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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과 고전 이야기

명길묻 12, 헤르만 헤세 [데미안 Demian] 인문학적 읽기

by 코리안랍비 2022.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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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Demian]
  • 헤세 - 독일문학 - 데미안 - 그의 초상
    구글출처 이미지

 




나의 글쓰기의 시작은 고등학교 시절부터이다. 고1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등장하는 주인공 싱클레어같이 감수성이 예민하고, 겉사람과 속사람이 서로 달라 자아갈등을 하는 자신속의 '나'를 달래기 위해서 썼던 것 같다. 처음부터 책이 좋아 책을 읽지 않는다. 처음부터 글쓰기가 좋아 펜을 들지는 않는다. 모든 일에 원인이 있듯이, 개인의 특별한 일에도 원인이 있는 것이다.

중학교 시절 아버지의 소규모 사업이 무너지고, 어머니는 시장에 나가서 채소와 과일을 파는 행상을 하셨다. 생의 처음 '가난'이라는 것을 경험하면서, 나는 급격히 방황하는 어린 영혼이 되어 갔다. 혼자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나는 여러 책을 읽으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 성격은 쾌활했지만, 그러다가 급격하게 우울해져갔다. 웃고 있지만, 울고 있는 야누스의 이중성은 그 때부터 발달했던 것 같다. 비극과 희극이 교차되는 청소년기라고나 할까...


누군가의 권유로, 나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영국의 문호 토마스 하디의 [테스]를 읽기 시작했다. 읽을 시간이 별로 없어서, 아침 7시 0교시에 읽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본 담임선생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읽고 있구나" 그리고 빙그레 미소만 지으셨다. 성장통을 겪고 있는 제자에 대한 배려의 말투셨다. 0교시가 되면 나는 한권씩, 한권씩 문학서들을 읽어 나갔다. 문과학생이기에 가능한 책읽기였던 것 같다. 나의 싱클레어는 그렇게 성장해나갔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고1인 나에게 신선한 충격도 주었고, 위안도 주었다. 남이 모르는 나의 심적 고통과 현실적 괴리감을 대변해주는 책이기에 그 후 몇번씩 읽었다. 나도 십대중반에 악의 구렁텅이로 넣으려는 '악인'들을 만나서 폭력을 경험하기도 했다. 심성이 착하지만 악을 사랑하고 선을 미워하는 잠시 거쳐가는 소나기같은 시절도 있었다. 성적인 충동과 갈등으로 밤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자아가 분열되는 것 같은 고통도 겪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출석하고, 성경을 읽지만, 반대되는 자아의 반항과 저항은 싱클레어를 닮았었다.


그후 대학에 와서는 헤르만 헤세의 다른 작품들도 즐겨 읽게 되었다. [크눌프], [수레바퀴 밑에서], [청춘은 아름다워라], [유리알 유희], [지와 사랑], [수채화가 머무는 시인의 마을]도 접했다.나에게 헤세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중성적인 책을 써나간 분으로 인식된다. 독일문학은 나의 평생의 동반자처럼 되어 버렸다. 이사를 가도 다른 책들은 버려도 헤세의 책들만은 버리지 않았다.


서두가 길어졌다. 본격적으로 헤세의 [데미안]에 대한 독서평설을 해 보자.
2015년 드라마 [프로듀사- 차태현, 공효진, 아이유, 김수현 주연]에서 화제가 된 책이 있다. 바로 [데미안]이다. 그 때 헤르만 헤세의 책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고 한다. 이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헤세의 [데미안]은 필독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헤세의 [데미안]이 유명해진 것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정여울의 [여행사진으로 만나는 데미안 작가,'헤르만 헤세' ] 덕분이다. 정여울 작가는 마음여행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헤세를 [진리탐구자]로 묘사하고 있다.

  • 뉴시스 출처 이미지

 


"삶이 힘겹게 느껴질 때마다 신기하게도 내 손에는 헤르만 헤세의 책들이 쥐어져 있었다" - 헤세로 가는 길 7p.

드라마 [프로듀사]에서 '신디역을 맡은 아이유'는 [데미안]의 여러 대목을 읽어간다. 그 대사중에는,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와 친하지 않았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누구의 마음에도 들려고 하지 않았다."
  • 구구글출처 이미지

싱클레어가 바라본 데미안은 동경의 대상인가, 아니면 애증의 대상인가, 뭔가 신비로운 느낌마져도 들었던 데미안의 이야기는 사실 헤르만 헤세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퍽 지루하게 다가올 수 있다.
  • 구글출처 이미지 - 그림 그리는 헤세



다시 나는 [데미안]을 잡아 들었다. 속독을 어느 정도 하고, 몇번을 읽은 나로서는 헤세의 [데미안]이 쉽고 편한 책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다시 보는 [데미안]은 쉬운 책이 아니었다. 종교학을 공부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히든 코드]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성서학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신화학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다행인 것은, 내가 프로이트나 칼 융의 심리학도 공부했고, 성서학을 전공하기도 했으며, 신화나 철학도 공부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데미안] 제대로 읽기를 시도해 보았다.


제 1차 세계 대전중에 나온 이 작품은, 헤르만 헤세의 영혼의 전기라고 할 수 있다. 독일 사람들이나 스위스 사람들은 이 작품을 '청년 운동의 성경'이라고 불렀다. 바로 그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공감을 얻었고,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위키백과)



원래 부제가 <에밀 싱클레어의 청년시절의 이야기>이다. 소년 싱클레어는 급우인 데미안을 통해서 점차 어두운 무의식 세계의 의미를 알게 되고, 자기 내면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를 통해 모든 통일의 상징을 본다.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장에서 부상당하고 쓰러진 뒤 데미인과 재회하여 자기 자신을 발견하한다. 이 작품은 전쟁이라는 시대적 위기와 막내의 중병, 아버지의 죽음, 아내의 정신병 등 가정적인 위기에 직면한 가운데, 정신분석학의 수법을 빌려 자기 내면에 몰입하면서 기성 가치관으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한 작품이다.

(*상담심리학에서는 싱클레어의 위기, 그리고 절망극복의 중요계기가 된 데미안과의 만남관계를 상담관계로 대비하여 데미안적 상담자가 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한다. - 2013년 한국심리학회지에서)


필자가 보기에, [데미안]은 싱클레어라는 소년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지만, 이 책은 어쩌면 데미안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10대 중반이나 20대 초에 이야기가 끝난다. 이 짧은 시기를 두고, 어떻게 자전적 소설이라고 불리울 까 하지만, 젊은 날의 헤세의 가치관과 세계관은 그 당시에 형성이 되었기에 자전적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의 가치관과 세계관은 사실상 10대 중반부터 20대 초반에 형성되지 않는가? 그후 이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지 않는가? (내 말이 틀리다면 논리실증적으로 반박하기 바란다. )


헤세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가, 나중에는 기독교를 버리고, 방황하는 자유인으로 살아간다. 싱클레어도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가, 사춘기의 방황을 겪는다. 그는 이 세상이 그의 가정처럼 평온하고 찬란한 '선'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발견하다. 가정과 사회의 금욕주의적인 가치관과 금지된 것은 대한 동경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던 싱클레어는 프란츠 크라머나 베크라는 '악인'들의 유혹으로 타락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성적인 충동을 통제하지 못해 괴로워한다. 점차 자신에 대한 환멸을 느끼며 모든 긍정적인 가치를 부정하게 된다.
그러다가 데미안을 만나서 악인 크로머에게서 해방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베아트리체를 만나서 어두운 충동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안정을 찾게 된다.

헤세의 어린 시절의 모습은 바로 싱클레어의 모습을 통해 그려진 것이다. 시간이 바뀌고, 시대가 바뀐다고 해도 우리 청년들의 모습도 여전히 비슷하다. '사춘기' 라는 한 단어가 그것을 다 말해준다. 사춘기 시절의 고민과 방황, 그리고 진한 성장통, 자아갈등이 없는 것은 불행한 것이다. 절망없이 희망도 없다. 괴테가 말한대로, [절망은 희망으로 가는 도상에 있는 것]이다.


헤세는 1916년 심각한 우울증과 신경쇠약을 보여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칼 융의 제자인 요제프 베른하트라 랑 박사의 치료를 받으며, 유대인인 지크문트 프로이드와 기독교인인 칼 융의 저술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자신을 괴롭혀 온 내적 갈등과 정신적 위기를 극복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헤세는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시도하고, 우리는 헤세의 작품, [데미안]에서 칼 융의 정신분석학의 미친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다. [데미안]의 첫 대사와 마지가 싱클레어가 자신의 내면에서 데미안을 발견한다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 구글 출처 이미지 - 스위스를 여행하는 헤세



서언을 보자.
[이 작품은 나로부터 시작하여 나를 향하는, 한 존재의 치열한 성장의 기록이다. 진정한 자아의 삶에 대한 추구의 과정이 성찰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서 헤세는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며, 누구나 나름으로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는 소중한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데미안 초반부를 보자.

"나는 나 자신에게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그 어떤 것에 의해 살아보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도 힘들었는지...."

데미안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그저 거울 위로 몸을 숙여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다.
거울안의 모습은 이제 완전히 그와 같았다.
나의 친구이자 나의 안내자인 그와"

주인공이자 화자(*나레이터격)인 싱클레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다. 코엘류의 소설 [연금술사]에 보면 '젊은이들은 모두 자아의 길을 찾아가는 존재'로 묘사된다.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제시하기 위해 헤세는 8개의 소제목이 붙은 '나와 자아찾기와 자아완성의 과정'을 다룬다.' 그 출발점은 '두 세계' , 정확히 그것에 대한 인식이다.

싱클레어는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가 나타난다.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가정, 모범과 규율이 지배되는 학교로 대변하는 빛의 세계와 반대로 그 세계속에도 어두운 세계가 공존한다.
"난 너처럼 부자 아버지가 없단 말이야" 라는 저급한 계급의식에 사로잡혀 에밀 싱클레어를 괴롭히는 프란츠 크로머는 어둠의 상징이다. 악의 구도에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두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는 에밀 싱클레어에게 전학을 온 '막스 데미안'은 빛의 상징이며, 지덕체의 구현이다.

또래들보다도 지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우월한 데미안의 '가르침'을 통해 싱클레어는 새로운 세계관을 갖는다. 성서에 등장하는 카인과 아벨이 헤세의 [데미안]의 두번째 소제목이 된다. 지금껏 밝고 순수한 세계에서 살아온 '일종의 아벨'이었던 그가 '카인의 표식'을 갖게 된다. 즉 '카인의 후예'로 한발짝 다가서는 것이다. 카인의 표식은 신으로부터의 독립한 초인적 인간의 모습으로 보여진다. 이는 니체의 철학을 닮았다. 니체의' 초인(위버멘쉬)'은 바로, 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신을 부정하는 존재이다. 헤세는 니체사상을 이 단락속에 집어 넣은 것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두르고 있던 사회를 조금씩 부수기 시작한다. 이런 데미안의 관점에 부담을 느낀 싱클레어는 다시 아버지의 세계로 돌아간다.
청소년기 싱클레어의 첫번째 어둠이 외부에서 왔다면, 두번째의 어둠은 자신의 내부에서부터 오기 시작한다. 싱클레어는 자기 자신속의 두개의 세계, 선과 악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싱클레어가 데미안과 헤어지고, 술을 먹고, 성욕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 절망한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한 여인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싱클레어는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에게 이름을 붙이는데 바로 '베아트리체'이다. 이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시에 등장하는 여인이며,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사랑하는 연인이다. 그는 자신 내부의 절망을 외부의 존재로부터 구원받고 싶어한다. 그러면서 그는 사랑하는 그녀의 그림을 그리닌데, 그녀의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데미안과 닯은 그림을 그린다.
이 대목은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으로보아, 자신의 가슴속 깊은 괴로움과 절망을 외부에서 해결하고자 하는데는 한계가 있으며, 자신의 내부에 있는 고통은 바로 자기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임을 반영한다.

데미안은 새 그림을 그려서 데미안에게 보낸다. 데미안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신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이다."

데미안의 메모에서는 선과 악에 대한 이분법을 바라보는 작가 헤세의 관점이 함축되어 있다. [데미안]의 최고의 대사를 헤세는 만들어낸다. (읽는 독자들은 그냥 이 말이 멋있다고만 생각할지 모르나, 이 말에는 그리스에서 발생한 영지주의-그노시스가 투영되어 있다. 플라톤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이단사설이기도 하며, 종교다원주의와도 관련이 깊다. 굳이 이 평설에서는 영지주의를 다루는 것은 무리다. ) 선과 악, 빛과 어둠을 동시에 품은 신 아프락사스는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상징한다. 인간학적으로 인간은 두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동시에 포용할 때에만 자기 기만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데미안은 이 일이 있은 후,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난다. 그는 데미안이후 싱클레어의 두번째 스승이 되는데, 그는 아프락사스에 대해 설명해 준다.(*아프락삭스에 대해서 심리학자 칼 융은 '죽은 자들에게 주어진 7강의들'이라는 책에서 모든 대립물이 한 존재안에 결합된 신이 아프락사스이며, 아프락사스는 기독교의 신과 사탄의 개념보다 더 고차적인 개념의 신이라고 말한다. 아프(브)락사스는 실재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가상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프락사스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도 등장하며, 헤세의 [데미안]에도 등장한다. 자세한 설명을 원하면 아브락사스나 아프락사스 지식검색으로 키워드를 치면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자기 영혼의 각성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싱클레어의 모습은 마치 헤르만 헤세가 어린아이가 아니라 진정한 인간, 자립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을 거울처럼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기자각 - 곧 자기 내면의 대립과 분열에서 해방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자아발견 - 곧 몽테뉴가 말한 '행복으로 가는 길'이며, '나의 나됨 추구'이다.

그리고 그 해방의 과정은 자기 내면의 자아발견과 일치한다. 그후 대학을 가게 된 싱클레어는 대학가에서 데미인과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만난다. 싱클레어는 에바부인에게서 선과 악, 빛과 어둠의 두 세계에 대한 문제의 해답을 얻는다. 싱클레어는 에바부인에게서 바로 데미안이 이야기 한 바가 있는 아프락사스적인 애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싱클레어의 관점에서는 에바부인에게서 마리아와 같은 숭고한 면과, 이와 더불어 유혹하는 이브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여인이다.
어느새 싱클레어는 에바 부인에 대한 성적 판타지에 집착하게 되고 그녀를 쟁취하려고 한다. 하지만 에바 부인은 그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한편으로 사랑으로 이끌어준다.

1차 세계대전이 나고, 데미안이 먼저 전선으로 산다. 나중 싱클레어도 전선으로 가는데, 전투중에 부상을 당한다. 싱클레어는 병원에서 그의 옆에 있는 사람이 바로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이별을 고한다. 즉, 더 이상 자신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싱클레어에게 키스를 하는데, 그것은 에바 부인이 키스를 대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후 싱클레어는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나보니 데미안은 없었다.
이 소설은 싱클레어가 홀로 남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이미 싱클레어의 마음속에는 데미안이라는 위버멘쉬(초인)이 살아 숨쉬고 있고, 싱클레어도 초인이 된 것이다. 여기서 초인은 삶의 위기와 절망을 벗고서, 자립적이면서 자유로운 해방자로서의 초인이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준 것은 바로 방황할 수 있는 자유였다. 그 방황은 자신이 하는 것이며, 그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밖에 그 방황을 감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싱클레어의 방황은 베아트리체도, 피스토리우스도, 데미안도, 에바 부인도 아닌 자신이 감당해야 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헤세 한 개인의 체험을 떠나서 인간이면 모두가 한 번씩 겪어나가야 할 성장통이며, 통과의례이다. 즉, 자아발견의 험난한 여정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적으로 필자의 생각이지만, 다른 헤세의 걸작들을 보아도 그렇다. 청년기에 부닥치는 인생에 대한 의문과 회의에서 비롯되는 내면의 고독과 방황을 어떻게 극복하고 자기완성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헤세는 '내면에 이르는 길' 하나를 해결책으로 제시하며 내 놓은 소설이 바로 [데미안]이다. 1차 대전후 혼란한 사회, 냉혹한 현실, 붕괴된 가치상들이 난무하는 절망적 세상속에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자기 실현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책은 니체의 책만큼 위험하지는 않다. 그러나 중간 중간 잘 읽혀지지 않는 헤세만의 코드가 들어 있다. 그 코드를 읽어내면 헤세가 얼마나 고뇌에 찬 작가였는지를 여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난 <철학하는 문학가> 였던 헤세를 통하여 철학적으로 '실존적 인간이해의 의미'를 파악하고 싶다.

우리는 타인과 더불어 살아간다. 타인은 내가 보고 느끼고 관계를 형성할 때 나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는 대상일 뿐이다. 그럴 때 타인은 은밀하게 자신을 드러내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수용하고 책임지며 자신의 행위를 떠맡으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과 함께 살아 가면서도 자기 자신만이 온전히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라는 사실이 우리를 고독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독자적인 존재로서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독을 피하고자 자신을 타인의 기대의 총체로 경험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바로 위기의 순간이다. 그러나 우리가 위기를 통해 우리의 시선을 외부세계의 외부경험으로부터 전환하여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다면, 위기는 자기 삶의 고유한 영역인 책임을 자각하는 가능성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위기속에 기회와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위기는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출발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위기에서의 실존적 고통을 해결하는 것은 두렵고 힘들지만 자신에게 몰두하게 만드는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자기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는 고상한 기회가 된다. 인생은 선택이다. 자유로운 존재인 나는 매 순간 선택을 하며 선택을 하는 순간에 미래로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이는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기 존재인 것이다.(하이데거의 존재론에 의거)

나의 [데미안] 읽기는 이것으로 마친다. 청소년기는 아직도 내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싱클레어를 알게 되니, 나를 알게 되는 것처럼 다가온다. 마치 앎이 삶이 되는 체험을 갖게 한다. 내가 존경하는 역사학자 유흥준 교수는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라고 말한다.
이는 인간이해란 앎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주체의 적극적인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데미안]이라는 문학작품을 읽어내는 것은 앎이다. 그렇지만 싱클레어를 통해서 '그'도 만나지만, '나'도 만나는 것이 진정으로 필요하다. 싱클레어를 통해 나의 삶의 위기와 절망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게 된다. 싱클레어를 통해 나는 위기가 없는 기회를 없다라고 단정한다. 싱클레어를 통해 절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그래서 문학이 좋다. 특히, 헤세문학이 좋다. 감사하다. 이 세상에 저런 문학가가 존재했다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여러번을 읽어도 나는 그의 문학에서 진한 여운과 감동이 다가온다. 헤세는 진정성을 갖춘 명작가이다. 그의 고뇌를 나는 사랑한다. 


ㅡ 이 평설을 다 쓰고 난 울었어요. 소중한 나를 왜이리도 해치고 살았는지에 대한 눈물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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