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라인하르트의 [방황의 기술]
<<불확실한 삶이 두려운 이들을 위한 철학 연습>>
“길을 잃고 나서야,
세상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하며,
우리의 위치와 우리 관계의 무한한 범위를 깨닫기 시작한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 중에서
사람들은 책의 고마움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독서를 하는 사람들은 자꾸만 착각에 빠지는 것이 있다.
그저 책을 얼마나 읽어대는 것으로 자기만족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책을 읽는 다는 것 자체가 감사이다.
우리는 우리의 전 감각을 이용하여 책을 읽는다.
일단 책을 보려면 두 손으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눈으로 찬찬히 읽어나가야 한다.
또한 조용히 그러나 침착하게 읽으면서도
내적으로는 책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글은 머리에서 쌓이기도 하고
어떤 글은 가슴을 자극하기도 한다.
어떤 글은 너무나 좋아서 몇 번이고 입술로 되뇌이고
머리로 기억한다.
우리는 책을 읽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행동을 보여준다.
하지만 책을 읽는 것은 그 이상의 것들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오늘은 [방황의 기술]이라는 책을 가져왔다.
서재에서 방금 꺼내온 [방황의 기술]은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출판은 오래전에 이루어졌어도 나에게는 새로운 책이다.
이 책은 [방황이라는 주제로 그린 여행철학서]이다.
이 책은 역설적이다. ‘무엇인가 잃어버려야 얻는 것’을 가르쳐준다.
‘무엇인가 비워야 채워지는 것’을 교훈해준다.
오늘의 책을 읽으면서 여전히 크게 자리잡는 말이 기억난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말한대로 “책도 곧 여행이다. 여행도 곧 책이다.”
여행이라는 것은 낡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여행의 본질이다. 날마다 우리는 새로운 날을 맞이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새로워지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리만큼 무감각하다.
‘무감각’ 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불감증’ 정도라고 부르는게 좋겠다.
[새로워지는 것에 대한 불감증]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매일 매일이 그날이 그날” 이라는 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명한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여행과도 같은 삶”이다.
여행이라는 것은 비행기표를 끊어서 꼭 해외로 가는 것만은 아니다.
책속에서도 여행이 가능하고, 책밖에서도 가능하다.
그리고 글속에서도 가능하고, 글밖에서도 가능하다.
사람들과의 대화와 만남속에서도 가능하고, 혼자 고독한 가운데 있어도 가능하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여행의 시작이다.
어떤 랍비는 “우리는 이 땅에 영적인 여행을 하러 온 존재이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여행을 포기하고 그저 익숙하고 당연한 것 같은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시도하거나 해보지 않은 것은 이상하게 못한다]는 생각에 젖어 있다. 이런 관념으로 세월을 죽이면서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이 세상은 안해본 것을 해보도록 옆구리를 자꾸 찌른다.
나는 가만히 있고 싶어도 세상은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늘 새로운 소식과 사건 사고들이 우리를 흔든다.
여기 저기 들려오는 소식들은 우리의 불안감이나 공포감을 자극한다.
가지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놔두지 않듯이
세상은 우리를 계속 흔들고 움직이게 하고 방황하게 한다.
캠브리지대학의 경제학 교수인 ‘장하준’ 교수도
“우리 시대는 확실한 불확실성의 시대다”라고 단정지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도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라고 보는 것이다.
그저 오늘을 잘 살아내는 것이 어찌보면 미래를 위해서 잘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늘 [방랑과 방황]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결국 이 땅에서 ‘방황’하는 존재이다.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읽었던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는 이 땅에서 평생동안 영혼의 방황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가 밝히듯이
이 방황에도 두 종류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자율적 방황’과 다른 하나는 ‘타율적 방황’이다.
즉 ‘자발적으로 방황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타율적으로 방황을 맞이할 것인가’ 이다.
이 책 15페이지 첫머리에 나오는 멋진 경구가 나를 사로잡는다.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방황하는 기술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불확실성(uncertainty)한 시대이다. 그리고 불안(uneasiness)한 시대이다. 아니면 불평 불만(complaints)이 가득한 세상이다. 이를 [ 삼불시대]라고 나는 부른다.
세상의 경제나 경기가 제멋대로 돌아가는 불확실성이 있다.
너무나 빨리 빙빙빙 돌아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이 많다.
우리는 언제 직장에서 밀릴지 모르는 불안이 있다.
혹시 암이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나라는 불안이 있다.
그래서 열심히 [생명보험]이라는 일종의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는다.
하지만 사실 생명보험은 없다. [사망보험]만 있다.
세상 만사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주어진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
이 궤도가 상당한 안정을 줄 것 같은 기대감을 불안감과 함께 같이 갖는다. 우리는 모두 조직 심리학자 메슬로우가 말한데로 나이가 들수록 강력한 [안정의 욕구 stability needs]를 갖는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안정추구자가 되어서,
적당한 수입, 적당한 아파트, 적당한 차, 적당한 직장을 다니는
다수의 [적당주의]에 빠져 있다. 그래서 방랑자가 되고 싶지 않다.
“집 나가면 고생이야” 라는 말을 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이면서
우리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험조차도 피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사실 세상은 우리에게 안정적인 삶을 자꾸만 파괴하려 한다.
지난 2달 간 우리는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위협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사람들에게 불확실성이 커지고, 불안증세가 커지고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도리어 이기적인 생각에 더욱 사로잡힌다.
불확실성, 불안, 불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방랑과 방황의 기술의 기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25페이지를 보면,
저자는 ‘니체’의 유명한 경구를 인용한다.
“내 말을 믿어라!
존재의 가장 큰 수확과 가장 큰 즐거움을 거둘 수 있는 비결이다.
위험하게 살아라 !! 베수비오스 화산의 산기슭에 그대들의 도시를 건설하라”
미래가 불확실한데, 저자는 도리어 일상의 틀을 부수고 과감히
방황을 시작하라고 한다. 일상에 젖어버린 나와 사람들에게 너무나 지나친 ‘도전’을 한다. 그 도전들의 상당수는 [인문고전]에서 밝힌다.
그래서 인문고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곧 일상의 틀을 부수는 혁명적인 일이 된다.
아르튀르 랭보
는 자신의 시집에서
[나는 타인이다]라는 싯구를 남긴다.
불안의 시대에 사람들은 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살기란
예전보다 더욱 어렵고 복잡하다. ‘빨리 빨리’ 스피드를 요구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너무나 집중한 나머지 다른 것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신경쓰기란 어려운 일이다.
결국 사람들은 자꾸만 자기에 몰입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신’이라는 것은 지극히 불안한 자신이다.
심리학자들은 불안하다는 것이 곧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어떤 철학자는 “이 세상을 움직이고 발전시키는 것은 인간의 강박관념이었다” 라고 한다.
세상에는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라는 것이 남이 해결해주는 경우는 상당히 적다. 세상의 많은 문제는 결국 자신이 해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돕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남이 도움이나 남의 간섭을 덜 받고 스스로 우리는 우리 문제를 해결하려는 강력한 나르시스트(자아주의자) 같은 속성이 있다.
원래 나르시시즘은 [나르코스, 그리스어]에서 연유한다. 이 뜻은 ‘마취’ 라는 뜻이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여기는가? 거울속에 비취어진 나를 진짜 나로 여기고 살지는 않는가? 우리의 눈은 밖을 바라보게 만들어져있다. 하지만 거울속의 나도 나인 것이다. 원래의 나가 없으면 거울속의 나도 없는 것이다. 저자 말대로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은 어찌보면 [나를 보는 것]일수도 있다.(62페이지)
지름길 이탈하기 - 시대정신
페이지 119쪽에 보면 저자는 세네카의 말을 인용한다.
“바꾸어야 할 것은
지역과 기후가 아니라 인생관이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바로 ‘[변화하지 않으면 변화당한다] 라고 해야 할 듯하다. 그런데 어떤 변화에도 중요한 것은 [방향감각]이다. 그 방향감각이라는 것은 변화를 위한 노력인데, 저자는 호머의 [오딧세우스]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잭 바우어라는 철학자의 말을 인용한다.
오딧세우스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신들의 시대, 신화의 시대에 인간으로서 방랑하고 방황한 모험가였다. 허상으로 가득한 신들의 영역에 인간으로서 도전한 사람이다. 나는 이 사람을 ‘최최의 인문학적인 존재’ 라고 부르고 싶다. 오딧세우스가 주는 메시지는 이 세상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잭 바우어라는 철학자는 플라톤의 [국가론]에 등장하는
4대 덕목인, ‘지혜, 절제, 용기 그리고 정의’를 언급한다.
이것이 바로 방황의 기술에 필요한 덕목이라는 것이다.
오딧세우스와 플라톤은 우리에게 조심성과 권태감을
호기심과 용기로 대체하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경험을 하려면 낯선 것들을 만난다.
새로운 것은 모두 낯설다.
낯선 곳은 혼란을 불러오고,
매력은 풍기지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는 나에게도 낯선 곳이 너무나 많다.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는 낯설다.
브라질의 ‘아마존’은 낯설다.
유학했던 이스라엘은 아주 낯선 곳이었다.
처음부터 너무나 두렵고 떨렸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알고 보면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서 오가는 존재이다.
낯선 곳이라는 것은 비정상의 장소이다. 낯선 곳은 미지의 곳이고, 정상이 아니거나, 이해하기 힘들고, 합리적인 곳이 아니다. 낯선 곳은 곧 지금의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자주 올랐던 고 은 시인이 시가 생각난다.
(물론, 고 은 시인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도 많으나 그의 시만큼은 탁월하다)
떠나라 낯선 곳으로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그대 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
단 한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그대 떠나라
아기가 만들어낸 말의 새로움으로
할머니를 알루빠라고 하는 새로움으로
그리하여
할머니조차 새로움이 되는 곳
그 낯선 곳으로
떠나라
그대 온갖 추억과 사전을 버리고
빈주먹조차 버리고
떠나라 떠나는 것이야말로
그대의 재생을 뛰어넘어
최초의 탄생이다. 떠나라.
우리가 여러 많은 경전들을 읽는데,
낯선 곳으로 가는 여행을 위한 가장 좋은 책들은 경전에 있다.
성서와 탈무드를 읽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니면 불경이나 다른 경전들도 좋다.
성서와 탈무드는 우리를 이 땅에서는 나그네요, 외국인으로 묘사한다.
심지어 유목민(노마드) 라도도 부른다.
창세기 토라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보면 ‘너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 명령을 따라서 그는 가나안 땅으로 갔고, 그곳이 바로 지금의 이스라엘이다.
여기까지가 1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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