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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과 고전 이야기

명길묻49, 페르시아의 루미 “논리 대신 음악과 시로 신에게 다가가라”

by 코리안랍비 2022.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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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배우며
페르시아의 위대한 시인 - 루미


“논리 대신 음악과 시로 신에게 다가가라” - 루미

젊어서는 '펜의 힘이 칼의 힘보다 강하다.' 라는 것을 믿지는 않았다.그때에는 힘과 에너지가 넘치고, 열정과 의욕이 넘치는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책과 글의 힘을 무시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보면 문의 힘이 무의 힘보다 강하다는 것을 본다.
무의 힘은 전쟁의 시기에는 도움이 되나, 그러나 전쟁은 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머리와 지략을 이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 또한 문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문의 힘이 내 속에서 강해지고, 그리고 인문학의 힘이 더 강해지고, 거기서도 고전의 힘이 더 강해져간다. 그리고 시의 힘이 강해져간다.

나는 오늘 시인과 시의 힘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잠시 가져보았다.
"시인은 시대의 눈이다" 라고 어느 철학자가 말했다.
젊어서부터 시를 읽고, 시집을 읽으면서 나름 위안을 구했던 나로서는 어느새 300권이 넘는 시집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하지만 아직 시인은 안되었다. 그러나 인생에서 한번은 시처럼 살아야 한다.

물론 시는 짧아서 좋다. 하지만 짧은 시라고 해서 전혀 경박하지 않다. 시다운 시를 만나면 럭셔리 명품을 만나는 것을 느낀다.

이집트 룩소르에 가보면 쿠푸왕의 피라밋과 멋지고 웅장한 건축물을 볼 수 있다.여기서 '럭셔리' 라는 말이 유래했다고 한다. 룩소르에서 럭셔리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을 나는 룩소르에 가서 알게 되었다.

어떤 시는 무척 시시하고 단조롭다. 하지만 어떤 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묘한 힘과 매력이 있다. 그런 시는 럭셔리하다. 그렇다면 시가 왜 럭셔리할까?

그것은 시인들은 남이 생각하지 않는 생각하는 철학자와 같을 때가 있다.
시인들은 가장 최고의 사랑과 애정의 표현을 하고자 애쓰는 연인과 같을 때가 있다. 그래서 플라톤도 '사랑하면 시인이 된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인들은 함부로 말을 하고, 함부로 말도 안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물론 엉터리 시인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은 철저히 열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서양의 시인들은 그 자체로 '럭셔리'하다.
물론 삶을 비참하고 가난하며 헐벗을 때가 많은 시인들이다.
하지만 시인은 여전히 '시대의 눈'이고, '미래의 창'이다.

한 때 나 자신은 목사 pastor or minister가 되고 싶었다.
목사라는 영단어는 '장관'이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지도자라고 불리우는데, 영적인 지도자라고 불리운다.
그래서 나의 말이 영적이고, 거룩하고, 정의로운 말을 써야 한다.
그것은 어찌보면 시인의 말과 같다.

그런데 너무나 여기 저기 '영적, 영적, 영적' 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고 한다.
자신이 만든 말이 그럴싸하게 퐇장되고 그럴싸하게 메세지를 전달한다고 믿는다.
설교를 함에 있어서 멋져보이고 화려한 미사여구를 많이 사용한다.
깊은 생각과 사색은 찾아보기 힘든 설교가 난무한다.
또한 목사가 너무나 개인경건에 힘쓰지 않다보니 자칫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킨다.
나는

그래서 필자는 '목사는 시인과 같아야 한다' 라는 주장을 한다.
목사들이 시인들을 가까이하면 그들의 언어의 온도가 달라진다.
그 언어의 온도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시인과 같아야 한다'라는 것은 '시를 가까이 하는 삶'이다.
시를 가까이한다는 것은 정제되고, 절제되고, 함축된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려고 한다면 말의 실수가 거의 없다.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잘못된 메세지를 전달하지 않게 된다.


앞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철학자요 시인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설교하는 사람들은 철학자와 시인들의 철학과 시를 가까이 접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나의 주장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무의 힘보다 문의 힘을 더욱 기르려면 그것은 필경 '사고력, 생각하는 힘'에서 비롯된다.

얼마전에는 페르시아의 전설적인 시인인 루미의 시들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그 전부터 루미라는 시인의 시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지만
자세히 살펴보고, 오래 살펴보는 시간을 갖지는 못했다.
그것은 어찌보면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싶지 않은 '욕망'과 관련이 된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파스칼은 팡세에서 말을 했지만,
과연 우리는 생각은 하고 사는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루미' 시인을 잠시 소개하려고 한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그가 누구인지, 그가 어떤 시들을 남겼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루미 처럼 되지는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루미'라는 시인을 통해서 영감을 얻고, 교훈을 얻고, 내적인 힘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루미의 시에서 '럭셔리함'을 발견한다.

루미 라는 시인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심어준 페르시아인이다.그리고 8000만 페르시아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가장 존경을 받는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그의 시를 읽는 것을 커다란 자부심과 영예로 여겼다.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문명충돌이 크게 일어나도 루미라는 시인은 도리어 서양 기독교 문명에 독보적이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예전에 괴테의 책을 보다가 놀란 것은 그가 루미라는 시인에 대한 극찬을 보았다.
'독일의 문호'인 괴테가 자신보다 한수위로 루미를 올려 놓은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은 누굴까?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은 누굴까?
이렇게 정하라고 하면 아직은 어렵다.



루미는 수피즘이라고 하는 이슬람 신비주의자였고, 그의 시는 우주적이었다.
그런데 그는 무척 소박한 페르시아인이었다. 그는 경계를 허물고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 기독교인이든 유대인들인든 가리지 않고 사귐과 교제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장은 문화와 종교를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했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루미라는 이름의 뜻이 궁금하였다.
그 뜻은 '로마인'이라는 뜻이었다. 이런 이름을 그가 왜 가졌을까?
이슬람 신비주의자요, 저명한 시인의 이름이 그저 '로마인'이라니...
이 말은 '로맨스'와도 관련이 있다. 바로 그의 삶은 '로맨틱하고 낭만적'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은 2만6000구로 된 6권이 대서사시 <마스나위>다.
그의 묘소는 오늘날에도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의 묘비명은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무덤을 지상에서가 아니라 사람의 가슴속에서 찾아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루미의 우화 모음집> <루미평전: 나는 바람 그대는 불> <나는 다른 대륙에서 온 작은 새: 잘랄 앗 딘 루미 우화잠언집> 등 루미 관련 서적이 몇 권 출간됐다. 아직은 큰 주목은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게 아쉽다. 그것은 이슬람에 대한 포비아가 심해서 그런 것이지만, 선입견과 편견이 많은 한국인의 단면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분위기'에 약하다.

그런데 시인들은 '루미의 시'에서 영감을 얻는다.
루미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김환영 교수'의 글을 잠시 보았는데
그의 어록을 잠시 소개한다. 정말 감탄사가 연발하게 만든다.
나는 그래서 이 사람을 시인들의 시인으로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깊은 인생의 철학, 자연의 철학, 신의 철학이 담겨 있다.

● 하늘이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하늘은 그토록 청명하지 않을 것이다.
태양이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 어떤 빛도 내지 않을 것이다.
강물이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강물은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을 것이다. 산과 땅이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자라지 않을 것이다.

● 여러분이 할 일은 사랑을 찾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사랑에 반대해 쌓은 장벽을 여러분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이 여러분의 행동까지 아름답게 만들도록 내버려둬라.

● 나는 인내의 칼로 분노의 목을 베었다.(참 멋진 경구이다)

● 아름다움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지만, 우리는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 때야 온 세상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 상실감으로 슬퍼하지 말라.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언젠가는 다른 모습으로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다.

● 우리를 낳게 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우리의 어머니다.

● 거짓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지만, 진리는 우리에게 즐거운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

● 당신이 우울한 이유는 당신이 건방지기 때문이요, 당신이 남을 칭찬하길 꺼리기 때문이다.(이 어록도 눈여겨보라)

● 당신이 모든 재물의 가치를 하나하나 알면서도 정작 당신 영혼의 가치를 모른다면, 당신은 바보다.

● 사랑은 쓴 것을 달콤하게, 구리를 황금으로, 쓰레기를 와인으로, 모든 고통을 명약으로 만들어준다.

그의 절제되고, 그러나 강력한 언어의 마술을 보라.

옛시인 루미가 남긴 시를 하나 남기며 이 글을 갈하려 한다.

시의 제목은[여인숙]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아침마나 새로운 손님이 찾아온다.
한 번은 기쁨으로, 한 번은 좌절로, 한번은 야박함으로 찾아온다.
거기에, 약간의 찰나적 깨달음이
뜻밖의 손님처럼 찾아오나니.
그들 모두를 맞아서 즐거이 모시라.

그것이 그대의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리는 한 무더기의 슬픔일지라도,
한 분 한 분을 정성껏 모시라.

그 손님은 뭔가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서
그대의 내면을 비워주려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
암울한 생각, 부끄러움, 울분...
이 모두를 웃음으로 맞아, 안으로 모셔들이라
그 누가 찾아오시든 감사하라.

모두가 그대를 인도하러,
저 너머에서 오신 분들이리니...


루미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의 여인숙이라고 한다.
그 여인숙에는 날마다 손님들이 찾아든다.
우리 인생에 닥치는 행복이 아니라 불행도 그 많은 손님들중에 하나이다.
우리는 불행이라는 손님을 어떻게 영접하는가?

여인숙의 주인은 어느 손님이든 막지 않는다.
물론 가는 손님도 잡지 않는다.
그저 정중히 모시고 보내야 한다.
나의 마음은 여인숙 주인이 된다.
내게 오는 손님을 정중히 맞이하고
정중히 떠나 보내는 것이 여인숙 주인의 일이다.

그러면 초연히 손님을 맞이하고
보낸다면 우리는 자유함(freedom)이라는
영혼의 깃털같은 가벼움을 누릴 지도 모른다.
그러면 걸림없이 영혼의 평온과 안락을 얻을지 모른다.
나는 이를 [유유자적]의 삶이라고 부르고 싶다.

루미의 어록과 시를 잠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앞서 문의 힘이 무의 힘보다 더 강하다고 하였는데,
결 무의 힘은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지만,
문의 힘은 사람을 자유케 하는 힘인 것이다.
루미는 이 문의 힘으로, 펜의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 것이다.

젊어서 육신이 가지는 힘과 열정으로 세상을 이겨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신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자신을 다스리고 자아의 발견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욱 배우고 배우게 된다.

시간이 나면 이 글을 읽고
루미의 책과 시를 만나보기를 바란다.
아마 동네 서점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서점 주인에게 부탁하라.
잘 구입해 줄터이니...
그 시집을 사고, 자유를 조금 얻으라.
영혼의 자유를 위해서 투자하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다.

그 사람의 인격을 보려면
그가 누구를 사랑하는지보다
그가 누구를 미워하는지를 보라
미워하는 자는 사랑에 거하지 않음으로
여전히 바른 인격자가 아니다.

ㅡ 루미의 시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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