘진리를 파는 가게’ 이것이 그 상점의 간판이었다.
‘여러 가지 진리를 모두 팝니다’라고 유리창에 붙어 있는 종이를 보고 그는 기뻐하며 단숨에 뛰어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이곳에서 진리를 판다는 게 사실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떤 진리를 원하시는지요? 부분 진리입니까, 전체 진리입니까?” 주인이 예의 바르게 물었다.
“물론 전체 진리입니다. 그러나 속임수를 쓸 생각 따위는 하지 마십시오. 저는 지금까지 진리를 찾고자 세계 곳곳을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저를 속이려 한다면 나는 그것이 거짓임을 금방 알아챌 것입니다. 나에게 분명한 진리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구도자는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주인은 좀 가엾다는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꼭, 원하신다면 팔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값이 정말 비싼데 그래도 사시렵니까?” “대체 값이 얼만데 그러시오?”
구도자는 진리를 얻을 수만 있다면 웬만큼 비싼 값이라도 주저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물었다. 주인은 말없이 전체 진리의 정찰 가격이 쓰여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전체 진리를 가져갈 사람은 자기 여생의 모든 편안함을 포기해야 합니다.’
구도자는 잠시 생각한 뒤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냥 그 가게를 나왔다. 그는 오랫동안 여행을 했지만 여생의 모든 편안함을 포기하지 않고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칸트는 진리라는 것을 정의할 때 "이것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고귀하고 영원한 가치"라고 자신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제시하였다.
칸트의 진리정의로 보면 진리는 사고 파는 성질의 것이 절대 아니다. 진리는 값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선물이며, 은혜이다. 이를 경제학적으로 풀어 나가면 [증여]라고 할 수 있다. 이 [증여의 계보학]을 저자는 보여주면서, 우리 현대의 인간이 [호모 이코노미쿠스] 임을 밝힌다. 즉 [경제적 인간]이다. 진리마져 돈으로 사보려는 욕망을 가진 인간이지만, 이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동체적인 노력과 희생정신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동안의 수많은 인간관계가 사고 파는 거래적 관계로만 치부되는 현대사회이지만, 바람직한 공동체의 수립은 바로 주고 받는 공유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다.
참으로 오랫만에 탁월한 저작의 탁월한 저작을 만났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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